반란(1)

이산갑의 아침

by 이 범


1930년대 일제강점기 때 전라도 영광 고을의 도동리 멋진 한옥 기와집 젊은 이 기와집의 주인 이산갑은 어젯밤 대청에서 서류를 정리하다 잠이 들었다. 산감 벼슬의 업무였다. 총독부에서 내려온 산림 실태 보고서. 그것을 베끼느라 밤을 새웠다.


젊은 이산갑 은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여린 새소리에 잠에서 깼다. '또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이산갑. 함평 이 씨. 고려 부원군 이언의 후손.

산감(山監). 산림을 감독하는 벼슬.

하지만 그 이름들이 무슨 소용인가. 품어줄 나라가 없는데.



그것은 이른 아침을 알리는 종달새의 맑은 지저귐이었다. 그는 반쯤 덮인 이불을 밀어내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얇은 솜이불 아래로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이 어느새 초봄임을 알리는 듯했다.


침상 옆 창문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햇살은 방 안의 먼지마저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작은 창 너머 마당에는 살구나무 한 그루가 아직 움트지 않은 가지를 하늘로 뻗고 있었고, 저 멀리 들녘에선 논두렁을 손보는 이웃 농부들의 삽질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산갑은 마룻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앉은자리에서 한참을 가만히 평온한 마음을 갖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어쩌면 오늘도, 어제처럼 별일 없는 하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늘 무거운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 무릎을 꿇고 하루를 시작하는 기도를 올렸다

성호를 긋고 주의 기도를 마친 뒤 묵상을 하고 나서 큰 대청마루로 나가 산에 오를 배낭을 챙기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댓돌 위에 놓인 가죽신을 신으려던 그 순간, 나뭇가지 위에서 새 한 마리가 유난히 맑고 경쾌하게 울었다.


"오늘 하루도 살아 있음에 감사하라."라고 속삭이는 듯한 그 소리는 이산갑의 귀에 행복을 노래해 주는 듯했다. 이산갑이 산에 갈 채비를 하고 마당에 내려오자 하인들이 그를 배웅하려 나와 인사를 한다.


이산갑이 작은 짐을 들고 대청을 내려와 마당으로 발을 디디자, 미리 기척을 들은 하인들이 문간채에서부터 달려 나와 고개를 숙였다


“도련님, 오늘도 일찍 나가십니까?”잔잔한 미소를 띤 산돌이 가 공손히 물었다.

"응. 해가 오르기 전 산길을 타야지.”


이산갑은 짧게 대답하며 하인들의 인사를 정중히 받아주었다. 그의 말투엔 군더더기가 없었고, 눈빛엔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한 기품이 배어 있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외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마루 끝에 서 있던 늙은 하녀 막심 이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산바람이 찹니다요, 도련님. 겉옷을 하나 더 걸치시지요.”이산갑은 그녀의 손에 들린 옅은 갈색 솜도포를 받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막심이. 언제나 살뜰하구려.”그 말에 막심 이의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어린 시절부터 돌보아 온 도련님이, 여전히 한결같은 인품으로 말을 건네는 그 순간이 그녀에겐 고맙고도 짠한 기억이 되어 가슴에 새겨졌다.


안채에서 지영이 나왔다. 여든이 가까운 나이에도 허리가 꼿꼿했다. 머리는 하얗게 세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맑았다.


"산갑아."
"어머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밥은 먹고 가거라."
"산에서 먹겠습니다. 막심아줌마가 주먹밥을 싸주었습니다."

지영은 아들을 바라보았다. 서른이 넘은 아들. 그러나 지영의 눈에는 여전히 어린아이였다.

지영은 한숨을 쉬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네, 어머니."
산갑은 깊이 절했다. 몸을 돌려 대문으로 향했다.


대문 앞에서 이산갑은 한 번 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솟을대문을 나서는 이산갑의 발치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을 어귀로 내려가는 길목,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아 질척거렸지만 그의 걸음걸이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도동리 고을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듯 곳곳의 초가집 굴뚝에서 뿌연 아침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이었으나, 산갑의 눈에는 그 연기조차 힘겹게 느껴졌다. 산미증식계획이다 뭐다 하여 곳간이 텅 빈 농민들이 산의 나무뿌리라도 캐러 올라오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다


" 나으리, 오늘도 산으로 가십니까요?"
길가에서 거름 바지기를 지던 한 농부가 허리를 펴며 인사를 건넸다. 산갑은 걸음을 멈추고 가볍게 묵례했다.


"예, 장 서방. 올해는 유독 봄바람이 매서우니 건강 잘 챙기고 논물 관리에 신경을 써야겠소."


"아이고, 우리 같은 것들이야. 뭐..나라 잃고 땅 잃어도 나으리 같은 분이 산을 지켜주시니 그 나마 숨을 쉬지요.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농부의 말속에 뼈가 섞여 있었다. '나라 잃고 땅 잃어도'. 나라 잃고 땅 잃어도'.

산갑은 그 말을 가슴에 새기며 산등성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영혼까지 잃진 않았다.'


산갑은 그 말을 뒤로하며 산등성이를 향해 속도를 높였다.


그의 등 뒤로 영광 읍내 쪽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정적을 깼다.

주재소 순사들의 아침 점호 소리였다. 방금 전까지 들렸던 종달새의 지저귐은 어느덧 그 소름 끼치는 소리에 묻혀버렸다.



산갑은 도포 자락 안에서 묵주를 꽉 쥐었다. 마당에서 보았던 금빛 햇살은 여전했으나, 이제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금방이라도 폭풍이 몰아칠 것 같은 1930년대의 서늘한 조선이었다.

수,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