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와 강지윤
경성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실, 1933년 봄
창밖으로 경성의 봄 햇살이 들어오는 교수실. 책상 위에는 영양학 서적들과 실험 기록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강지윤이 차를 따르며 이은주에게 건넨다.
강지윤: "은주 선생, 이 홍차는 제가 일본에서 가져온 겁니다. 한번 드셔보세요."
이은주: (찻잔을 받으며 공손히) "감사합니다, 지윤 선생님. 항상 너무 잘해주셔서..."
강지윤: (미소 지으며) "선생님이라니요. 우린 동료 아닙니까. 그냥 언니라고 불러도 되는데. 나이는 내가 많지만, 은주 선생 덕분에 이 학교에 적응할 수 있었어요."
이은주: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언니처럼 식품영양학에 조예가 깊으신 분은... 조선에 없어요. 제가 배울 게 훨씬 많습니다."
강지윤은 찻잔을 들어 향을 음미하다가,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봄볕 아래 캠퍼스를 거니는 젊은 학생들의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강지윤: (조심스럽게) "은주야... 요즘 표정이 안 좋아 보여. 무슨 걱정이 있니?"
이은주: (한숨 섞인 목소리로) "...집안 걱정입니다, 언니."
강지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혹시 아버님께서 편찮으신가요?"
이은주: "아뇨... 아버지는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목소리가 낮아진다) "큰오빠 이야기입니다."
강지윤: "...이산갑 선생님 말씀이시군요."
이은주는 놀란 듯 강지윤을 바라보았다.
이은주: "언니... 오빠를 아세요?"
강지윤: (조심스럽게)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영광에서 계몽학당을 운영하신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교육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그 나이에 그런 일을 하신다니..."
이은주: (쓸쓸히 웃으며) "그래요. 오빠는 늘 남들을 위해 사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목소리가 낮아진다) "요즘 오빠가 너무 외로워 보여서요."
강지윤: (조용히 듣고 있다)
이은주: "몇 년 전... 오빠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윤서영이라는 분이었죠. 학당에서 함께 일하던 분이었는데..."
강지윤: (숨을 죽이며)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이은주: "학당에 불이 났습니다. 일본 경찰이 관여했다는 소문도 있었어요. 서영 선생은 그 일로 붙잡혀 가서... 고문을 당했고... 결국..."
강지윤의 손이 찻잔을 쥔 채 미세하게 떨렸다.
강지윤: "...돌아가셨군요."
이은주: (고개를 끄덕이며) "그 뒤로 오빠는 완전히 달라졌어요. 여전히 학당 일은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혼자 산에만 오르고... 새벽마다 기도하는 소리가 들리고... 어머니도 그런 오빠를 보며 마음 아파하셔요."
강지윤: "...오빠분께서 천주교 신자이신가요?"
이은주: "네.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우리 집안은 천주교와 인연이 깊었어요. 하지만 오빠의 기도는... 믿음이라기보다는 속죄처럼 들려요. 자신이 서영 선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강지윤은 찻잔을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았다.
강지윤: "그분이... 오빠분의 첫사랑이셨군요."
이은주: "네.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 사랑이 될 것 같아요. 오빠는 다시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 같습니다. 올해로 서른하나인데... 아직도 혼자세요."
강지윤: (조용히) "그런 분이라면... 더욱 훌륭한 분이시겠네요."
이은주는 강지윤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슬픔에 대한 이해와 깊은 공감이 담겨 있었다.
이은주: "언니...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강지윤: "말씀해봐, 은주야."
이은주: "언니께서는... 혼담을 받아보신 적이 있으세요?"
강지윤은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차분하게 대답했다.
강지윤: "몇 번 있었어. 하지만... 내가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는 것, 그리고 교수 일을 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대부분 성사되지 않았지."
이은주: "그럼... 언니께서는 어떤 분을 원하시는지..."
강지윤: (잠시 생각하다가) "나는... 화려한 사랑을 바라지 않아. 내가 존경할 수 있고, 함께 뜻을 나눌 수 있는 분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해."
이은주의 눈빛이 밝아졌다.
이은주: "그렇다면... 언니, 우리 오빠를 한 번 만나보시겠어요?"
강지윤: (놀라며) "...뭐?"
이은주: "오빠는 과거를 잊지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평생 혼자 살 수는 없잖아요. 오빠에게는... 함께 짐을 나눠줄 사람이 필요해요.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서로 존경하고, 의지할 수 있다면요."
강지윤은 찻잔을 바라보며 긴 침묵에 잠겼다. 창밖에서는 새소리가 들려왔다.
강지윤: (천천히)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한 번... 뵙겠어."
이은주: (기쁘게) "정말요? 고마워요, 언니. 오빠는... 좋은 사람이에요. 아마 언니도 오빠를 존경하게 될 거예요."
강지윤: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럼... 은주야, 한 가지만 약속해줘."
이은주: "뭔데요?"
강지윤: "내가... 윤서영 선생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 그저 곁에서 함께 걸어갈 동반자가 될 뿐이라는 것. 그것을 오빠분께서도 이해하신다면..."
이은주는 강지윤의 손을 꽉 잡았다.
이은주: "오빠도 그걸 원할 거예요. 언니... 정말 고마워요."
창밖의 봄바람이 교수실 안으로 살며시 들어왔다. 두 여인의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햇살에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