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당화재
산등성이를 거의 다 내려왔을 즈음,
이산갑의 눈에 낯선 기운이 들어왔다. 마을 위로 검붉은 연기가 굵은 기둥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순간 그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불이다!
짙은 연기 속에서 타 들어가는 나무 냄새와, 바람에 실려 오는 매캐한 탄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귀에는 바람을 타고 울려 퍼지는 사람들의 고함과 뒤엉킨 소란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산갑의 심장은 쿵쿵 소리를 내며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온몸을 쥐어짜듯 힘을 모아 발길을 재촉했다. 풀숲을 헤치고, 돌길을 내리달리며, 그저 한 걸음이라도 빨리 마을로 닿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다.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만이 떠올랐다. 무사해야 한다. 제발 모두 무사해야 한다.이산갑은 발길을 재촉하며 마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아래 돌멩이들이 굴러 떨어지고,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나뭇가지들이 그의 옷자락을 붙잡으려는 듯 흔들렸다. 길은 이리저리 휘어져 있었고, 발목까지 쑥 빠지는 진흙이 그의 속도를 방해했다. 작은 돌멩이와 잡초가 길을 더욱 울퉁불퉁하게 만들었다그가 달려갈수록 연기는 더 짙어지고, 불길의 날카로운 타닥거림 소리가 귓가에 울리기 시작했다.
땀이 그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고, 그의 발은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멈출 수 없었다숨이 턱밑까지 차올랐고. 논두렁길이 지금은 좁디좁은 길로 보여 달리기가 많이 어려웠다.그러나 그는 달리기를 멈출 수없었다.
"아아! 어찌하여 학당에 불이 난 것인가! 불길은 마침 불어닥친 바람을 타고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마을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우물을 오가며 물을 퍼 날랐지만, 불길은 잡힐 줄 몰랐다마을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개울과 우물을 오가며 물을 퍼 날랐지만, 불길은 잡힐 줄 몰랐다
이산갑도 팔을 걷어붙였다. 그리고 지붕으로 올라가 타오르는 볏짚을 낫으로 끌어내리기 시작했다.""아! 그토록 애써 세운 학당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생각하며 낫질에 매달렸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불길이 조금씩 잡혀갔다. 땀으로 온몸이 축축한 이산갑은 그제야 겨우 긴장을 풀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산갑이 다 무너져 버린 잿더미에서 무언가를 두리번거리며 찾고 있었다.. "그래, 변두리 세 번째 기둥이었어. 맞아!" 그는 주춧돌만 남은 화재 현장에서 그 주춧돌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불타버린 학당터. 붕괴된 기둥의 잔해들 사이를 이산갑은 무겁게 걸어 들어갔다.재와 먼지로 얼룩진 얼굴에는 땀이 뒤섞였고, 그의 눈은 무언가를 찾는 듯 초점 잃지 않았다.이산갑은 혼잣말을 되뇌며 불에 그을린 돌무더기 사이로 몸을 낮췄다.겨우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주춧돌 아래, 손으로 잿더미를 헤치기 시작잠시 후, 무너진 돌 틈 사이로 작은 주머니 하나가 그의 손끝에 닿았다
그 안에는 그날 윤서영과 함께 묻었던 서약문,그리고 서로를 기억하자며 끼워두었던 한 쌍의 반지가 조심스럽게 드러났다.반지는 그을음에 얼룩졌지만, 그 안에 담긴 기억은 너무도 선명했다.그날의 따스한 햇살, 윤서영의 해맑은 웃음, 그리고 손을 맞잡고 함께 내뱉었던 약속이산갑의 손이 떨렸다. 그는 반지를 쥔 손을 가슴에 대고 한참 동안 눈을 감았다
불길마저 앗아가지 못한 기억. 이것이 자신을 다시 일으킬 힘이 되리라는 것을 그는 직감했다.이것이 그를 다시 일으킬 힘이 되리라는 걸 그는 알았다.이산갑은 그 작은 주머니를 소중히 들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산갑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손에 쥔 작은 주머니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해는 이미 서산 너머로 기울고 있었고, 마을 곳곳에는 여전히 매캐한 연기가 자욱했다. 사람들은 지쳐서 주저앉아 있거나, 타버린 학당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산감님..."
뒤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돌아보니 마을 이장 박서방이었다. 그의 얼굴도 그을음으로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이장님, 어찌 된 일입니까? 불은 어떻게 난 겁니까?"
이산갑이 물었다. 박서방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게... 아침 일찍 일본 순사들이 들이닥쳤습니다. 학당에 불온한 서적이 있다며 뒤졌지요. 그러다 갑자기 불이 났는데..."
박서방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정말 실화인지, 아니면 일부러 지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순사들이 황급히 떠났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산갑의 주먹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 손 안의 주머니가 더욱 뜨겁게 느껴졌다.
'윤서영... 우리의 학당이...'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민족의 교육을 위해 세웠던 학당. 그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이장님, 다친 사람은 없습니까?"
"다행히 불이 났을 때 학생들은 없었습니다. 다만..."
박서방이 입술을 깨물었다.
"윤 선생님께서 행방이 묘연합니다. 아침부터 보이지 않으신다는데..."
이산갑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윤서영. 그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혹시 일본 순사들에게...
"찾아보셨습니까?"
"예, 마을 사람들이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이산갑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초가집 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희미한 등잔불이 그를 맞이했다. 그는 작은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풀어 반지와 서약문을 꺼냈다.
촛불을 켜고 서약문을 펼쳤다. 낡은 종이에 적힌 글씨가 어렴풋이 보였다.
*"우리는 이 땅의 아이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고, 민족의 정신을 지켜나갈 것을 맹세합니다."*
윤서영과 함께 쓴 그 글귀 아래,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이산갑은 반지 하나를 손가락에 끼워보았다. 조금 작았지만, 여전히 그날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서영...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소?"
그는 반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타다 남은 학당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였다.
이산갑은 반지를 소중히 품에 넣고, 벽에 걸린 낡은 지도를 바라보았다. 조선의 산하가 그려진 그 지도 위로, 그의 시선이 북쪽을 향했다.
'한재호와 김유성은 무사히 갔을까... 그리고 서영은...'
밤은 깊어가고, 마을은 고요했다. 하지만 이산갑의 마음속에서는 수많은 생각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는 묵주를 꺼내 들고, 촛불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동지들의 안전을 위해, 윤서영의 무사함을 위해, 그리고 언젠가 다시 세워질 학당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산갑은 백정치의 공허한 눈빛을 읽었다. 오랜 세월 사람을 대하며 익힌 통찰력으로, 그 겉도는 인사말 뒤에 숨은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치야, 땔감쯤이야 이웃끼리 당연한 것 아니냐. 날이 추워지니 댁도 몸조리 잘하게."
이산갑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따스함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 따스함이 오히려 백정치의 가슴을 더 쓰리게 만들었다.
'저 여유로움... 저 관대함... 나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것들이지.'
백정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 어르신.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오늘 마을 청년들이 학당 터를 정리한다 하여 거들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래, 수고하게. 아, 그리고 정치야..."
이산갑이 백정치를 불러 세웠다. 백정치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혹시 마을에 낯선 사람이 다녀가거나, 수상한 기운이 있으면 나에게도 알려주게. 요즘 일본 순사들이 자주 들락거리니 조심해야 하네."
백정치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백정치가 돌아선 뒤, 이산갑은 그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등이 굽고, 걸음걸이가 무거운 그 모습에서 이산갑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한과 절망을 읽었다.
'정치... 자네는 왜 그리 자신을 괴롭히는가...'
이산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분의 차이, 그것은 이 땅의 가장 깊은 상처였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해도,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그 벽을 넘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품속의 작은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윤서영과의 약속, 학당에서의 꿈, 그리고 조국의 독립... 모든 것이 신분의 벽을 허물고,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것과 닿아 있었다.
'언젠가는... 정치 같은 이들도 당당히 살 수 있는 세상이 오겠지.'
이산갑은 다시 산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해는 중천에 떠 있었고,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한편, 마을 어귀로 돌아선 백정치는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아팠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존경과 질투, 감사와 원망이 뒤섞여 그를 짓눌렀다.
그때, 마을 입구에서 낯선 사내 하나가 그를 불렀다.
"백정치 씨 맞습니까?" 돌아보니, 일본 순사복을 입지는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기운을 풍기는 사내였다. 백정치는 경계심을 품고 대답했다.
"...그런데요?" 사내는 주위를 살피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당신에게 좋은 제안이 있습니다."
백정치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지만, 동시에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
"...무슨 제안 말입니까?" 사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한 발짝 더 다가왔다.
"이산갑이라는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그 순간, 백정치의 온몸이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