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차려보니 인도양 항해 중
“그들에게는 84번째였을지 모르는 항해가, 나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항해가 끝났다.”
#어차피 안 돼
백패커에서 한 한국인(이하 철수, 가명)을 만났다. 철수는 호주에서 사귀게 된 대만 여성과 함께 여행 중이었다. 철수의 제안에 백패커에서 맥주 한 잔 하게 되었다. 처음엔 죄송하지만 현재 돈이 별로 없어서 힘들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철수는 자기가 살 테니 그냥 편하게 이야기나 나누자고 했다.
호주에서 워홀러들을 만나면 대부분 나누는 이야기가 비슷하다. ‘돈은 얼마나 모았어요?’, ‘여행은 다녔어요?’, ‘영어는 늘었어요?’ 등의 그저 사는 이야기. ‘왜 워홀을 왔어요?’, ‘다른 나라가 아니라 왜 호주를 선택했어요?’, ‘한국에서는 뭐 했어요?’ 등의 어쩌다가 이 먼 나라까지 오게 됐는지를 묻는 이야기.
철수는 비자가 거의 만료되어 갔다. 남은 기간 동안 여자친구와 여행 중이었다. 그러던 와중 백패커에서 우연히 한국사람인 나를 만나게 됐다. 내가 있던 지역이 워낙 외지라 한국인은커녕 아시아 사람 자체가 드물었다. 나는 맥주 한 잔을 하며 약간의 신세타령을 빙자한 그간의 이야기를 했다.
“한인 잡 마트청소 그거 하지 그랬어요.”
“한인 잡은 안 하려고요. 이런저런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일터에서 영어를 사용하고 싶어요.”
“한인 잡이라도 해요. 지금 한 푼이 급한 상황이잖아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조금 억울한 감정이 들었지만 부정할 수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철수의 말에 불쾌함이 몰려왔다.
“그리고 영어 안 늘어요. 늘어 봤자 별거 없어요. 우리가 아무리 잘해도 저기 유럽애들을 따라갈 수 있나.”
철수는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백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즉각적인 반박을 하지 못했다. 내 안에서는 불편함과 불쾌감이 차올랐다. 동시에 철수가 던진 말에 불안이 조금 고조 됐다.
“그래도 노력하면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요?”
나는 무슨 희망을 잡고 싶었던 것일까? 나의 목표 설정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애써 되물었다. 이내 철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같은 아이사인들은 한계가 있어요. 아무리 공부해도 백인들처럼 자연스럽게 말하기 어려워요. 그리고 오지(Aussie, 호주인들을 친근하게 부르는 별명) 애들도 우리 영어실력 크게 신경 안 써요. 그냥 의사소통만 되면 그만이지.”
무엇이 그렇게 울컥하고, 반박하고 싶었을까? 나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영어가 늘면 더 좋은 기회들도 생기지 않을까요? 일자리도 그렇고, 사람들과의 교류도 더 깊어지고요.”
철수는 피우던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들이마시더니 ‘후’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를 내뱉었다. 이내 눈을 살짝 찡그리며 자기 말을 잘 못 알아듣는듯한 표정로 말을 이어갔다.
“물론 조금은 좋아질 수 있겠지만, 큰 차이는 없어요. 그리고 솔직히 한국 가서 영어 쓸 것도 아닌데 굳이 스트레스받을 필요 있어요?”
철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다 돈 벌러 온 거잖아요. 돈만 벌면 됐지 뭐 다른 거 큰 의미 있어요?”
‘맞다. 나도 유학자금 마련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 그냥 돈 벌러 온 것 아닌가? 같은 시간을 투자해도 한국에서는 이만큼의 돈을 내가 벌 능력이 안되니까. 그리고 영어를 전혀 못해도 일만 잘 구하고, 돈도 많이 모아가는 사람도 많지 않은가? 차라리 처음부터 한국 사람들하고 어울리면서 일자리 정보도 구하고, 인맥으로 공장이든 어디든 일을 구했으면 더 쉽지 않았을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워홀 3개월간은 영어공부에 힘쓰고 그 이후부터 돈을 차곡차곡 모으려던 계획은 이미 다 어그러져 있었다. 고작 어학원에서 친구 몇 명 사귄 것 가지고 새로운 언어가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해 줬다고 할 수 없었다. 일단 호주에 온 뒤로 오늘까지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정말 내가 잘못된 선택을 내린 것일까?’
그렇게 씁쓸함을 다시던 중 철수가 화재를 바꿨다.
“어떻게 여자는 좀 만났어요?”
이어서 철수는 자신의 여자친구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했다. 한국어로 이야기하니 어차피 못 알아들을 테니 상관없다는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씁쓸함에 불쾌함과 불편함이 몰려왔다. (구체적인 내용은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다. 오래전 일이라 내 기억이 불완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저 상당히 저급한 표현과 행동을 했다는 점만 언급하겠다.)
눈앞에 있는 그 사람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나는 피곤해서 이제 자러 간다는 말을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눕자 많은 생각이 몰려왔다. 자연스럽게 지난 몇 개월을 되돌아봤다. 호주로 떠나기 전 세웠던 계획. 내가 이루고 싶은 꿈. 하루를 꽉 채우며 살았던 어학원 시절. IELTS 시험을 보던 날.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한 해변에서의 파티. 구직활동. 배고픔과 무기력이 커지는 과정.
그렇게 불안이 증폭되는 도중 ‘이대로는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 머리를 강타했다. 나는 즉시 밖으로 뛰쳐나갔다. 집 앞에 있는 공원에서 달리고 달렸다. 머릿속을 비우고 땀을 흘리며 내 안에 쌓인 물리적 정신적 노폐물을 밖으로 토해냈다. 근력과 체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금세 숨이 차올랐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계속 달렸다. 땀을 흘릴수록 그간 누적된 패배감, 무력감 같은 것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를 조금씩 느끼면서 그날 달리고 계속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지 모르지만, 온몸에 땀이 흐르고, 옷이 다 젖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폐인과 바다
다음 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일자리를 알아봤다. 신기하게 바로 일을 구했다. 구직 사이트에서 주급 2,000불이 눈에 띄어 당장 클릭했다. 배 타고 랍스터를 잡는 일이어서 위험하겠다 싶었지만 바로 연락했다. 한 호주인이 지금 바로 만나볼 수 있냐는 전화를 했고, 그는 내가 있는 도서관 앞으로 왔다. 그는 일이 정말 힘든데 체력적으로 자신 있는지를 물어봤다. 부실한 식단으로 근육이 많이 줄었지만 자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군대도 다녀왔다면서 체력적으로 완벽히 준비된 것 마냥 약간의 허세를 섞었다. 짧은 대화를 나눈 뒤 그는 이따가 새벽 3시에 다시 데리러 온다고 얘기했다. 3개월간의 굶주림 끝에 현지 일자리를 구했다. 뱃일이 얼마나 고되고, 위험할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드디어 현지 생활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2,000불씩 벌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축적된 무력감으로부터 한순간에 벗어나는 듯했다.
숙소로 돌아가 이른 잠을 청하고 새벽 2시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오랜만에 일을 한다는 사실이 설렜다. 돈 버는 일이 이렇게 기쁘고 설레는 일인가 싶었다. 3시에 맞춰 그(이하 선장님이라 하겠다)는 내 숙소 앞에 도착했고, 우리는 마을 어귀의 항구로 향했다. 선장을 제외한 다른 선원 두 명은 이미 배 앞에 도착해 있었고, 나는 그들과 인사를 나눴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 명은 선장과 비슷한 연배(40대)의 호주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네덜란드에서 온 어린 친구였다. 출항 준비를 마치고 선장을 포함한 우리 넷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를 향해 나갔다. 두 선원은 익숙한 듯 갑판을 정리하며 생전 처음 보는 기계들을 세팅했다. 나는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기 위해 최대한 주변을 살피며 그들을 도왔다. 모든 세팅이 끝나고, 우리는 선실로 들어왔다. 그들 말로는 1시간 정도 나가야 하니 선실에서 몸을 녹이며 쉬라 했다. 돈벌이했다는 기쁨과 이 일자리에서 잘릴 수 없다는 간절함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내 긴장감을 눈치챘는지 선원들은 농담 섞인 인사를 건네며 편히 쉬라 했다.
새벽 바다는 무척이나 깜깜했다. 배는 계속 흔들렸지만 출렁이는 물결은 보이지 않았다. 파도가 보이지 않으니 내가 배에 탄 것인지 그저 배 모형을 한 놀이기구에 탄 것인지 헷갈렸다. 그때마다 배에 달린 조명등에 비친 바다는 내가 망망대해로 나가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금세 1시간이 지났고, 배는 캐빈(cabin)을 수거하는 지점에 도착했다. 선원 2명은 익숙한 동작으로 기계와 캐빈이 달린 선을 연결했고, 톱니바퀴 같은 것이 돌아가면서 캐빈이 줄에 딸려 올라왔다. 캐빈은 가로, 세로, 높이 1m 정도 크기의 나무상자다.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것이 피라미드 모양이었다. 피라미드의 윗부분이 가로로 절단된 것 마냥 옆면이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었다(정확히는 사각 뿔대모양을 하고 있었다.). 나를 제외한 선원들은 익숙한 듯 캐빈을 하나씩 건져 올리며 허리춤에 얹었다. 보는 것만으로 허리와 허벅지가 부서질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렇게 엉거주춤한 채로 캐빈을 하나하나 옮겼다. 불안정한 자세로 캐빈을 날랐지만, 안정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들은 피라미드 모양의 캐빈을 피라미드 모양으로 배한 쪽에 선적해 나갔다. 과정과 결과물의 모순적인 간극을 살피며 그들의 움직임을 자세히 살피려 노력했다. 일의 노하우와 요령 등을 하나라도 더 빨리 익히기 위해 집중해야 했다. 바다는 신입 뱃사공으로서의 자세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거대하고 거친 파도 앞에서는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아직 뱃사람이 덜된 나는 그조차도 힘들었다. 배가 한 번 출렁일 때마다 몸은 좌우로 흔들렸고, 배 위로 넘쳐 흘러오는 바닷물은 어느새 내 장화를 가득 채웠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균형을 잡아갈 때쯤이면 장화를 비워 내야 했다. 장화를 비우고 나면 다시 또 캐빈을 옮겨야 했다. 캐빈을 옮기고 다시 허리춤에 얹히러 가는 도중에도 넘어지지 않아야 했다. 풍랑과 폭우가 내 뺨을 계속 때리고, 시야를 가렸다. 눈이 따가웠다. 한쪽 눈만 뜬 채로 일하다 보면 다른 한쪽 눈의 소금기가 가셨다.
배에는 쓰임새를 알 수 없는 이런저런 물건이 많았다. 자칫 넘어져서 부딪히면 가벼운 타박상에서 뇌진탕까지 일으킬 수 있을 만한 물건들이 널려 있었다. 개중 날카로운 물건도 보였다. 물론 선원들의 안전을 위해 잘 정리해 놓인 상태였다. 하지만 사고는 종종 우리의 준비성 따위는 무시하고 발생하니 여전히 조심해야 했다. 그렇게 2시간을 균형 잡기, 무거운 물건 옮기기, 바닷바람과 파도에 부닥치기 등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떠올랐다. 밝아지는 해변이 주는 경관에 잠시 넋을 잃기도 했지만 이내 ‘Get back to work’라는 고함이 들려왔다. 망망대해 동네 놀이터의 반도 안 되는 크기의 배에서 벗어날 수도 없겠건만, 일터에서 벗어날 수 없는 환경에서 다시 일터로 돌아가라는 말이 모순 같았다(물론 저 말이 순전히 그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시 일터로 복귀해 아까와 같은 행동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배는 캐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곧 한 선원으로부터 “last one”이라는 말이 들렸다. 그 마지막 캐빈을 끝으로 우리는 점심시간을 맞이했다. 우리는 선실 내부로 들어가 각자 미트 파이 한두 개씩 나눠 먹었다. 전자레인지에 데우기만 하면 되는 흔한 냉동 파이였다. 다만 며칠 동안 식빵만 먹었던 내게 무척이나 반가운 음식이었다. 매번 마트에 장 보러 갈 때마다 - 장이라고 볼 것은 식빵 또는 감자튀김이 전부였지만 - 눈길을 잡았던 음식 중 하나가 눈앞에 놓이니 무척이나 반가웠다. 나는 파이를 해치우고, 선실 밖으로 나왔다.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했다. 푸르다는 표현밖에 할 수 없는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이 각자의 푸름을 적절하게 조화시키며 풍경을 완성했다. 내리쬐는 햇볕이 제법 따가웠지만, 그 따가움을 만끽하고 싶었다. 불과 1시간 전까지 치열하게 사투를 했다는 사실이 거짓말 같았다. 거칠게 뛰놀던 파도는 온데간데없이 조용하면서 부드러운 아리랑 선율이 바다 위로 놓여있었다. 문득 내가 있는 곳이 인도양 한복판인지 궁금해 핸드폰 구글맵(Google map)을 켜 봤다. 핸드폰 화면 위로 파란색이 가득했고, 가운데 빨간 점이 혼자 떠 있는 듯했다. 파란색 위에 Indian Pacific이라 쓰여있는 것을 보며 내가 바다 한가운데 있음을 실감했다. 바다 위로 불어오는 짠 내임 가득한 바람을 맛보며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머리가 뻑뻑한 느낌이 들어 만져보니 손에 알갱이 같은 것이 제법 쥐어졌다. 소금이었다. 영광의 상처인 것 마냥 약간의 뿌듯함을 느끼며 오후 일과를 시작했다.
오후 일과는 거둔 캐빈을 다시 바다에 던져놓는 일이었다. 그전에 캐빈에 있는 랍스터를 배 안에 있는 수조로 옮겼다. 랍스터를 옮기는 와중 커다란 문어가 드문드문 나왔다. 문어는 옆에 있는 작은 통으로 직행했다. 퇴근 시 문어 한 마리 얻어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밥 한 끼 조 차 해결하기 힘든 궁핍한 시기를 위로하듯 문어 요리로 호사를 누릴 생각에 힘이 났다.
새벽에 랍스터가 가득 찬 상태로 바다에서 올라오던 캐빈은 어느새 빈 상자가 됐다. 토막 낸 생선을 캐빈에 달린 조그만 공간에 집어넣고 부표가 달린 선에 매달아 바다로 던졌다. 커다란 캐빈이 바다 위로 던져지면서 ‘풍덩’, ‘찰싹’ 거리는 소리가 좋았다. 일련의 과정을 선원들과 돌아가며 반복했다. 오후 일과가마무리돼 가며 배는 다시 항구로 향했다. 출항한 항구가 아닌 랍스터공장 옆의 하역장에 잠시 정박했다. 컨베이어 벨트 위로랍스터가 작은 상자에 조금씩 담겨 옮겨졌다. 선장은 공장 직원과 인사를 나누며 그날의 물량을 거래했다. 얼마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제법 큰돈이현찰로 오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그 모습을 보니 직원 한 명당 주급으로 2,000불씩 주는 것이 납득됐다.
우리는 출항했던 항구로 되돌아와 주유를 한 뒤 다음 날 바다로 나갈 준비를 하며 일과를 마무리했다. 조금 어지러웠다. 몇 달 동안 배를 타는 사람이 육지에 내리면 육지 멀미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모든 정리가 끝났고, 나는 문어 한 마리를 숙소에 가져갈 생각에 상기된 상태였다. 조미료도 없고, 요리도 할 줄 모르니 그저 살짝 데쳐 먹을 생각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문어는 충분히 훌륭한 음식이다. 하지만 내 기대와 설렘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선원 중 한 명이 문어를 그냥 바다에 풀어 주었다. 나는 간곡히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조차 없었다. 다리를 오므렸다 피며 유유히 멀어져 가는 문어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러고는 선원들과 조금 후에 보자며 인사를 나눴다. 나는 그 인사가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몰랐다. 아마 그들은 알았을 것이다.
선장은 나를 다시 숙소까지 데려다주며 내일부터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나도 내가 하루 만에 잘린 것을 직감했다. 충분히 수긍할만한 일이었다. 억울하지는 않았다. 조금의 아쉬움은 있었지만 내가 그 선장의 입장이었어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 같았다. 배에서 제대로 균형도 잡지 못하고, 100킬로에 가까운 나무통을 하루에 100개 이상 옮기기에 나는 빈약했다. 정확히는 내가 가진 육체적인 힘과 체력이 부족하기보다 내 능력과 비교해 업무 난이도가 몇 배는 높았다. 그 일을 주 6일 동안 해내는 그들이 대단한 것이다. 선장은 지갑에서 50불 지폐 두 장을 꺼내며 오늘 하루치 일당을 내게 주었다. 급여가 일주일에 2,000불 정도라면 하루 일당이 300불 비슷하게는 나와야 하지만, 내가 그날 제대로 한 일이 거의 없어서 불만은 없었다. 사실 100불이라도 받은 것에 감사했다. 선장은 숙소 앞에서 나를 내려주고 Good Luck이라는 말과 함께 떠났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왔다. 종일 고생한 하체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한국이었다면 뜨거운 탕에 몸을 던졌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에게는 84번째였을지 모르는 항해가, 나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항해가 끝났다.
#시즌 2
갈증을 달래기 위해 눈앞에 보이는 슈퍼에서 콜라 한 병을 샀다. 콜라를 사서 나온 후 인근 보도블록에 걸터앉았다. 걸을 힘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탄산이 따갑게 목을 때리는 감촉을 즐기며 내 손에 쥐어진 50불짜리 지폐 두 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선장이 떠난 방향을 바라봤다. 그렇게 고생하고 겨우 100불밖에 못 벌었다는 생각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만의 노동과,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받았단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당장 내일부터 다시 일을 구해야 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 순간 콜라가 주는 달콤함과 내 손으로 번 돈이 주는 뿌듯함을 그저 느끼고 싶었다.
소금기 가득한 피부와 머리. 그리고 근육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듯한 하체가 당장 씻을 것을 요구했지만 나는 마트로 먼저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동안 먹고 싶었던 음식을 전부 사고 싶었다. 오랜만에 고기와 채소를 잔뜩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족했던 영양분을 섭취해야 했다. 하지만 막상 마트에 도착하니 오븐에 구운 노릇노릇한 통닭이 눈에 제일 띄었다.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통닭 위로 빤짝빤짝 빛나는 기름기가 그간 야윈 나를 유혹함과 동시에 위로했다. 영양 상태를 고려하면 나는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 비타민 등이 적절하게 균형 잡힌 식사를 해야 했지만 냉큼 눈앞에 있는 통닭을 집었다. 영양소보다 당장 허기짐과 입맛을 달래줄 무언가가 더 간절했다. 그리고 닭은 고단백 음식이다. 오는 길에 맥주도 몇 병 샀다. 숙소에 도착해 뜨거운 물로 온몸을 녹이고 한 손에는 닭다리 다른 한 손에는 맥주를 쥔 상태로 그날 저녁을 장식했다. 문어는 생각나지 않았다.
때로는 한 끼의 식사가 단순히 허기를 달래는 역할 이상을 한다. 지난날의 외로움, 나약함 등을 몰아낸다. 든든함, 따뜻함이 그 자리를 채운다. 그날 나의 식사가 그랬다. 배고픔만을 달래주는 식사가 아니었다. 지난 3개월 남짓한 배고픔과 서러움은 당장 눈앞에 있는 통닭과 맥주 앞에서 눈 녹듯이 사라졌다. 배가 부르고 나니 자연스레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게 됐다. 다시 또 일을 구해야 한다는 압박감. 일을 구하지 못하면 내일부터는 다시 식빵과 감자튀김만 먹으며 버텨야 할지 모른다는 걱정. 내가 이 세상에 쓰임새가 없는 사람일지 모른다는 자괴감. 호주에 온 내 선택과 틀어진 계획으로 커져간 불안 등. 다시 또 부정적인 감정이 밀려오는 듯했지만, 그저 기우였다. 오히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 솟구쳤다.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오기가 내 안에 일었다. 수중에 주어진 돈을 계산해 보니 3~400불 남짓했다. 2주 치 방값을 빼고 나면 없는 돈이었다. 하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여윳돈이 있든 없든 내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열심히 구직활동을 하고, 좋은 인연을 만나 영어라는 언어로 소통을 하고, 세상의 일부로서 하루하루 살아가야 함은 똑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두려울 필요가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방에 올라가 침대에 누웠다. 노트북을 열어 미드를 보며 잠자리에 들었다. 불과 1주일 전까지 이는 나만의 동굴로 숨어 들어가는 과정이었다. 동굴 밖으로 나가기 무서워 모니터 앞에 나를 매달아 놓았던 나날의 일과였다. 하지만 그날은 그저 내 일과를 마무리하는 일종의 여가 활동이었다. 오랜만에 드라마를 보며 웃었다. 기분 좋은 노곤함과 배부름. 그리고 오랜 기간 느끼고 싶었던 뿌듯함을 느끼며 정말 깊은 잠을 잤다. 근무시간 03:00~17:00. 뱃사공으로 보낸 14시간. 말로만 듣던 인도양 망망대해. 내 나름 바다와의 사투. 그렇게 얻은 돈 100불. 내 삶에 가장 뿌듯한 하루였다. 그날 나는 사자를 꿈꾸며 잠들었다.
다음날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구직 활동을 했다. 각종 구직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공고마다 이메일을 보냈다. 그중 호주 정부에서 관리하는 사이트가 있었다. 오로지 농장 일만 알선해 주는 사이트였다. 농장 리스트 중 포도농장이 있었고, 그 농장으로부터 1시간 뒤 회신이 왔다. 당시 내가 머물던 곳에서 차로 4시간 거리였다( 호주에서 4시간 거리는 멀지 않은 편에 속한다). Gingin이라는 곳이었다. 남은 300불 남짓한 돈을 들고 그곳으로 향했다. Gingin에 도착 후 농장주와 만났다. 알고 보니 농장주가 아닌 에이전시 사장이었다. Spencer라는 이름의 런던 출신인. 그는 런던 고지의 토트넘 홋스퍼 FC(Tottenham Hotspur)라는 축구팀의 펜이었고, 나는 이영표 선수를 언급하며 Ice Breaking을 했다.
알고 보니 Gingin지역에는 다양한 농장이 있고, 대부분의 농장이 이 에이전시를 통해 직원을 구했다. 사이트에 올라온 공지는 포도 농장에서 일할 사람을 뽑는 내용이었지만 내가 일할 농장은 닭 농장이었다. Spencer는 본인과 거래하는 농장이 여러 개다 보니 가끔 다른 농장의 구인공고가 올라간다고 했다. 나는 상관없었다. 포도 농장이든 닭 농장이든 어디서든 일할 준비가 돼 있었다. 에이전시에서 제공하는 숙소로 Spencer와 이동하면서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이고, 방세를 비롯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2주 치 방세를 지불하고, 주급 날까지 먹을 양식을 샀다. 식빵과 감자튀김이 아닌 정상적인 먹거리를 샀다. 계란, 흰쌀, 고기, 과일 등을 샀다. 수중에는 40센트만 남았다. 하지만 더는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다시 시작이었다. 이후 꾸준한 수입으로 내 생활은 안정을 찾아갔다. 다시 영어 공부를 하고, 외국인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 감사한 인연이 된 외국인 친구를 사귀었다. 그곳에서 사귄 이탈리아 친구는 몇 년 뒤 나에게 결혼 소식을 알리며 이탈리아로 나를 초대했다. 그렇게 500원 남짓한 돈과 함께 내 호주 라이프 시즌 2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