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갯벌소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ed 강상원 Oct 19. 2023

갯벌 소녀

1


 “그 섬에 가면 정말 우리말을 알아듣는 소녀가 있어?”

 “정말이지. 그럼.”


 V자 형태를 이루며 비행을 하는 새 무리에서 아기 새와 엄마 새가 말을 주고받았다. 자신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인간이 있다는 이야기는 아기새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적당한 흥분과 자극된 호기심으로 아기새는 더 힘차게 비행하려 했지만 대열을 유지하기 위해 어미새가 이를 말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소녀는 단순히 우리말을 알아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야. 긴 비행으로 지친 우리에게 기분 좋은 노래를 들려줘. 우리는 매년 이 맘 때쯤이면 소녀가 있는 갯벌에 들려. 그곳은 먹을 것이 풍부하고, 노을이 아름다운 곳이야. 거기에 더해 소녀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노래는 우리의 지친 몸을 달래주지. 그 덕분에 우리는 다시 또 먼 비행을 떠날 수 있어.”


 이 제도(諸島)에는 수많은 생명이 살아가고 있었다. 물이 들어설 때면 여러 개의 섬으로 나누어졌고, 물이 빠지면 이 섬들은 갯벌로 연결되어 하나의 섬이 되었다. 사계절이 뚜렷한 이 섬의 군락은 철새들의 천국이었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자신에게 맞는 날씨에 따라 이동하며 사는 철새들에게 유일한 중간 휴식처였다. 갯벌로 연결된 이 섬들은 각각의 숲을 가지고 있었다. 작은 산부터 제법 높은 산까지. 푸른 숲이 우거진 이곳을 찾는 철새들도 있었다. 하루는 시원한 파란 공기가 바다를 통해 갯벌 위로 미끄러지며 숲으로 들어왔다. 또 하루는 숲이 내뿜는 풀내음 가득한 공기가 하늘 위로 뿜어지면 바다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한 소녀와 강아지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자연은 소녀에게 놀이터이자, 운동장, 학교, 도서관이었다. 여러 동식물과 이야기를 하고, 뛰놀며 세상을 배워 나갔다. 소녀는 자신이 사는 갯벌 섬을 사랑했다. 동시에 세상을 점점 더 알아 갈수록 소녀는 소녀가 살아온 섬 바깥의 세상이 궁금했다. 섬에서만 자라온 소녀는 늘 바다 넘어 세상을 동경했다. 그런 소녀에게 새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늘 새롭고 흥미로웠다. 소녀는 계절에 따라 찾아오는 새들을 늘 반겼다.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 어떤 호기심이 해소되고, 또 다른 호기심이 생겨날지. 소녀에게 있어 새들은 세상을 알려주는 부모, 선생님, 친구, 형제였다.


 소녀는 철새들이 들려준 바다 너머의 세상을 직접 만나 보고 싶었다. 정말로 산보다 더 큰 얼음 덩어리가 있는지. 영원히 녹지 않는 눈 덮인 산이 있는지. 물속에서 자라는 나무가 있는지. 2000살이 넘는 나무가 있는지. 철새 100마리를 합친 것보다 더 큰 물고기가 실제 하는지. 몸에서 빛이 나는 날벌레가 있는지. 새끼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동물이 있는지. 새끼를 배 위에 올려놓고 헤엄치는 동물이 있는지. 날지 못하는 대신 수영을 잘하는 새가 있는지.

 철새들로부터 전해 들은 세상을 소녀는 자신의 감각으로 직접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그곳의 생명체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알고 싶었다. 그곳의 생명체들과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다. 소녀가 자랄수록 세상을 향한 모험심 또한 커져 갔다.


2


 이 맘 때쯤이면 소녀는 갯벌의 생명체들이 저마다의 짝을 잘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짱뚱어는 타고난 수영 선수이자 물 밖에서도 잘 움직이는 물고기다. 짱뚱어 수컷들은 자신의 몸에 박힌 아름답고, 푸른 반점들을 뽐내며 암컷들 앞에서 구애의 춤을 춘다. 마음에 드는 암컷이 나타나면 다가가 접혀있던 지느러미를 활짝 펼친다. 칠게 또한 암컷 앞에서 양 집게를 높이 들어 올리며 구애의 춤을 춘다. 마치 일정한 박자에 따라 만세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몇 년 전 한 수컷 짱뚱어 한 마리가 마음에 드는 암컷에게 구애의 춤을 펼쳤지만 차이고 말았다. 친구들은 다들 짝을 찾아 각자가 마련한 신혼집으로 가 버렸고, 그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만 봤다. 밤이 찾아오고 짱뚱어는 혼자서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홀로 떠있는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도가 내는 소리에 맞춰서 짱뚱어는 자신의 지느러미를 접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자신의 춤사위가 그렇게 형편없는지. 몸집이 작아 사냥을 못할 것 같아 보였는지. 갖가지 상념에 사로잡혀 홀로 푸념을 하던 도중 소녀가 말을 걸어왔다. 짱뚱어는 소녀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고, 소녀는 내일부터 춤연습 하는 것을 도와준다고 했다. 

 다음날부터 소녀는 노래를 불러주며 짱뚱어가 구애의 춤을 더 매력적으로 출 수 있게끔 도와줬다. 소녀의 도움하에 춤연습을 시작한 지 1주일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어김없이 소녀와 함께 연습을 하던 와중 자신이 마음에 들었던 암컷 짱뚱어가 저 멀리 지나가고 있었다. 소녀는 단번에 상황을 눈치채고, 어서 가보라고 손짓했다. 짱뚱어는 망설였지만 소녀의 표정에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이내 자신이 좋아하는 짱뚱어 앞에 도착했고, 구애의 춤을 추려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갯벌에 구멍을 파 숨고 싶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도망치려는 찰나 노래가 들려왔다. 소녀였다. 소녀는 짱뚱어의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저 멀리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암컷 짱뚱어 또한 노랫소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수컷 짱뚱어는 노랫소리에 맞춰 그간 연습한 구애의 춤을 펼쳤다. 지느러미를 접었다 폈다 하며 자신의 마음을 암컷 짱뚱어에게 전했다. 이내 암컷 짱뚱어는 볼을 내밀었고, 수컷은 타이밍에 맞춰 암컷 짱뚱어의 볼에 입을 맞췄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소녀는 무척이나 뿌듯함을 느꼈다. 그 옆에서 함께 응원하던 소녀의 강아지 또한 기쁘다는 듯이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주변을 맴돌았다. 

 이 소식은 얼마 안 가 온 갯벌에 전해졌다. 그 못나고, 인기 없던 짱뚱어가 갯벌 최고의 미어(美魚)를 낚아챘다고 생각하니 다른 짱뚱어들은 질투심이 났다. 다음 날 수컷 짱뚱어 몇 마리가 갯벌에서 놀고 있는 소녀를 찾아왔다. 다음 날 더 많은 수컷 짱뚱어들이 찾아왔고, 이내 수컷 칠게 무리들까지 찾아왔다. 이렇게 매년 짝짓기 철이 다가오면 소녀는 수컷 짱뚱어와 칠게 무리들에게 노래를 들려주었다. 소녀의 노래와 손짓에 맞춰 수컷 생물들은 구애의 춤을 연습했다. 소녀가 왼손을 들면 짱뚱어들의 지느러미와 칠게들의 양 집게가 왼쪽으로 뻗어 있었다. 오른손을 들면 오른쪽으로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이 바다 생물들은 우승꽝스러우면서 사랑스러운 모습을 연출했다.

 올해도 갯벌에는 짝짓기 철이 다가왔다. 소녀는 여느 때처럼 노래를 불러주며 수컷들이 더 매력적인 춤을 추도록 도왔다. 그러던 와중 칠게 한 마리가 낯선 색깔의 돌을 집어 올리고 내렸다. 호기심이 생긴 소녀는 낯선 돌멩이를 들고 있는 게에게 다가갔다. 소녀의 걸음에 맞춰 갯벌 위의 동물들이 양 옆으로 펼쳐 섰다. 소녀가 손을 내밀어 눈에 익지 않은 형체를 집으려 했다. 동물들은 소녀의 행동이 춤연습의 한 과정인 줄 알고, 지느러미와 양 집게를 어색한 방향으로 뻗었다. 

 소녀는 처음에는 잘 못 본 것인 줄 알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니 못 보던 형태의 돌멩이였다. 소녀가 그간 봐온 돌과는 다른 색깔과 형태였다. 매끈매끈한 것이 자연에서 봐왔던 돌과는 형태가 달랐다. 새파란 색깔이 짱뚱어의 반점과 닮은 듯하면서도 달랐다. 조금은 인위적인 색채와 형태였다. 소녀는 이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근처에 그 돌을 던졌다.

 돌을 던진 방향 넘어 멀리서 철새 무리가 날아오고 있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