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84)

제중병원 복도.

by 이 범

몇 개월이 지난 후, 병원 복도의 차가운 공기가 박종진의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의 발걸음은 마치 납덩이라도 매단 듯 무겁게 복도를 비틀거렸다. 텅 빈 시선은 아무것도 담지 못한 채 허공을 헤매고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처럼 혼란스러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다고?' 믿을 수 없는 현실이 거대한 파도처럼 그를 덮쳐왔다.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충격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그림자 앞에서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럼 강지윤과의 혼사는?' 아버지의 죽음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그의 마음을 짓누르는 문제였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원하시던 혼사인데...' 병약한 몸을 이끌고서도 마지막까지 강지윤과의 결혼을 염원했던 아버지의 간절한 눈빛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염원은 이제 유언처럼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차가운 벽에 등 기대어 섰다. 서늘한 감촉이 그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지만, 마음속의 들끓는 번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복도 끝에서 간호사들이 바쁘게 오가는 모습, 희미하게 들려오는 환자들의 신음 소리, 이 모든 것이 마치 다른 세상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박종진은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강지윤... 그 여자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 말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잔혹한 진실이었다. 지윤의 눈빛에서 읽었던 싸늘함, 그의 손길을 피하던 미세한 움직임, 그의 말에 대답하던 형식적인 목소리... 모든 것이 그녀의 마음이 자신에게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그녀의 마음이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하지만 아버지께서..." 그는 희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지윤의 거부와 아버지의 유언 사이에서 그는 산산조각 나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갈기갈기 찢어지는 마음을 애써 부여잡으며,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굳게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고뇌와 절망, 그리고 체념이 뒤섞인 깊은 한숨을 내쉰 박종진은 이내 결심한 듯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에는 붉게 충혈된 고통 너머로, 차갑고 단단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은 앞으로 닥쳐올 모든 것을 감당하겠다는 듯 비장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아버지의 마지막 염원을 위해, 그리고 스스로의 파멸을 향해 한 발짝 내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