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1 Epilougue 비범하게 초라하게

by Ted 강상원

“성찰이 부족하면 자아는 안개를 피워 모습을 감춘다.”


#난 해적왕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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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소년 만화를 좋아했다. 소년 만화에는 일종의 패턴이 있다. 주인공은 이루고 싶은 원대한 꿈이 있고, 이를 향해 긍정적 인태 도와 강력한 의지를 드러낸다. 세상은 주인공에게 계속 시련을 던지며 ‘너는 할 수없을 거야’라고 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단 한순간도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스스로가 의심스러울 만큼의 큰 시련이 찾아오면 동료, 라이벌, 스승 혹은 짝사랑하는 사람이 이를 도와준다. 그렇게 주인공은 또 모험을 나선다. 주인공의 삶은 비범한 운명을 타고났다. 그 평범하지 않은 모험으로 가득 찬 삶 속에서 주인공은 위대한 야망을 이룬다. 나는 그런 주인공과 주인공이 겪는 모험을 동경했다. 어렸을 때는 세상 어딘가에 우리가 모르는 마법 같은 세상이 있다고 믿었다.


호주로 떠나기 전 나는 호주에서의 삶을 그리며 낭만에 취해 있었다. 예쁜 바다와 드넓은 대자연이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땅. 전 세계인이 모이는 곳. 그곳에서 겪게 될 갖가지 모험을 통해 성장할 것으로 믿었다. 내게 주어진 비범한 운명과 함께 세상을 향해 거침없는 항해를 해 나가려 했다. 내게 호주는 위대한 항로, 9와 4분의 3승 강장, 포켓몬 월드, 이상한 나라 같은 곳으로 다가왔다.


고생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생을 많이 할 것을 예상했다. 그러기를 바랐다. 당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에 큰 믿음이 있던 나로서 호주에서 겪게 될 고생은 바라던 바였다. 그 힘듦과 괴로움이 나를 더 성장시켜 줄 것이라 생각했다. 별의별 우여곡절을 겪을 터이지만 그러한 경험들이 나의 팔자를 특별하게 만들 것이었다. 비범한 운명을 타고난 주인공에게 끊임없이 시련이 펼쳐지지만 결국은 다 이겨내는 것처럼 나 또한 내 안의 사자를 꿈꾸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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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not Iron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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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이 큰 사람은 위대한 일을 쉽게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며, 자신이 비범한 운명을 타고났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경험을 통해 금세 교정되고 마는 망상이다.

- 『불안』, 알랭드 보통 -


하지만 내 모험은 결코 비범하지 않았다. 뱃일을 경험한 것이 우리 주변에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례는 아니지만, 나의 경우는 그 평범하지 않음이 그저 하루 만에 끝났다는 것이다. 소년 만화의 주인공처럼 대모험을 떠났으나 배가 아파 다시 집으로 돌아온 후 다시는 모험을 떠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 이후의 삶도 사실 평범했다.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하게 겪었을 평범한 하루들이었다. 매우 비범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낭만에 취하고 망상에 빠진 바보였다.


도전이라 포장한 나의 도주가 혹여 들킬까 봐 하루하루를 꽉 채우며 살았다. 카페에서 설거지를 마치고, 꾀죄죄한 모습으로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집에 들어와 침대에 누우면 오늘도 열심히 살았다며 자위했다. 주어진 하루를 성실하게 살았음은 맞았으나 그 ‘열심히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중독되어 있었다. 당시 나는 목적지가 없는 상태에서 전력 질주만 하고 있었다. 방향을 잃은 채 그저 전력 질주 후의 숨 가쁨이 타성이 되어갔다. 이런 타성이 관성이 되어 첫 3개월을 보냈다.


나의 망상이 경험에 의해 조금씩 교정될 쯤에는 곰팡이 붙은 빵을 잘라내고 있었다. 곰팡이를 떼어내고 멀쩡해 보이는 하얀 부분만 먹었다. 하얀 부분을 먹어도 비릿한 맛이 났다. 알고 보니 곰팡이가 조금이라도 핀 빵은 전부 버려야 했다. 곰팡이는 겉으로 드러난 부분이 작아 보여도 실은 빵 속 구석구석 침투해 전체에 뿌리내리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작은 풀 같지만, 막상 뽑아보면 끝을 알 수 없는 뿌리를 가진 식물처럼 곰팡이가 그러하다.


나는 깊은 내면의 진실을 마주하지 않은 채로 외적인 경험에만 의지하려 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던 빵처럼 남들이 봤을 때 놀랄만한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할 거라 생각했다. 그보다는 초라한 경험이어도 내 안에 생기는 정념에 집중해야 했다. 타인이 생각하는 대단한 경험이 아니라 평범한 경험도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중요했다. 우리 삶은 특별한 경험으로 극적 반전을 이루는 것 같지만 사실 그보다는 하루하루를 어떻게 쌓아 가는지가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법이다. 내면의 정념에 집중하지 않은 채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경험에만 집중하다 보면 어느덧 몸에는 곰팡이가 피어나 있을지 모른다. 당시 나는 소년 만화의 주인공들이 겪는 모험이 그러하듯 색다른 경험이 주는 화려함에 눈이 멀어있었다. 낭만에 취해 내 몸에 곰팡이가 피어나는 것을 몰랐다.


내가 호주로 떠난 행동은 일종의 도피였다. 제대 후 대학교로 돌아가기 싫어 도망을 선택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때는 내 꿈을 위한 선택이고, 이를 위해 모험을 떠난다고 생각했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했지만, 실상 나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마음이 크지 않았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랐다. 이를 인정하기 싫어 영화감독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내 불안을 감추었다. 그리고 그 불안을 마주하지 않은 채 호주로 떠났다. 호주에는 모험이란 것이 가득 한 곳일 것 같았다. 나는 모험을 경험하고 있지 않았다. 궁상을 떨고 있었다. 나에게는 루피의 고무고무 능력이나 해리포터의 마법은 없었다. 피카츄의 백만볼트도 앨리스의 용기도 없었다. 나는 무척이나 평범하고, 나약하며, 먼지 같은 존재였다. 한국에서 볼품없어도 해외로 나가면 다를 거라 착각했다. 한국에서도 호주에서도 나는 그저 머글이었다. 나는 나의 도망을 비겁함을 망상을 두려움을 부족함을 들여다보았어야 했다.


곰팡이는 주로 결로 현상이 원인이다. 즉, 안팎의 온도차로 인해 벽면이나 구석에 습한 공기가 몰리면 그곳에 곰팡이가 피어난다. 사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두려웠으면서 용감한 척했던 그 온도차 속에서 방황이라는 결로가 생겨났다. 내 선택이 꿈을 위한 도전인지 아니면 분명한 방향이 보이지 않아 헤맨 것인지. 내 결단이 비춰주는 열정적인 겉모습과 불안에 떨고 있는 초라한 내면의 상반된 온도 속에서 나는 나의 방황을 키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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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난 범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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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을 꿈꾸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려 하고, 낭만을 느끼는 것이 무슨 잘 못이 있겠는가. 하지만 나의 행동엔 성찰이 부족했다. 우리는 외적인 자극 그 자체로부터 성장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내면에 집중하려는 자세가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즉 경험에 성찰이 더해질 때 우리는 더 성장할 수 있다.


성찰이 부족하면 자아는 안개를 피워 모습을 감춘다. 내 자아실현 실체를 정확히 알기 힘들어진다. 나를 보살피고,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안개를 걷어 낼 수 있다. 용기를 내 조금씩 안갯속으로 걸어가다 보면 우리는 욕망의 근원에 다가갈 수 있다. 그것은 결핍이고, 불안이고, 자아이고, 진정한 꿈이다. 그렇게 내 선택 뒤에 감춰져 있던 나의 진심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고 나면 무엇을 해야 할지 혹은 무엇을 진정하고 싶은지 보인다.

그렇게 망상과 허상이란 안개를 걷어내고 나니 해야 할 것이 보이는 듯했다. 내 안의 불안을 맞이하며 나는 대단한 사람도, 비범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도 아님을 깨달았다. 그렇게 나의 변변찮음을 인정하니 할 수 있는 것이 더 명확해 보였다.


높은 이상을 꿈꾸어선 안된다는 것이 아니다. 하늘을 날고 싶은 꿈을 꾸고, 옷장 속에 펼쳐져 있을 판타지 세계를 꿈꿔 보고, 전설의 검을 찾아 용을 무찌르는 상상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있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은 의미가 있다. 다만 나의 이상에 심취해 현실을 자각하지 못해선 안된다. 하늘이 날고 싶다고 해서 절벽 위에서 뛰어 내려선 안된다.


높은 이상만 바라보는 것은 이상을 꿈꾸는 것이 아닌 망상에 젖는 것이더라. 그렇게 망상과 허상을 걷어내니 나의 일상에 무엇을 채워야 할지 보였다. 당장 바다로 나가고, 하늘을 날고, 옷장 속 판타지 세계로 갈 것이 아니었다. 조금씩, 조금씩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걸어 나가는 것이 진정한 모험이더라. 그것이 꿈을 찾는 길이더라. 그것이 나의 꿈과 모험에 균형을 갖추는 일이더라. 내 초라한 과거로부터 이를 깨닫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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