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day, Mate!"
“하얀 입김 대신 설렘이 피어올랐다.”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
퍼스(Perth) 공항에 도착하니 무더운 공기가 나를 맞이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양 볼이 시린 찬 공기가 가득한 한국이었다. 찬 공기 틈으로 하얀 입김이 보이는 나라에서 지구 반대편으로 왔음을 실감했다. 이렇게 뜨거운 12월은 처음이었다.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라는 별명이 잘 어울리는 나라다웠다. 우리나라와 계절이 반대로 작용하는 지구의 또 다른 반쪽. 남반구의 호주라는 나라에 도착했다.
짐을 찾고 출국장에 나오니 내 영문 이름이 쓰여있는 피켓이 보였다. 가지고 있는 짐과 현찰등을 고려했을 때 첫 날 만큼은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숙소에 도착하고 싶었다. 차를 타고 한 달간 머물기로 한 홈스테이 집으로 향하였다. 홈 스테이할 곳에 도착하니 미드에서 자주 봤던 마음씨 고운 백인 아주머니(이하 수잔, 가명)가 나를 환영해 주었다. 그간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 왔지만 막상 실제 원어민과 대화를 할려니 조금 긴장됐다. 다행히 홈스테이 경험이 많은 수잔은 나를 배려해 천천히 또박또박 발음해 주었다. 그럼에도 ‘이건 첫 실전이야!’라는 생각이 강한 나는 조금 어색한 영어를 내뱉었다. 말하는 도중 내가 사용한 문법과 어휘가 엉망임을 알았다. 다행히 수잔과의 의사소통에 큰 문제는 없었다. 외국인이 어설프게 한국말을 해도 우리가 그 뜻을 이해하는데 큰 문제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수잔은 경험 많은 호스트였다.
집에는 나 말고 홈스테이를 하는 친구가 한 명 더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온 친구(이하 로렌조, 가명)였는데 새로운 문화를 체험해 보고 싶어서 호주에 왔다고 했다. 그날 저녁 수잔이 차려준 밥을 같이 먹는데 로렌조가 같이 맥주 한 잔 하러 나가자고 했다.
거리는 이미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가득했다. 한국도 연말이면 곳곳에 트리나 조명을 비롯해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지만 호주는 그 분위기가 무척 달랐다.
도시의 가장 중심지에는 고층 건물이 제법 있었지만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빼곡하지는 않았다. 강남 한복판의 마천루가 셀 수 없이 많다면, 퍼스 시내의 중심부에는 충분히 손가락으로 셀만큼의 고층 빌딩만 있었다. 이 건물들은 옆의 층 낮은 건물들과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층 낮은 건물들은 외관이 예쁜 것이 많았다. 유럽 길거리의 느낌과 비슷했다. 이를 보며 확실히 서구 사회에 왔음을 느꼈다. 게다가 사람들의 짧은 옷차림은 이국적 분위기를 한 층 더해주었다. 거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넘쳐났지만 전혀 춥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 더웠다. 반짝반짝 빈 나는 전구와 거리 곳곳에 장식된 트리들 옆으로 반팔,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항상 쌀쌀한 날씨, 하얀 눈, 얼굴 위로 피어오르는 입김만 경험했던 내게 꾀나 색다른 모습이었다. 새로운 세상에 왔음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얀 입김 대신 설렘이 피어올랐다.
나와 로렌조는 CBD(Central Business Department) First zone의 번화가에 갔다. 퍼스의 가로수길 같은 곳이었다. 우리는 한 펍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로렌조는 호주에 온 지 한 달쯤 된 상태였다. 나보다 1살 많았다. 당시 나는 이탈리아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피자, 파스타, 축구가 전부였다. 로렌조도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강남 스타일’ 뿐이었다. 서로 서툰 영어를 사용하면서 꾸역꾸역 대화를 이어갔다. 그런 도중 내가 최근에 군 복무를 마쳤다고 했다. 한국은 분단국가여서 군복무가 의무라고 했더니 로렌조도 흥미를 보였다. 알고 보니 로렌조도 군대를 다녀왔었다. 로렌조가 억울해하는 말투로 자신의 군복무 이야기를 이어갔다. 로렌조는 86년생인데, 해당 출생 연도가 마지막 의무복무 세대였다. 즉 87년생부터는 군대가 의무가 아닌 선택이었다. 우리는 강제로 군대를 다녀와야 하는 억울함을 서로 토로하고, 각 나라의 군대 문화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로렌조는 ‘어린것들이 군대를 안 다녀와서 정신 못 차리고 있다는 등’의 표현을 했고, 나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한 사고방식은 우리나라 혹은 동양 특유의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유럽의 한 백인 입에서 연세든 아저씨 같은 표현이 나와 신기했다. 그전까지 뜨문뜨문 이야기가 이어졌던 것에 비해 금세 대화에 불이 붙었다. 남자들의 군대 얘기는 한국에서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나온 부대가 가장 힘들었다’라는 공식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말 같았다. (확실히 우리는 자신의 경험이 조금은 숭고하고 가치 있기를 바란다.)
로렌조는 10개월간 복무했는데 나는 그 시기의 2배는 더 복무했다고 했다. 로렌조는 엄청 놀랐다. 이후 한국의 남북문제를 비롯하여 전통, 문화, 음식, 학교 생활 등 서로의 나라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물어봤다. 로렌조와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면서 어느덧 제법 향상된 내 영어실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소통에 있어서 언어 능력이 꼭 절대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간에 군대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 어색한 대화가 이어졌다. 쉬운 문장도 떠듬떠듬 이야기했다. 로렌조의 표정을 보면서 ‘내 이야기 알아들은 거 맞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새 군대라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서로 자연스럽게 소통하고 있음을 느꼈다. 내 호주의 첫날 저녁은 그렇게 새로운 세상을 만나면서 마무리 됐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하루를 돌아봤다. 낯선 나라에 도착. 이국적인 나무와 그 위로 펼쳐진 예쁜 하늘. 한국과 좌우가 반대인 도로. 나를 반갑게 맞아준 호스트.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 내 삶에 첫 이탈리아인과의 대화. 한국과 사뭇 다른 형태의 대중교통. 다양한 인종이 오가는 길거리.
‘역시. 호주에 오길 잘했어. 이렇게도 색다른 것 투성인데 이를 보지도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어. 그리고 세상에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이 얼마나 많을까? 죽기 전에 다 볼 수 있을까?’
1000년 전 한 나라의 장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한 평야. 위대한 문호가 영감을 받았다 숲. 전설의 동물이 출몰한다는 호수. 빛이 유려하게 쏟아지는 하늘. 나의 경이로움이 폭발할 만한 장소를 상상하며 호주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호주에서의 첫날은 내가 내린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며 잠들었다.
둘째 날은 제법 바빴다. 앞으로 호주에서 지내기 위해 필수적인 행정 업무가 필요했다. 핸드폰 개통, 통장 만들기, TFN(Tax File Number) 신청 등을 했다. 우선 시내에 나갔다. 핸드폰 개통을 위해서 반드시 대리점에 갈 필요는 없다. 마트를 비롯해 유심칩을 파는 곳이면 상관없다. 통장 개설도 가까운 은행에 가면 된다. 하지만 나는 시내로 나갔다. 호주 시내 중심부에 광장과 주립 도서관이 궁금했고, 시내를 익혀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 시내 한복판에 Commonwealth Bank가 크게 있었다. 호주에서 가장 대중적인 은행이다.
통장을 만들면서 필요한 서류를 건네고, 궁금한 사항들을 물어봤다. 적금 상품, 대출, 이자 등등을 물어봤다. 몇몇 사항은 사실 궁금하지 않았지만 현지인들과 최대한 영어로 대화하 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활용하고 싶었다. 같은 이유로 핸드폰 통신사 지점도 방문했다.
호주에는 제일 유명한 통신사 3개가 Telstra, Optus, Vodafone이 있다. 워홀 가는 대부분이 옵터스(Optus)를 쓴다. 요금이 제일 저렴한 것도 있지만 ‘워홀러라면 옵터스’라는 일종의 공식이 있다. 나는 해당 공식을 그대로 따르고 싶지 않은 반항심이 있었다. 그리고 호주의 가장 큰 통신사는 텔스트라(Telstra)다. 한국으로 치면 SK Telecom이다. 제일 큰 통신사인만큼 호주에서 오지를 가도 데이터 연결과 통신 상태가 양호하다. 즉, 잘 터진다.
호주 땅의 98%는 사람이 살지 않고, 사람이 거주하는 나머지 2%의 땅도 전부 해안가에 몰려있다. 즉, 사람이 살지 않거나 비교적 적은 인구가 사는 곳으로 가면 가끔 핸드폰이 잘 안 터지는 경우도 있다. 나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 모르지만 혹시 오지에 있는 농장이나 공장에서 일할 것을 대비해 텔스트라 회사의 유심을 사용했다.
필요한 행정 업무를 다 마치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어디를 방문하거나 구경하겠다는 목표보다는 길거리에 익숙해지고자 함이었다. 내 핸드폰에 인터넷이 연결된 것을 확인하고, 구글맵을 본격적으로 활용했다. 해외를 다녀와본 사람들은 모두 알겠지만 구글 맵은 진짜 생필품이다. 구글맵에 의지하며 도심 한복판의 길거리를 익혔다. 시내를 두 번째 방문하는 것이었지만 충분히 길을 익힐 수 있었다. 길이 널찍하고, 잘 정돈 돼 있었다. 한국처럼 번화가가 크고 복잡하지 않았다. 그리고 길 외우는 것은 자신 있었다. 어렸을 때 부모님 치킨집을 도와 배달을 많이 다닌 경험덕이었다.
도서관에 도착하니 쾌적하고, 실내 공간이 제법 예뻤다. 특별히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설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의 밀폐형 열람실이 가득한 건물에 비해 개방된 공간이 많았다. 아니 오히려 개방된 공간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높은 천장 아래 화이트톤의 창문과 테이블이 깔끔한 인상을 주었다. 테이블에는 낯선 백인들이 주로 앉아서 각자 할 일들을 하고 있었다. 내가 다른 나라에 있음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도서관에서 책 대여 카드도 만들었다. 책 대여를 통해 영어 실력을 늘리기 위함도 있었지만, 현지 생활에 나를 더 동기화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도서관을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과 이를 둘러싼 곡선형 계단에 사람들이 적절히 흩어져 각자의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계단판과 계단참이 널찍해서 사람들이 편히 앉을 수 있었다. 피크닉을 나온 사람, 앉아서 광장의 공연을 즐기는 사람, 독서를 하는 사람,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 아장아장 걷는 아기. 예쁜 하늘의 축복을 받은 나라만큼 사람들의 표정에 여유와 한적함이 광장 곳곳에 묻어 있었다. 나도 하릴없이 앉아서 주변을 관찰했다. 일하는 것도 노는 것도 바쁘게 돌아가는 한국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그렇게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를 오감으로 접하며 새로운 세상에 첫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Come to Switzland
어학원 첫날이었다. 어학원과 홈스테이 하는 곳의 거리가 제법 됐지만 교통비를 아끼고자 자전거를 타고 갔다. 하우스 호스트인 수잔이 자전거를 얼마든지 이용해도 좋다고 했다.(다음 날부터 바로 버스를 다시 이용했다.)
퍼스의 교통망은 서울과 달랐다. 퍼스를 비롯한 호주 대부분의 대중교통망은 한국처럼 촘촘하지 않다. 한국의 70배는 넘는 땅덩이에 인구는 절반이니 당연한 이야기다. 이동 경로에 따라 선택 가능한 대중교통이 많은 한국과 달리 호주는 어디를 가든 대중교통 이용경로가 비슷하다. 우선 출발지에서 시내 중심부, 즉 First zone으로 간 후 다시 목적지로 향하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좋든 싫든 Central을 경유해야 한다. 물론 중심부를 거치지 않고 가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거리가 가깝거나, 드문 경우다. 당시 내가 홈스테이 하던 곳에서 어학원을 오간 경로도 Central을 거치는 것이었다.
어학원 첫날 연세가 그득하신 할아버지 옆에 앉았다. 60이 넘어 은퇴하고,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는 분이었다. 나는 스위스 출신의 할아버지(이하 로만, 가명)와 나는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로만 또한 호주에 온 지 얼마 안 됐었다. 세계여행을 떠나기 전에 호주에서 영어도 배우고, 새로운 세상도 구경해 볼 겸 왔다고 했다.
이어서 우연히 전공과목 얘기가 나왔는데, 로만과 내 전공이 같았다. 기계공학. 로만은 내 전공을 듣자마자 반가워했다. 한국에서 기계공학 엔지니어의 대우가 어떤지 물어보셨다. 엔지니어의 급여가 높은 편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일도 많아서 힘들다고 했다. 그리고 기계공학이 취업이 잘 되는 편이지만, 대우가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로만은 스위스로 와서 취업하라고 했다. 로만에 의하면 스위스는 엔지니어에 대한 대우가 아주 좋았다.(스위스는 기계공학 산업 강국이다. 대표적은 기업으로 ABB, Sulzer, George Fischer 등이 있다.) 급여, 복지, 사회적 인식, 연금, 기타 혜택 등. 들어보니 한국에서는 꿈도 못 꿀 삶이었다. 자신도 평생 기계공학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좋았다고 했다. 로만의 표정과 말투에서 그의 커리어에 대한 만족감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엔지니어라는 직업과는 별개로 ‘우리나라 사람들 중 은퇴 후에 자신의 직장 생활에 대해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하면서도 놀라운 점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로만의 태도였다. 전혀 거리낌 없이 나한테 본인 나라에 와서 취업하라는 말이 내게는 충격이었다. 아니 로만이 말한 내용보다 그의 사고방식이 더 흥미로우면서 신선했다. 이민, 유학, 여행 등의 해외 경험에 있어서 서양인들이 더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해외 취업 말은 쉽지’
‘한국과 스위스 비자관계가 어떻게 되지?’
‘외국 나가서 사는 것을 이렇게 쉽게 생각하다니…’
‘스위스어(스위는 4개 공영어가 있다: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만슈어)를 새로 익혀야 하나?’
‘이 분은 새로운 언어를 익히는데 거리낌이 없나?’
‘한국은 10년 이상 영어를 배워도 기본적인 회화도 힘들어하는데’
‘이렇게 연세 드신 분이 나보다 사고가 유연한 것 같네…’
‘아니지. 나이와 사고의 유연성이 반비례한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그 자체가 내가 얼마나 유연하지 못한 사고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아니야?’
나 또한 기계공학 전공자로서 스위스가 기계공학 관련 산업군이 발달해 있음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위스에 직접 취업할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정보를 직접 알고 있는 것과 이 정보를 바탕으로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는 다른 문제다. 선택을 내림에 있어서 유연한 사고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로만과의 대화에서 엿본 그의 삶의 태도 또한 인상 깊었다. 지난 삶에서 느끼는 자부심과 만족감, 60이 넘은 나이임에도 도전하는 자세, 더 많은 세상을 보고 느끼려는 열정, 삶을 여유롭게 대하는 태도,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사는 마음가짐 등. 물론 이 짧은 대화만으로 로만의 가치관을 전부 들여다볼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학원에서 만난 첫 학우와의 대화는 꾀나 신선한 느낌이었다.
‘그래! 내가 원하던 게 이거야. 내 사고를 확장시켜 주는 거. 내 세상을 넓혀주는 인연!’
#Welcome Party
내가 들어간 클래스(Class)에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많았다. 주로 유럽 사람들이었고, 남미에서 온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아시아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이 어학원에 한국인이 없다고 해서 선택하기는 했지만, 교실에 검은 머리, 검은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 낯선 환경이 조금 더 낯설게 다가왔다.(내가 다녔던 어학원은 70%가 스위스인이었다.)
당시 계단 벽에 붙어있는 게시판을 종종 보곤 했다. 게시판에는 여러 액티비티 이벤트에 대한 공지문이 붙어있었다. 서핑, 은하수 구경, 캠핑, 펍 가기, 실내 축구 등등. 어학원에서 주최하는 액티비티가 정말 다양했다. 내가 다녔던 어학원은 스카보로 비치(Scarborough Beach)와 아주 근접했다. 걸어서 5분 거리였다. 그래서 그런지 특히 수상 액티비티가 많았다. 액티비티에 참여한다면 영어 연습은 물론 외국인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을 터였다. 더욱이 나는 액티비티를 좋아한다. 하지만 금전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던 내게는 그저 그림의 떡이었다.(그래서 나는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호주 어학원은 다니는 것을 추천한다. 워홀러로서 돈을 먼저 벌고, 비자 말미에 어학원을 다니는 것도 한 방법이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을까? 게시판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내게 좋은 소식이 들렸다. 한 달에 한 번 신입생들을 위한 Welcome party가 있다는 소식이었다. 아름다운 스카보로 해변에서 고기도 구워 먹고, 다른 Class 친구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였다. 참가비 또한 없었다. 나를 비롯해 비슷한 시기에 입학한 친구들을 환영하는 파티였다. 하루빨리 외국인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싶었던 나는 Welcome party를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대하던 Welcome Party가 다가왔다. 수업을 마치고, 해변가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제법 군집해 있었다. 청명한 하늘아래 바다가 짙은 푸름을 깔아 놓았고, 파도가 잔잔히 부서지는 기분 좋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호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느끼며 어학원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해변 한쪽에 마련된 바비큐 그릴에서는 고소한 고기 냄새가 솔솔 피어올랐다. 어학원 친구들과 직원들은 각자 역할을 나눠 고기를 굽고, 샐러드를 준비하며,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한 손에는 차가운 맥주를, 다른 손에는 막 구운 고기를 들고 있었다.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이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장면이 생소하면서 썩 마음에 들었다. 다양한 인종이 서로 소통하는 모습을 실제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와 동시에 내가 꿈꿔왔던 그림이 눈앞에 펼쳐지자 기분 좋은 떨림이 조금 일었다.
‘이거야. 내가 원했던 것. 세계 각지의 사람들과 한 대 모여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평생 동안 몇 번이나 있겠어. 역시 호주에 오길 잘했어.’
호주 워홀을 통해 이루고 싶었던 목표 중 하나는 다양한 경험이었다. 내가 원했던 다양한 경험은 말 그대로 내가 한국에서는 하기 힘들 법한 사례들을 직접 경험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는 다국적, 다인종을 만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또한 포함이었다. 오로지 영어 연습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듣는 다양한 이야기가 목적이었다. 그리고 원했던 순간이 눈앞에 구체적으로 펼쳐지자 호주에 온 선택이 옳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선택한 이 먼 타국은 새로운 모험이 가득한 기회의 땅임이 분명했다. 이곳에서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면서 내 꿈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호주는 내게 미 서부개척 시대처럼 금광이 가득한 곳이었다. 나의 골드러시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이었고, 내가 찾고자 하는 금광은 낯선 모험과 큰 성장이었다. 그곳은 천국 같은 유토피아라기보다 내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이상향이었다.
그렇게 고양된 감정을 느끼며 해변을 둘러봤다. 해변 한쪽에는 푸른 잔디가 짙게 깔려 있었다. 그곳에서 몇몇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가방과 옷 가지를 이용해 약 1m 정도의 가상 골대를 만들었다. 세계 어디든 주어진 환경에서 축구를 즐기는 모습은 똑같았다.
그때 축구를 하고 있던 한국 사람 중 한 명이 나를 불러 같이 하자고 했다. 축구를 좋아하지만 그 순간은 내키지 않았다. 내 복장이 운동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달라붙은 청바지에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 특히나 내 스니커즈가 잔디 위에서 너무 미끄러웠다. 더욱이 앞서 본 스위스 친구의 축구 실력이 무척이나 대단해 자신이 없었다. 그 친구는 이미 장비도 완벽히 갖춘 상태였다. 실력으로도 자신이 없는데, 장비에서 까지 차이가 나니 같이 즐기긴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어학원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국제 망신을 당할 것 같았다. 이러한 합리적인 이유로 나는 제안을 거절했어야 했다.
“Ted, come. Let’s do it together!”
“Ok”
이성적 사고와 달리 내 결정은 반대로 작용했다. 심지어 대답하는데 망설이지도 않았다. 마치 노래방을 싫어하는 아싸가 인싸의 같이 가자는 제안에 억지로 좋은 척하며 수락하는 것과 같았다. 아무래도 하루빨리 다국적 친구들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던 것 같다.
역시나 잘못된 판단이었다. 축구를 하는 내내 조롱당했다. 금발머리의 그 친구는 일부러 내 앞에서 현란한 드리블을 펼쳤다. 축구를 한 두 번쯤 해본 남자라면 누구나 그의 의도를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상대 수비수를 조롱하는 플레이. 그 친구는 내 앞에서 왼쪽 오른쪽을 자유자재로 번갈아가며 공을 몰았다.
‘아… 하기 싫다. 그만하고 싶다.’
다행인 점은 바비큐가 금방 준비가 되어 오래 축구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많은 이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학창 시절의 분위기가 연상됐다. 학기 초반에 잘못된 이미지가 형성되면서 1년 내내 놀림받거나 심할 경우 소외되는 사례가 종종 발생하는 것처럼. 물론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세계 각지의 친구들 앞에서 미끄러지고, 넘어지는 모습을 보여준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진짜 쪽팔렸다.
한쪽에 앉아 음료와 핫도그를 들고 먹기 시작했다. 허기도 허기지만 얼른 무리에 녹아들어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핫도그를 한 입 물었는데 원치 않는 상황이 또 발생했다. 내가 배어문 핫도그의 반대편으로 소스가 흘러나왔다. 소스가 삐져나오면서 내 옷에 다 묻어버렸다. 불과 5분 전에 축구를 하며 국제 망신을 당했던 나는 다시 동네 바보 꼴을 하고 있었다. 케첩을 비롯한 소스가 옷에 단순히 묻은 정도가 아니었다. 핫도그 하나에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헤벌레 하는 표정으로 동네를 뛰어다니는 바보의 의상으로 딱이었다. 각종 소스가 세로로 길고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눈을 질끈 감으며 오늘 일진이 참 안 풀림을 느꼈다. 그나마 다행힌 점은 안에 하얀 반팔 티를 입고 있었다. 겉 옷을 벗고 핫도그를 마저 먹었다. 그럭저럭 창피함을 애써 무시하며 파티에 녹아드려 했다. 그때 동기인 일본인 여자 사람 친구(이하 미키, 가명)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Ted, 옷에 소스 묻었어.”
“맞아. 그래서 아까 옷 벗어서 가방에 넣었어.”
“아니…”
소스가 또 묻어 있었다. 먼저만큼은 아니었지만 핫도그 먹다가 흘렸음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한 흔적이었다. 이 이상 국제 망신을 당하면 안 될 것 같아 짐을 챙겨 일어났다. 기대한 Welcome party가 최악으로 끝났다. 미국 하이틴 영화에서 프롬(prom, 미국 졸업 파티)을 기대했다가 결국 실망만 한 남자 주인공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프롬에 멋지게 차려입고,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고백해야지라고 결심했던 소년의 다짐이 핫도그 하나에 무너진 상황이었다. 스카보로 해변에서 여전히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Welcome party는 Unwelcome 하게 끝났다. 해변을 나와 도로 쪽으로 향하던 도중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미키였다.
“Ted, are you going home?(Ted, 집에 가는 거야?)”
“Yes. I have to go. My clothes got too dirty.(응. 나 옷이 너무 더러워져서 가야 할 것 같아.)”
“Can I get your phone number?(나 네 연락처 좀 알려줘)”
#하지메마시떼
미키는 나보다 2살 많은 누나였다. 큰 키와 큰 눈이 돋보이는 친구였다. 미키와 클래스는 달랐다. 하지만 동기들 중 서로가 유일한 아시아인이어서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미키는 당시 기초적인 영어회화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원어민들의 말을 알아듣기 힘들어했다. 신기한 점은 내 억양과 발음은 잘 알아들었다. 물로 나도 미키처럼 초보였던 시절이 있어서 미키를 배려하며 대화를 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보다 한국인 특유의 악센트가 있는 내 발음을 미키가 잘 이해했다. 나 또한 일본인의 악센트에 익숙했다. 그래서 미키가 하는 영어를 네이티브가 못 알아 들어도 내가 제법 잘 알아듣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미키는 초반에 내게 의지를 했다.
하루는 미키가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 사려 했는데 점원과 의사소통이 잘 안 돼 물건을 못 샀다고 했다. 그래서 수업 후 같이 시내에 나가 쇼핑을 한 적이 있다. 또 하루는 수업을 마치고 미키가 머무르는 집에 갔다. 미키의 집은 어학원에서 가까운 곳이었고, 어학원의 친구 몇몇이 사용하는 셰어 하우스였다. 그곳에서 미키의 영어 과외를 몇 번 해 주었다. 그렇게 미키와 금세 가까워졌다.
그날은 미키의 집에서 늦게까지 있던 날이었다. 집에 가려 하는데 미키가 같이 따라 나왔다. 함께 버스를 기다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다. 그러던 와중 미키가 이상한 질문을 했다.
“Ted, do you like me?”
헷갈렸다. 미키의 영어 실력을 감안했을 때, 자신에게 정말 호감이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일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설명되지 않았다. 나는 역으로 물어봤다.
“Do you like me?”
“Yes. I like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