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서 거지가 됐다
“퍼스는 나의 완벽한 계획의 첫 단추이자, 금광이 가득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Geralton
어학원을 수료하고, 본격적으로 풀타임잡(full time job)을 구하기 시작했다. 일할 곳을 금방 구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구직 활동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도시에 있는 공장, 카페, 식당 등을 찾아다니며 이력서를 돌렸다. 매일 검트리(Gumtree, 호주의 벼룩시장 홈페이지) 사이트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봤다. 그 밖에 호주 정부에서 알선하는 농장 일자리를 알아보며 메일을 돌렸다. 이메일을 보낼 수 있는 곳은 매일 다 보냈다. 혹은 일자리가 있다는 곳을 찾아가 보면 어김없이 이미 채용됐다는 말만 듣게 됐다. 처음 이력서를 만들 때 IELTS 성적 6.0을 자랑스럽게 입력했는데, 전혀 쓸모가 없었다. 취업에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자격증이나 인턴활동을 한 것 같았다. 내가 정보가 부족했는지 타이밍이 안 좋았는지. 어학원 수료 후 약 한 달간 일을 못 구했다. 어학원에 다닐 시에도 그저 적자를 면할 정도만 일을 해 수중에 돈이 얼마 없었다. 통장은 금세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돈이 줄어들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력서를 돌리러 다니는 것도 교통비와 식비를 생각하니 점점 부담됐다. 집에서 먹을 수 있는 김밥을 잔뜩 먹고 나갔다. 저녁 늦게까지 이력서를 다 돌리는 동안 한 끼도 안 먹었다. 배가 너무 고프거나 갈증이 나면 건물 화장실의 수돗물을 마셨다. 공원에 있는 탭워터는 물맛이 조금 달랐다. 별미였다. 한 번은 선크림 바르고 나가는 것을 깜빡했다. 호주의 강렬한 자외선을 한껏 맞으며 이력서를 돌리고 집에 오니 다른 인종이 돼 있었다. 얼굴 위로 허물이 1주일 동안 벗겨졌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내 계획이 조금씩 균열을 보였다.
워홀 장소로 퍼스를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퍼스가 당시 호주에 있는 도시에서 기본 시급이 제일 높았다. 당시 18~20불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두 번째는 한국 사람들이 제일 적어서였다. 보통 시드니, 멜버른, 브리즈번을 선택한다. 그곳이 양질의 일자리도 더 풍부하고, 즐길 거리도 더 많다. 하지만 호주에 있는 동안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한국 사람들과 자주 부닥칠 환경이라면 그것이 힘들 것 같았다. 퍼스는 나의 완벽한 계획의 첫 단추이자, 금광이 가득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희망 사항에 가까운 나의 계획은 구직이 점점 힘들어지며 내게 불안을 더해 주었다. 퍼스는 어쩌면 금광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 지역으로 이동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며 고민이 깊어졌다. 그러던 와중 제랄 튼(Geralton)이라는 지역에 랍스터 공장 일자리를 발견했다. 그곳에 이미 한국 사람 한 명이 일을 하고 있고, 1주일에 1500불씩 벌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제랄튼은 퍼스에서 북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정말 작은 도시다. 한국 기준으로는 동(洞) 하나정도의 규모이다. 규모가 작으면 일자리도 얼마 없을 것이 뻔했다. 그런데도 당시 조급한 마음이 앞서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다. 나는 제랄튼으로 가는 버스표를 예약했다.
제랄튼으로 이동하기 이틀 전이었다.
“미키, 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나도 미키가 좋았다. 다만 수중에 돈이 부족했고, 한 푼이라도 아껴 유학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연애는 사치였다. 하지만 이렇게 미키랑 멀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미키와 나는 퍼스 시내에서 만났다. 맛있는 식사와 함께 10불에 2L인 와인을 사 함께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미키는 퍼스로 다시 오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제랄튼에 도착하니 정말 작은 마을임을 느꼈다. 바로 랍스터 공장으로 달려가 이력서를 제출해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틀 전 미키와의 식사 자리에서 과음한 탓에 감기몸살에 걸렸다. 제랄튼으로 오는 날까지 몸살 기운이 나아지지 않았다. 날씨는 화창하고, 햇살은 따스했지만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열은 조금 내리듯 했지만 띵한 느낌과 어지러움은 그대로였다.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뜨거운 공기와 추운 기분을 동시에 느끼며 터벅터벅 숙소로 걸어갔다. 마을에 유일하게 있는 백패커(Back packer, 호주의 게스트 하우스)였다. 보증금 및 2주 치 방세를 지불하는데 숙소 직원이 내가 괜찮은지 물어봤다. 약간 몸살기운이 있다고 하니 직원이 근처 약국을 알려주었다. 당장 씻고, 침대에 눕고 싶었지만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마트에 들러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고, 약국에서 약을 샀다. 입맛이 없었지만 약을 먹기 위해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새로운 장소에서 첫걸음이 몸살이라니. 차라리 잘 됐어. 액땜했다고 생각하면 되지!’
제랄튼에서의 첫날, 밖은 아직 환했지만 기절하며 잠들었다. 해외에서 아프면 서럽다는데, 서러움을 느낄 새도 없이 쓰러졌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이미 다음날이 돼 있었다. 해 질 무렵 잠들었는데 눈 떠보니 해가 뜨고 있었다. 약 20시간 정도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다행히 몸 상태는 훨씬 좋아져 있었다.
감기 기운은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컨디션이 회복되자마자 랍스터 공장으로 향했다. 숙소에서 40분 이상은 걸어야 했다. 차로는 5분 거리(약 3km 이상)였지만 차가 없던 나는 뙤약볕을 뚫고 갔다 와야 했다. 랍스터 공장으로 향하는 길에 그늘 하나 없었다. 뜨겁고, 따가운 호주의 햇살을 그대로 해치며 갔다. 공장에 도착해 이력서를 제출했다. 이력서를 받은 직원은 지금 일자리가 없다고 했다. 나는 일단 내 이력서를 맡기며 혹시라도 일자리가 생기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랍스터 공장에서 일한다는 한국 사람과 연락이 닿았다. 나보다 1~2살 어린 동생이었다. 그 친구 말로는 곧 사람을 더 뽑을 거라 했다. 그 친구의 사촌 형이 이곳에서 먼저 일하고 있었다. 사촌 형이 더 공장에서 일을 안 하게 되면서 그 친구를 공장에 소개해준 것이었다. 그 친구가 처음 공장에 들어왔을 때 1주일에 1500불씩 벌었다고 했다. 아쉽게도 내가 갔을 때는 랍스터가 그렇게 많이 잡히는 시기가 아니어서 1주일에 1000불이 조금 안 되는 돈을 벌고 있었다.
‘랍스터가 잘 안 잡히는 시즌이면 일자리도 없는 것이 아닐까?’
‘다시 퍼스로 가야 하나?’
불안감이 일며 나는 질문을 던졌다.
“지금 비시즌인데 사람 뽑아요?”
“공장에 지금 사람이 별로 없어서 사람 뽑을 거예요. 랍스터 시즌이 아니어서 1주일에 1000불 이상은 힘들어도 800에서 900불은 벌 수 있어요. 그러다 다시 시즌 돌아오면 1주일에 1500불 이상은 벌어요.”
나는 그 말을 믿고, 기다리기 시작했다. 처음 며칠은 마냥 기다리기만 했다. 기다림이 지속되자 그 사람 말만 믿고 기다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메일로도 이력서를 뿌렸다. 게스트 하우스에는 와이파이가 있었지만 연결이 원활하지 않았다. 시골지역인 데다 숙소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사용해서였다. 한국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호주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나는 마을 도서관으로 향했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공짜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는 곳이 있었다. 그곳에서 서호주 전역에 있는 구인 공고에 이메일을 돌렸다. 광산, 농장, 공장 등 주로 도시 외곽 지역의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퍼스 시내에 일자리에 더 많은 공고가 있었지만 지원하지 않았다. 아니 지원할 수 없었다. 오로지 시골에 있는 1차 산업 위주의 일자리만 지원했다.
호주 워홀로는 짧으면 1년 내지 길어야 1년 반 정도를 계획했다. 상황을 봐서 세컨드 비자(Second Working Holiday Visa, 워킹홀리데이를 1년 더 연장할 수 있는 비자. 흔히 세컨드 비자라고 부른다)를 취득할 생각이었다. 구직을 바로 못 하게 됨으로써 세컨드 비자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그리고 세컨드 비자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호주 정부에서 지정한 일자리를 3개월 이상 해야 했다. 그 지정된 일자리의 조건이 까다로운 것 같지만 전혀 아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시골 농장에서 3개월 이상 일하면 된다.
물론 이는 정석적인 방법이다. 돈 주고 세컨드 비자를 사는 경우도 있다. 소위 브로커라는 사람을 통한 방법이다. 엄연히 불법이다. 내가 있었을 당시 대략 1000불 정도의 금액이면 서류를 위조하거나 허위로 작성해 주는 곳이 있었다. 농장주나 브로커라는 사람에게 돈만 내면 됐다. 호주에 오기 전부터 이를 알고 있었다. 호주에 오고 나서도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세컨비자를 취득하는 것을 들었다. 쉽고, 편리한 방법이다. 주로 도시에 대박 공장이라고 불리는 곳에 바로 취업하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방법이다. 일주일만 일하면 버는 금액으로 1년을 더 머물 수 있는 비자를 주는데 누가 마다하겠는가. 누가 굳이 도시에서 차로 몇 시간을 이동해야 하는 곳까지 가서 불편한 일을 3개월 이상 하려 하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농장에 취업하여도 3개월을 못 채우게 되면 다른 일자리를 또 알아봐야 한다. 이러한 불법 행위가 적발될 시 받는 불이익은 비자 취소 및 추방이다. 간혹 블랙리스트에 올라 호주에 몇 년간 입국이 금지되기도 한다. 하지만 들통나는 일은 거의 없다. 적어도 내가 들어본 케이스는 없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불법적인 방법이 드러났을 때 받게 될 불이익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당장은 쉽고, 편해 보이는 그 길을 가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더라도 정직한 선택을 하고 싶었다. 그래야 나중에 내 꿈을 이루게 되었을 때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다. 융통성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정직, 청렴, 원칙 등을 고수하는 것이 내 신념은 아니었다. 그렇게 살아오지도 않았었고, 그렇게 살 자신이 있지도 않았다. 그때는 내 꿈이 간절하고, 소중한 나머지 그 과정에서 비도덕적인 선택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나의 꿈에 숭고함이 결여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런 나의 가치관과는 별개로 통장은 점점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숙박비와 식비를 최소한으로 줄여도 한 달도 못 버틸 것 같았다. 그럴수록 가냘픈 희망한 줄에 목을 맸다.
‘랍스터 공장에서 언제 연락이 오려나….’
#다윗과 골리앗
수입이 없었으므로 지출을 줄이기 위해 매일 인스턴트식품을 사 먹었다. 미고랭으로 세끼를 채웠지만 이마저도 두 끼로 줄였다. 일자리는 계속 구해지지 않았고, 방세를 내고 나면 남는 돈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지출을 줄일 방법을 궁리하다 마트에서 파는 노브랜드 식빵과 감자튀김이 생각났다. 식빵 한 봉지에 1달러(당시 환율로 800~900원), 감자튀김 1kg에 1달러. 식빵 한 봉지를 3 분할해서 아침 점심 저녁을 먹었다. 감자튀김은 4 분할했다. 눈으로 어림잡아 250g씩 나눠 끼니를 해결했다. 이런 생활이 한 달이 넘어가기 시작했고, 나는 점점 지쳐갔다.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하니 몸은 점점 야위었다. 육신을 움직일 에너지가 부족했다.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위축되고, 자신감을 잃었다. 빵과 감자튀김으로 겨우 배고픔을 달래고 나면 무료함과 싸워야 했다.
내게 남는 건 시간뿐이었다. 직접 찾아가거나 채용 공고에 메일을 보내는 등의 구직 활동은 반나절이면 끝났다. 처음에는 남는 시간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마을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지역 커뮤니티에 참여해 현지인과 어울렸다. 운동을 하고, 그간 보고 싶었던 영화를 봤다. 이마저도 길게 가지 못했다.
무기력함이 커질수록 침대 밖을 나오기 싫었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게임만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영어 공부든 뭐든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했다.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게임을 하면서 순간의 고통을 잊었다. 돈이 없어 배가 고프다면서 뭘 하지를 않았다. 불안이 점점 차오를 때면 나는 마법의 주문을 외우며 나를 달랬다.
‘랍스터 공장에서 연락 올 거야’
‘랍스터 공장에서 내일 연락 올 거야’
‘곧 랍스터 공장에서 연락 올 거야’
그렇게 나의 희망 사항이 마치 절대적 권한을 가진 신인 것 마냥 광신자이자 맹신자가 되어 갔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싶어도 그 의지라는 것은 고작 이틀을 못 버텼다. 정신적인 무장은 육체의 굶주림 앞에서 한없이 나약했다. 내 안의 꿈과 패기를 품은 다윗은 배고픔이라는 골리앗 앞에서 처참히 짓밟혀 갔다. 정상적인 식사를 하지 못해서인지 건강이 조금씩 악화했다. 만성피로에 시달렸고, 잦은 코피를 흘렸다. 피부는 푸석푸석해지고 눈은 생기를 잃어 갔다. 머리카락이 거칠어지면서 자주 빠지기 시작했다. 손끝과 손톱이 갈라졌다. 자주 어지러움을 느끼고, 사소한 일에 짜증을 느꼈다.
처음에는 맛있는 한 끼가 먹고 싶었다. 한국 음식이 자주 생각나고, 엄마가 해주는 집밥이 그리웠다. 연출자라는 원대한 목표 따위는 머릿속에서 잊힌 듯했다. 그보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흰쌀밥에 김치 한 조각만 얹어 먹을 수 있다면 바랄 게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마저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음식이 생각났다. ‘흰쌀과 고기반찬은 지금의 나에게 사치다’라는 생각이 아니었다. 이 이상 건강이 악화되면 안 된다는 신호를 세포 하나하나가 말하는 것 같았다. 채소나 과일이 먹고 싶었다. 비타민과 식이섬유가 풍부한 음식이 먹고 싶었다. 채소나 과일을 씹었을 때 아삭하는 느낌과 함께 터져 나오는 그 수분감이 고팠다. 씹는 순간 몸이 건강해지는 느낌이 그리웠다. 단순히 배고픔을 달래고 싶다는 단계는 지났다. 식빵으로 허기를 억지로 다시 달래고 나면 무료한 시간이 반복됐다. 그 무료한 시간 속에서 내가 점점 싫어졌다. ‘호주에 온 선택이 잘 못 된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커졌다.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니 눈앞에 낯익은 얼굴을 한 폐인이 서 있었다. 나는 점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지쳐갔다. 남은 시간이 심심함으로 느껴졌고, 나중에는 내가 처절히 견뎌야 하는 무료함으로 변해있었다. 고요한 적막이 절망이 되어 나를 잠식했다. 그때 처음 느꼈다. 원치 않을 때 찾아오는 무료함은 거대한 공포임을. 마치 드넓은 사막에서 아무리 외쳐도 메아리 하나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적막함이 가득한 곳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외로움이 주는 공포였다.
#곰팡이
하루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식빵으로 식사를 해결하고 있었다. 식빵을 씹는 도중 혀끝에서 비릿한 쓴맛이 났다. 자세히 보니 식빵에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당장 다른 식빵들을 확인했는데 하나 같이 곰팡이가 군데군데 생겼다. 매일 마트에 가서 장 보는 것이 귀찮아 한 번에 여러 봉지를 산 것이 화근이었다. 나 자신이 한심했다. 식빵을 다 버려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한 봉지씩 뜯어가며 식빵에 곰팡이가 핀 부분을 떼어냈다. 멀쩡한 부분만이라도 남겨놔야 했다. 그렇게 퍼런 부분, 녹색을 띠는 부분, 검게 변한 일부를 조각조각 떼어냈다.
식빵 위로 보이는 곰팡이가 멍든 것처럼 보였다. 멍든 상처처럼 보이는 부분을 하나하나 떼어낼 때마다 울컥한 무언가가 서서히 올라왔다. 식빵에 붙어있는 멍을 떼면 그 멍이 내 몸에 옮겨 붙는 것 같았다. 한 덩이, 한 덩이 떨어질 때마다 주먹으로 한 대씩 맞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집에 연락하고 싶었다. 부모님께 보낼 메시지를 몇 번이나 쓰고 지웠다. “너무 배가 고픈데, 고기반찬이 너무 먹고 싶은데 어떻게 용돈 조금만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엄마 미안한데 용돈 조금만 보내줄 수 있어?” 부모님께 10만 원만 보내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렇게 해서 받은 돈으로 순간의 생활은 조금 나아졌을 것이다. 당장의 맛있는 끼니와 배부름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가 두려웠다. 그렇게 얻은 배부름이 내 안의 패배감을 더 키울 것 같았다. 어떻게든 내 힘으로 견뎌내고, 버티고 싶었다. 속으로 ‘괜찮다, 괜찮다’를 반복했다.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식빵을 뜯고 뜯었다.
‘내가 원했던 호주에서의 삶은 이게 아닌데. 어느 정도 고생할 각오를 했지만 이렇게 궁상떨고 있을 줄이야. 이 지지리 궁상 새끼’
#축복과 저주
내가 학생이던 때였다. 우리 부모님은 동네에서 작은 치킨집을 운영하셨다. 아주 작고, 초라한 나머지 가게에 들어왔다가 그냥 나가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다. 부모 임의 성실함으로 다행히 가게는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가게 홀은 여전히 좁고, 초라해 배달이 주요 매출이었다. 어머니의 손은 뜨거운 튀김기와 잔뜩 쌓인 설거지를 오가기 바빴다. 아버지의 오토바이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중학교 2학년 때 일이다. 그날도 부모님은 고된 하루를 마치고 가게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오토바이를 가게로 들여놓던 중 중심을 잃고 쓰러지셨다. 아버지 발목 위로 오토바이가 같이 넘어졌고, 아버지의 복숭아뼈는 산산조각이 났다. 발목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했고, 깁스를 한 채로 최소 한 달은 입원해야 했다. 아버지는 발목에 느껴지는 고통의 무게보다 한 달간 가게를 비워야 한다는 공포의 무게가 더 큰 것 같은 표정을 하셨다.
부모님은 결국 가게를 정상적으로 운영하셨다. 아니 정확하게는 비정상적인 몸으로 꾸역꾸역 운영하셨다. 배달은 아르바이트를 겨우 구해 해결했다. 가까운 거리는 어머니와 내가 자전거와 두 발로 오갔다. 하지만 가게가 바쁜 시간이면 일손이 부족했다. 아버지는 목발을 짚은 채로 주방으로 들어가셨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좁은 주방으로 몸을 꾸역꾸역 집어넣으셨다. 튀김기 앞에서 한 발로 버티며 계속 닭을 튀기셨다. 한 발로 버티기 힘들어 다친 발을 바닥에 딛고 나면 통증이 몰려왔다. 그렇게 어정쩡한 자세로 아버지는 생계와 다툼을 하셨다. 고단한 하루가 끝나면 바로 옆 건물 병원의 입원실로 퇴근하셨다. 당시 입원하셨던 병원이 우리 가게의 바로 옆 건물이었다. 병원이 일터와 이웃한 덕분에 우리 가족은 그 한 달을 무사히 넘겼던 것일까? 그래서 다행이었던가? 아니면 생계의 굴레가 내린 저주였을까? 그래서 불행이었던가? 여하튼 우리 가족은 그 한 달을 어찌어찌 잘 넘겼다.
그 일을 계기로 부모님의 성실함을 본받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와 동시에 내 안의 성실함이 매우 불성실함으로 변질될 때면 죄책감이 밀려왔다. 나의 노력이 부족하거나 스스로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할 때면 그때 일이 계속 떠올랐다. 그 일을 상기시키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나에게 제발 아버지 좀 본받으라며 소리쳤다.
부모를 존경하고 이를 본받는 것은 분명 바람직할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내 삶의 기준이 내가 아닌 외부에 있으니 이는 나를 더 흔드는 무언가가 됐다. 매번 그때의 영웅 같은 모습이 떠오를 때면 나는 응석을 부릴 수 없었다. 한쪽에 철심을 박고 다른 한 발로 버티며 싸우는 모습을 보여줬던 그와 비교하면 끼니 좀 챙겨 먹지 못한 것이 대수랴. 사춘기 시절 겪었던 그 일은 내게 축복이자 저주가 되었다.
“아들 잘 지내지?”
“그럼 잘 지내지.”
‘아니야 엄마. 나 사실 잘 못 지내.’
“밥은 잘 챙겨 먹고 있어?”
“그럼. 여기 고기가 한국보다 훨씬 싸서 아주 잘 먹어.”
‘엄마 나 너무 배고파. 엄마가 해준 밥 먹고 싶어.’
엄마, 아빠의 성실함은 내게 축복이자 저주였다. 나는 그 저주를 견뎌 내기 위해 절대 부모님께 연락할 수 없었다.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화장실로 달려가 수돗물을 잔뜩 들이켰다. 거울 앞에서 처량한 내 모습을 보니 서러움이 밀려와 눈물이 났다. 당장 엄마한테 연락하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나의 저주는 내 손가락을 붙잡았다.
#나의 계획은 완벽했다. 한 대 처맞기 전까지
나는 한인 커뮤니티에 올라와 있는 한인 잡(한국인 고용주 밑에서 일하는 일. 주로 새벽 마트 청소, 바닥 타일 설치 등)을 하기로 결심했다. 호주에 갔다 온 사람은 알겠지만, 한국인 고용주 밑에서 일하면 최저 시급보다 낮은 급여를 받는다. 최악의 경우 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고생만 할 수 있다(물론 정당한 대우를 해주는 고용주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를 떠나서 나는 한국 사람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호주에 있는 동안은 최대한 영어를 많이 쓰고 싶었고, 한국에서와는 다른 경험을 하고 싶었다. 한국인 밑에서 일한다면 내가 먼 이국까지 온 이유가 없었다. 학비도 모아야 했지만, 영어 연습과 색다른 경험이라는 토끼도 잡고 싶었다. 그래서 이왕이면 한국인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했다.
미국의 영화학교에서 장학금을 타며 학업을 이어나갈 계획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어는 기본이었다. 아니 기본 이상을 해야 했다. 그곳에 간다면 연출자로서 팀을 지휘하고, 내가 연출하는 방향을 스태프들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단순히 영어를 할 줄 아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연출자는 배우에게 캐릭터를 설명해야 한다. 촬영팀에게 이 장면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려주어야 한다.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작가들에게 말해야 한다. 영화의 색깔이 애매해지지 않기 위해 편집팀과 소통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위해선 내 영어 실력은 더욱 향상되어야 했다. 단순히 외국어를 잘하기 위함이 아닌 연출가로서 내 사상과 철학을 적절한 어휘로 전달하기 위한 필수 무기였다.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 또한 목표였다. 한국에서 경험해보지 못할 색다른 체험이 미래에 내가 찍을 영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다국적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들과 소통하면서 내 세계를 넓히고 싶었다. 연출자로서 그리고 스토리 텔러로서 여러 이야기를 직·간접적으로 내 안에 쌓는 일이 큰 자양분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한 인간으로서, 한 연출자로서 성장하는 시기를 갖고 싶었다. 그 후에 미국의 영화학교에 간다면 좋은 작품을 하나씩 만들어 갈 줄 알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한인 잡(job)은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호주로 떠났고, 그 결심과 계획은 나를 비웃었다. 그리고 내 목표는 처참히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의 계획은 정말 그럴싸했다. 그렇게 한 대 처맞기 전까지는.
하는 수 없이 나는 한인 커뮤니티를 이용해 일을 구하기 시작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까 한 고용주와 연락이 닿은 즉시 채용이 됐다. 숙식 또한 제공됐다. 시급도 적은 편이 아니었다. 마트 청소를 하는 일이었다. 마트가 문 열기 전에 청소를 끝내야 해서 보통 새벽에 출근해 이른 아침에 일이 마무리된다. 낮에 여유시간도 생기니 괜찮은 일자리였다. 1주일 뒤면(호주는 보통 1~2주에 한 번씩 급여가 들어온다) 식사다운 식사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한국인 고용주와 연락을 하고 나서 출근날을 기다렸다. 성실하게 일하면서 돈을 모으고, 남은 시간에 다른 일을 알아봄이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첫 출근날이 다가올수록 그 현실적인 선택에 무기력함이 몰려왔다. 한국을 떠나기 전 호기롭게 한 결심은 그 호걸 같은 기운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직 패배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이미 결론 난 패배를 인정하지 못함이었을까. 나는 결국 첫 출근을 하루 이틀 남겨두고 사장님께 연락했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출근 못 할 것 같습니다.’
굳은 결심을 지키기 위한 신념과 그저 고집스러운 객기 사이 어딘가에서 방황하다 내린 결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