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친핸드의 영어 만렙 찍기 챌린지
“말과 지도를 구하고, 총과 그 밖의 장비를 갖추고, 나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이제는 힘껏 달릴 준비가 된 이방인처럼.”
#피카츄 vs 강남스타일
당시 PSY의 ‘강남 스타일’이 세계적으로 인기 있던 시기였다. 저녁에 호주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나는 해외에서 이렇게 크게 한국 노랫말이 들리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해 멜로디를 따라갔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곳에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소리가 점점 커졌다. 소리가 꾀나 크고, 진동이 느껴졌다. 제법 큰 곳에서 ‘강남 스타일’ 노래가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홀린 것 마냥 창고형 건물 앞에 다다랐다. 골목에 문이 하나 있어서 그곳으로 들어가 안을 들여다봤다. 안쪽 공간은 못해도 차가 30대 이상은 주차를 하고도 남을 정도로 큰 창고였다. 텅텅 비어있고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무대와 스탠딩석만 있었다. 클럽은 아니었고, 창고를 빌려서 공연이 열리는 것 같았다. 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사람이 ‘강남 스타일’ 노래에 맞춰 춤을 추자 족히 100명은 넘어 보이는 관객들 모두가 따라 추었다. 외국인들이 ‘강남 스타일’의 말춤 추는 모습을 티브이로만 봤었는데 실제로 보니 무척 신기했다. 굳이 “Do you know 강남 스타일?”이라고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나와 다르게 생긴 사람들이 단체로 한국 노래에 맞춰 춤추는 모습을 보니 조금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삼성 같은 대기업의 로고를 해외에서 발견해도 자랑스럽다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나라 전체가 가난했던 시절을 경험한 부모님 세대로서는 미국의 타임스퀘어에 삼성, 현대를 비롯한 대기업 로고가 뜰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부모님 세대의 노고와 희생으로 조금은 부유해진 나라에서 태어난 덕분일까? 나는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에 애국심이 일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화는 달랐다. 박지성, 김연아 같은 운동선수가 해외에서 활약했을 때, 한국어의 과학성이 해외에서 입증 됐을 때, 김치 같은 한국 음식이 점점 널리 알려질 때 등. 나는 한국의 소프트 파워가 빛을 발할 때 자부심을 더 느꼈다. 특히 호주 같은 선진국에서 한국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이렇게나 많은 인원이 다 같이 춤을 추며 즐기는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호주에 오고 나서 소프트 파워가 얼마나 중요하고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지 더 체감했다. 호주 길거리 곳곳에 피카츄, 헬로 키티, 슈퍼 마리오 등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게임 또는 애니메이션 산업에서 일본이 가지고 있는 콘텐츠 영향력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호주에 와 길거리에 널려있는 일본 캐릭터들을 실제로 보니 그 힘이 피부에 더 와닿았다.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모인 어학원 학생들 모두가 일본의 게임, 만화, 그 밖의 다른 문화에 익숙했다. 피부색, 머리색, 인종과 상관없이 그들 모두가 피카츄를 알고 있었다. 그중 둘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있었을까? 유럽 친구들 몇몇은 박지성 선수를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일부였고, 축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전혀 몰랐다.
특히 스카보로 비치에 다 같이 모여 어울릴 때면 조금은 속상한 상황이 발생했다. 한국의 문화적 영향력이 아직은 미미함에 큰 아쉬움을 느꼈다. 스위스 친구가 일본인 친구 상대로 다리를 한쪽씩 좌 우로 크게 벌리며 자세를 낮췄다. “Hey, Yuki. I am a Smo player”라고 외치며 모래사장에서 장난을 걸었다. 콜롬비아 출신의 여학생은 어렸을 때부터 헬로키티를 무척이나 좋아해 지금도 키티 캐릭터가 그려진 물건을 사용한다 했다. 홍콩에서 온 친구는 닌텐도가 어린 시절 최고의 친구라고 했다. 그 친구가 한국 가수 ‘슈퍼 주니어’를 알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반가웠지만, 이내 모든 이가 ‘슈퍼 마리오’를 더 잘 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런 모습들을 바라보며 문화적 초라함을 느꼈다. 그러면서 옛날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 일하셨던 어르신들이 떠올랐다. 어르신들은 우리보다 훨씬 잘 사는 독일 사람들을 보며 언젠가 우리나라도 잘살게 되길 바라셨다. 그렇게 먼 타지에서 ‘내 자식들은 이런 고생 안 했으면’하는 마음으로 버티셨다. 그분들이 겪은 마음의 무게가 어찌 같겠는가. 다만 우리나라의 문화 영향력이 더 확대되길 바라는 마음이 일며 어르신들의 마음을 조금 엿볼 수 있었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나를 비롯한 한국사람들에게 궁금해하는 것도 적다고 생각했다. 정말 최악은 아예 잘 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North Korea와 South Korea를 구분 못하는 경우가 빈번했다.(해외를 몇 번 다녀온 사람은 알겠지만, 북한과 남한을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한 번은 한국은 어느 나라 말을 사용하냐는 질문도 받았다. 중국어랑 일본어 중 어떤 말을 사용하는지 물어봤다. 질문한 친구와 같은 국적의 다른 친구가 “당연히 한국말을 쓰지”라며 바로 면박을 주고 내게 사과하는 일도 있었다. 내게 질문한 친구도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질문이어서 나도 무례함을 느끼거나 화가 나지는 않았다. 다만 씁쓸함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우리가 즐기고, 좋아하는 여러 문화가 해외에서 반드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즐겁고,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문화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여러 나라에서도 관심을 갖고 좋아해 준다면 더 좋을 뿐. 내가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대상이 꼭 누군가의 인정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 호주에 있었을 때는 이러한 생각을 품지 못했다. 많은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고 싶다는 욕망이 강했다. 그래서 그들과의 대화 소재가 좀 더 풍부했으면 하는 마음에 상대적으로 문화적 영향력이 강한 일본 친구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와 동시에 한국의 문화가 덜 알려진 사실에 아쉬움과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었다.
#둥지
호주에 도착 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 홈스테이 하던 곳을 나왔다. 애초에 한 달만 머물 생각이었다. 홈스테이는 일반 방값보다 비쌌다. 좀 더 저렴한 방을 찾기 위해 검트리(Gumtree, 호주의 벼룩시장 사이트)와 한인 커뮤니티를 둘러봤다. 당시 제법 많은 곳을 둘러봤는데 최종 후보로 2곳이 올랐었다.
하나는 도시 중심부에 있는 아파트였다. 단지 내 헬스장, 수영장, 사우나 등의 각종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건물 또한 최신식이었다. 가격도 시내 중심부라곤 믿기지 않았다. CBD 지역에선 말도 안 되는 싼 가격이었다. 하우스를 셰어 하는 사람들이 한국 사람뿐이라는 부분이 조금 걸렸다. 영어를 생활화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거라 생각이 들어서였다. 우선은 조건이 좋아 방을 보러 가기로 했다.
퍼스 시내에 도착하니 도시엔 이미 밤이 내려앉아 있었다. 구글 맵을 보며 아파트를 향해 걸었다. 아파트 단지 앞에 도착하니 고급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화려한 장식을 한 철문과 고풍스러운 장식을 비추는 조명이 단지 정면에서 날 맞이했다. 거대한 철문 앞에서 집주인과 연락을 해 만났다. 집주인은 유학생이었고, 나이는 나와 비슷해 보였다. 내 또래의 평범한 유학생이 이렇게 의리의리한 집의 주인이라는 사실에 놀라웠다. 유학생이었으므로 집을 소유했다기보다는 렌트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렌트라 하여도 퍼스 중심지 한복판에 이 정도 집이라면 렌트비도 상당했을 거다. 강남에 위치한 고급 아파트가 전세인들 월세인들 그 가격이 낮지는 않지 않은가. 이 부잣집 아들내미의 안내를 받으며 단지 내 시설을 둘러봤다. 우선 수영장이 놀라웠다. 단순히 구색만 갖춘 수영장이 아니었다. 제법 크고, 깔끔했다. 수영장 개방 시간이 길어 늦은 밤에도 수영을 할 수 있었다. 밤에도 주민들이 수영을 즐길 수 있게 조명이 깔끔하고 예쁘게 잘 배치되어 있다. 그 모습을 보니, 이 아파트 단지가 부유한 아파트 단지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이어서 사우나와 헬스장을 연이어 구경했다. 역시나 깔끔했고,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물론 미디어에서 보던 비버리 힐스 같은 초호화 시설은 아니었다. 다만, 뭔가 세련된 주거단지를 처음 봐서 하나하나 신기하고, 놀라웠다.
‘고작 160불에 이 시설들을 다 이용할 수 있다고? 게다가 CBD 지역이라니.’
‘한국 사람들하고 셰어 하면 영어 많이 아늘 것 같은데 어떡하지? 내가 스스로 더 영어 공부 많이 하면 되지!’
교통, 위치, 시설, 가격 등 모든 요소가 마음에 쏙 들었다. 워홀 와서 이런 호사스러운 주거 시설에 거주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주인 앞에서는 태연한 척하며 속으로 쾌제를 불렀다. 하우스 셰어생들이 전부 한국 사람들이라는 점도 더 이상 문제로 안 느껴졌다. 영어를 자주 쓰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이를 상쇄할 만큼 다른 요소들이 매력적이었다. 이제 제일 중요한 집 컨디션만 확인하면 끝이었다. 주인의 안내에 따라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당장 그곳을 빠져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 곳곳,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방이 2개 또는 3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실과 부엌이 분리 돼 있는 넓은 평수의 집이었다. 그 넓은 평수를 다 잡아먹을 만큼 곳곳에 캐리어가 펼쳐져 있었다. 아울러 갖가지 짐들이 널브러져 서로 영역 다툼 중이었다.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소주와 컵라면이 그 특유의 향을 내뿜었다. 계약 시 내가 머무르게 될 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싱글 침대 두 개와 책상이 있는 방이었다. 그럼에도 바닥에는 옷가지를 비롯한 짐들이 즐비했다. 빨래는 한 구석에 켜켜이 쌓여있었다.
호주에서는 방값을 아끼기 위해 법정 거주인구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경우가 흔하다. 특히 워홀로 온 사람들이 돈을 아끼기 위해 그와 같은 주거형태로 많이 머문다. 심한 경우 아파트 테라스 또는 주택의 마당에 텐트를 설치해 살기도 한다.
시설과 위치 대비 방값이 저렴했고, 집주인의 언질이 있었기 때문에 셰어생 수는 인지하고 있었다. 다수의 인원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점을 큰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집 전체를 둘러본 결과 셰어생 수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같이 사는 사람들과 어떤 라이프 스타일을 공유하게 될지가 더 중요했다.
내가 집을 둘러보는 동안 셰어생들과 아주 짧은 인사를 나눴다. 찰나일 수밖에 없었다. 그 들 모두 LOL을 하고 있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내가 그 입장이었어도 게임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무성의한 인사는 사실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집안 곳곳으로부터 유추해 볼 수 있는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나의 도망침을 부추겼다.
그들의 생활 방식, 게임하는 모습 등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잠깐 본 것만으로 어찌 타인의 삶을 함부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들 또한 낮에는 카페, 공장, 레스토랑 등 각각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고 와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내가 그곳으로부터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한 가장 큰 이유는 나의 목표 때문이었다. 그 집에 살게 된다면 단순이 영어 연습이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나도 그들과 동화되어 갈 것이 분명했다. 나 또한 술과 게임을 좋아했던 터라 아마 재밌게 지냈을 것임에 분명하다. 같이 워홀 온 사람끼리 의지하며 저녁에 취미 생활도 공유하고, 삼겹살에 소주 한 잔 기울이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와 낙이겠는가. 다만 그렇다면 내가 호주에 온 이유가 무색 해 질 것 같았다. 내가 호주에 갔던 이유는 유학 자금 마련과 영어 실력 쌓기 외에도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해 보는 것이었다. 당시 내가 원했던 새로운 경험은 말 그대로 그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만은 아니었다. 이는 부차적인 목표였고, 한국에서는 하기 힘든 일 또는 한국 라이프 스타일과는 다른 삶을 궁극적으로 원했다.
다음날 집주인에게 다른 집으로 가게 됐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주말을 이용해 또 다른 집을 방문했다. 캐나다 퀘벡 출신의 백인 남자와 아시아계 여자 부부가 살고 있는 가정집이었다. 슬하에 첫째인 딸과 막내인 아들이 있었다. 강아지 2마리와 햄스터까지 가족의 구성원이었다. 독방을 사용할 수 있고, 방세 또한 저렴했다. 현지인들과 함께 사니 영어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어학원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있었다. 호주는 대중교통이라 해서 엄청 싸지 않다. 생활 반경을 고려하면 때때로 자차를 소유하는 것이 비용과 시간 모두 아낄 수 있다. 어학원은 2달만 더 다니면 됐으므로 거리는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호주 도착 한 달 차가 됐을 무렵 새로운 둥지로 이사했다.
#IELTS
어학원을 총 3개월을 등록했다. 첫 달은 ESL 수업을 들었고, 이후 IELTS 수업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한 일본인 친구를 사귀게 됐다.(이하 유타, 가명) ESL 수업과 달리 IELTS수업을 듣는 학생은 상당히 적었다. 나를 포함해서 5~6명이었다. 한국, 일본, 콜롬비아, 포르투갈, 스위스, 러시아. 모두의 국적이 다르다 보니 서로 자기 나라 특징을 소개하기 바빴다. 그리고 학생 수가 적은 만큼 더 깊은 유대를 쌓을 기회가 많았다. 그중에서 유타와 금세 더 가까워졌다. 우리 둘 다 농구를 좋아해서였다. 그 덕에 유타를 비롯한 일본인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다.
IELTS 수업은 재밌었다. 당시 기본 회화 수업에 조금 싫증이 난 상태였다. 배움에 끝은 없지만, 일반적인 대화보다는 좀 더 아카데믹한 영어를 배우고 싶었다. 필리핀에서 어학연수를 했을 때 IELTS 수업을 들어 본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때보다는 영어실력이 제법 쌓여서 호주에서 듣는 IELTS 수업을 잘 따라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영국 맨체스터 출신의 선생님(이하 수잔, 가명)이 아주 맛깔나게 수업을 하셨다. 우리 모두 선생님을 좋아했다. 농구를 좋아하는 일본인 유타, 엘프 같은 미모의 스위스인 엠마, 네이티브보다 말이 빠른 콜롬비아인 마리아, 모국에 있는 아들을 무척 그리워 한 포르투갈인 카를로스 그리고 나(전부 가명). 수잔의 프로페셔널한 수업도 좋았고, 클래스 메이트들 간의 유대는 교실의 분위기를 한 층 더 매끄럽게 했다. 수업 도중 자연스럽게 질문을 하고, 서로 간의 의견을 주고받다 토론으로 빠지고, 자연스럽게 자국의 문화나 특징을 소개하며 비교했다.
호주에 오기 전 IELTS 성적 기준 5.5 이상은 나와야 현지에서 일을 구할 수 있다고 들었다. 물론 영어를 잘 못해도 일하는데 크게 상관은 없다. 워홀로 와서 하는 일들이 대부분 단순 노동이기 때문에 큰 언어능력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당시에는 내 이력서에 IELTS성적과 Certification(인증서)을 첨부하고 싶었다. 그때는 그렇게 하면 일을 구하기 쉬울 것 같았다. 그리고 단순 노동을 하게 됨과는 상관없이 일터에서 원활한 소통을 원했다. 그래서 그 기준으로 IELTS 6.5 이상을 목표로 했고, 수업을 한 달 정도 들었을 무렵 시험에 응시했다.
IELTS 시험은 Speaking, Listening, Writing, Reading 총 4개 부분의 시험을 봐야 한다. Speaking만 시내의 한 기관에 가서 1:1 면접 형식으로 봤다. 다른 3개 부분은 퍼스에 있는 한 대학교의 체육관에서 치렀다. 시험을 보기 위해 체육관에 도착하니 수많은 외국인들이 있었다. 체육관 입구에서 감독관들이 응시자들의 여권을 보며 신원을 확인했다. 감독관의 손에 다른 색상을 지닌 여권이 제법 많이 들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치 세계 무대에서 경쟁자들과 경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저 영어 시험을 보러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응시자들 대부분이 유색인종이어서 마치 이민 비자를 받기 위한 서바이벌 테스트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며칠 뒤 6.0의 성적을 받았다.
#키친핸드
어학원에 있는 만큼은 철저하게 영어만 사용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학원에서 만난 한국인들과는 무조건 영어로만 대화했다. 한국인 중 나보다 한 살 많은 형이 있었는데 그 형도 나와 똑같은 생각이었다. 형과 나는 암묵적 동의하에 서로 영어로만 소통했다.(이하 민규, 가명)
그렇게 어학원에서 목표했던 영어공부를 착실히 해가던 무렵, 가지고 온 돈이 다 떨어졌다. 사실 한 달 버틸 만큼의 돈만 준비해 왔다. 딱 그만큼만 부모님의 지원을 받고, 그 이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힘으로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막상 일은 어떻게 구해야 하고, 내가 일할 수 있는 곳은 시내 어디에 가야 있는지 막막했다. 그러던 와중 민규형이 내게 일자리를 소개해 주었다. 스카보로 바닷가 바로 앞에 있는 카페에서 하는 키친핸드(Kitchen Hand, 주방 보조 주로 설거지 및 잡무 담당) 일이었다. 말이 주방 보조지 설거지가 대부분이고, 그 외는 청소였다. 민규형의 지인이 하던 일인데 그만두게 돼서 후임을 찾고 있던 중 내게 기회가 오게 되었다. 당시 내 수업이 9시부터 점심시간 무렵까지였다. 카페 일자리는 점심시간부터 마감 때(오후 3 ~ 4시) 까지였다. 매일 3 ~ 4시간씩 일하면 됐다. 어차피 어학원을 다니고 있던 터라 part time job만 가능했다. 문제는 내 시간에 딱 알맞은 part time을 구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그런데 정말 딱 알맞은 일자리가 나타난 것이었다. 막상 일자리를 구하려니 막막했는데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려서 다행이었다. 근무 스케줄과 위치가 내 상황과 딱 알맞았다.
어느덧 호주 생활에 점점 적응하는 듯했다. 오전에는 어학원에서 수업을 들었다. 오후에는 카페에서 설거지를 하며 돈을 벌었다. 저녁에는 시내의 도서관에 가 그날 들은 수업을 복습했다. 집에 도착해 하우스 메이트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미드 한편을 보며 잠들었다.
당시 머물던 집에서 집주인아주머니가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래서 유통기한이 하루 남은 음식을 집에 가져오곤 했는데 내게 마음껏 먹어도 된다고 했다. 그렇게 유통기한이 대략 6시간 남은 김밥으로 아침을 때웠다. 몇몇 김밥은 어학원에 가져가 점심으로 먹었다. 점심때쯤이면 유통기한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다. 돈을 아껴야 해서 개의치 않아 하며 먹었다. 가끔은 어학원 근처에 있는 서브웨이(Subway) 샌드위치를 사 먹었다. 호주의 서브웨이는 재료의 신선함 덕분에 아주 맛있다. 설거지를 마치고 나면 일터 옆에 있는 마트에 들러 고기를 샀다. 유통기한이 하루도 남지 않은 것으로 골랐다. 원래도 고기는 싸지만 그렇게 하면 더 싼 가격에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곧 폐기해야 하는 고기는 한국 돈으로 만원도 안 했다. 가끔은 5000원 정도였다. 순대국밥 한 그릇 정도의 가격으로 호주산 소고기와 양고기를 즐겨 먹을 수 있었다. 가끔 돈을 더 아껴야 되는 시점이면 1불에 4 봉지나 살 수 있는 미고랭 라면(인도네시아 회사의 인스턴트 볶음 면, 조리방법이 한국의 짜파게티와 유사함)을 먹었다. 미고랭 3~4 봉지에 치즈 한 장 올려 먹으면 기가 막혔다.
가끔은 설거지를 마치고 스카보로 해변에서 어학원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다. 10불에 4L 터나 하는 와인은 젊은 친구들이 취하기에 충분했고, 아주 거대한 숙취를 안겨줬다. 서양 스타일의 파티가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술기운을 빌어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일은 바빴고, 특히나 허리가 아팠다. 3~4시간 동안 허리를 펼 시간이 없이 설거지를 해야 했다. 그래도 그렇게 일하고 나면 생활비는 벌 수 있었다. 일하는 시간이 적어 많은 돈을 벌 수는 없었지만 한 달 생활비가 적자는 아니었다. Full time job과 본격적인 저축은 어학원을 수료한 뒤에 할 계획이었다. 일단은 생활비가 마이너스만 아니면 됐다.
보통 골드러시(Gold Rush)하면 미국의 역사를 떠올린다. 재밌는 점은 호주 또한 이민자들의 나라답게 골드러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나 또한 나의 황금(유학자금, 영어 공부, 다양한 경험)을 찾으러 간 낯선 대륙에 조금씩 정착해 갔다. 영어공부, 외국인들과의 소통, 일자리, 주거, 생활 패턴 등. 조금은 이방인의 티를 벗었다고 생각했다. 마치 유럽에서 미 동부로 넘어와 서부 개척을 위한 준비를 마친 사람처럼. 말과 지도를 구하고, 총과 그 밖의 장비를 갖추고, 나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이제는 힘껏 달릴 준비가 된 이방인처럼. 어느덧 호주에 온 지 3개월이 다 돼 갈 무렵. 나는 내 말의 고삐를 한 껏 움켜쥐고 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국과는 사뭇 다른 공기의 여름. 더 뜨겁고, 높은 온도가 맞이하지만 그늘에 들어가면 서늘함을 느낄 수 있는 날씨. 그 날씨를 선명하게 나타내는 푸른 하늘과 새 하얀 구름. 따스한 바람이 오가는 길거리 곳곳에 놓인 트리들.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라는 별명이 있는 지구 반대편의 세계. 그 낯선 나라에서 나의 결심이 옳았음을 느끼며 하루하루 적응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