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은 시간 낭비 일까?
“무언가 뜨거웠던 것이 순식간에 식어 있었다”
#모래성
이후로 돈을 더 악착같이 모았다.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외하곤 전부 저축했다. 식비도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최소한으로 줄였다. 가끔 친구들이 시내에 놀러 나갈 때도 집에 머물렀다. 물론 가끔씩 열리는 홈파티를 즐기긴 했다. 살기 위한 지출 이외에 유일한 지출이었다. 그 덕에 돈이 다시 쌓이기 시작했다. 통장의 잔고를 보면서 내 목표를 상기했다. 그와 동시에 만약 적금을 깨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현재 원금과 매달 붙는 4%의 이자가 얼마일지 계산하곤 했다. 통장의 돈을 보며 뿌듯함을 느꼈지만 동시에 아쉬움도 일었다. 한동안은 머릿속에서 ‘만약 그랬다면’이라는 문구가 떠나질 않았다. Common Wealth 은행 계좌는 조금은 아픈 손가락이 돼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교(숭실대학교)로부터 메일이 왔다. 학교 행정처에서 보낸 메일이었다. 더 이상 휴학이 연장되지 않아 재적 처리 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정확하게는 ‘등록금을 지불하지 않은 채’로 더 이상 휴학 연장이 안된다는 내용이었다. 약 3 ~ 4년 전 군휴학을 신청할 때 다음학기 등록을 하지 않고 휴학을 했다. (물론 다음학기를 등록할 돈도 없었다) 이 사실을 어느덧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날의 메일 한 통이 나의 망각을 일깨워 줬다.
‘등록금 내고 나면 다시 개털이잖아. 그럼 결국 유학도 물 건너가는 거 아니야? 그래도 일단 등록금은 내야지. 유학 준비 잘 안되면 복학하면 되잖아. 계획은 언제든 틀어질 수 있잖아. 최소한의 안정장치는 해 놔야지. 근데 이것 때문에 내 열정과 동기부여가 떨어지면 어떡하지? ‘언제든 복학하면 된다’는 생각에 게을러지지는 않을까? 차라리 이참에 학교를 그만둘까? 배수의 진을 친다는 생각으로 자퇴신청서를 낼까? 어차피 전공이 적성에 맞지도 않았잖아. 뭐가 맞는 길이지? 나 어떡하지?’
그렇게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 괴로워하고, 자퇴와 등록 사이에서 며칠을 고민했다. 어떤 선택을 내려도 아쉬움과 후회가 밀려올 것 같았다. 그 선택의 갈림길에서 대학 동기 한 명이 떠올랐다. 나와 성향이 정 반대인 친구였다. 지극히 현실주의적이며 성실하고, 착실하게 사는 사람. 소위 어른들이 말하는 ‘쓸데없는 짓’ 안 하는 건실한 청년. 더욱이 그 친구는 누군가의 고민을 잘 들어줬다. 그 친구와의 대화로 뾰족한 수가 나올지. 조금의 타협 섞인 절충안이 나올지. 아니면 그냥 답답한 마음을 풀고 싶었을지. 갖가지 감정이 섞인 복잡한 마음으로 동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냥 보험이라 생각해. 우리가 암에 반드시 걸리기 때문에 보험 가입하는 거 아니잖아. 혹시 걸릴지도 모르니까 가입해 놓는 거지”
결국 등록금을 내기로 했다. 그리고 추후에 미국에 가게 되는 날이 확정 됐을 때. 바로 그때 이 돈을 모교로부터 돌려받기로 다짐했다.
호주 통장에서 학교 계좌로 바로 송금을 하면 수수료가 제법 나왔다. 때 마침 부모님도 시드니에 있는 동생에게 생활비를 보내야 했다. 결국 집에서 내 등록금을 내줬고, 나는 그 금액만큼의 돈을 동생한테 보냈다. 통장 잔고는 몇 달 전처럼 상당량이 사라져 있었다. 노트북 모니터에 뜬 은행 창(window)을 내리고,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휴학 연장이 불가능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띄우던 페이지는 매끄럽게 휴학 연장을 진행해 줬다. 휴학 연장 절차를 마무리하고, 다시 동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00아 나 결국 학교 등록했다”
“잘했어”
“개털이야. 와서 돈 하나도 못 모았어”
“뭘 못 모아. 모아서 등록금 냈잖아”
“그래 그렇네. 애들은 요즘 어때? 다들 취업 준비 잘 돼 가?”
“되긴 뭐가 돼. 다들 서탈 중이야. 면접이라도 보고 떨어지면 덜 억울한데 이건 뭐 아무것도 못해보니 더 답답해”
“잘 될 거야. 다 잘 돼야지”
“그래. 잘 됐으면 좋겠다”
“…..”
“…..”
친구와 나는 서로를 향한 응원이자 스스로를 향한 위안을 건넨 후 잠시 침묵했다. 답답한 현 상황이 우리를 짓눌러 말을 이어나가기 힘들었다.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허우적대고 있었다. 벽돌을 쌓아 올린 줄 알았는데, 무너지기 쉬운 모래성이었다. 노력 같은 것은 참으로 흩어지기 쉬운 모래알이었다. 횃불 같은 열정도 현실의 벽이라는 바람 앞에서는 그저 촛불이었다. 내뱉은 말이 공중으로 순식간에 흩어지듯 내 안의 강력했던 동기가 순식간에 휘발된 것 같았다. 무언가 뜨거웠던 것이 순식간에 식어 있었다. 그 무기력한 공기 속에서 친구가 다시 말했다.
“근데 왜 이렇게 뭐가 자꾸 안 되냐”
“그러게. 뭐가 자꾸 안 되네”
#벌써 1년
부모님은 내가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꿈을 한 번도 지지해 주신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 꿈을 강하게 반대하셨다. 대학교 1학년 기계공학을 처음 접한 그 시간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1학년 수업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땐 매일매일 좌절 속에서 허덕였다. 그나마 수학은 흥미로웠지만, 물리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늘 한계를 느꼈다. 어느 날 동기가 '이해 안 되면 그냥 받아들여'라고 말했을 때, 그 친구가 천재처럼 보였다. 나는 그저 겨우겨우 따라가는 게 전부였다. 그 과정이 고통스러웠다.
괴로움은 연극영화과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졌다. 원래 연극영화과에 가서 연출을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수능 점수에 맞춰 대학을 가야 했고, 결국 숭실대 기계공학과에 오게 됐다. 매일 학교에 가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버스에서 내려 학교 건물을 바라볼 때마다 원망 섞인 소리를 외쳤다.
'여긴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야'
'나 여기 안 다닐 거야’
‘아, 이 학교 진짜 싫다’
결국 한 달쯤 지났을 때, 나는 자퇴를 결심했다. 학교 행정처에 가 지금 자퇴하면 등록금을 얼마나 돌려받을 수 있는지 물어봤다. 이 사실을 부모님께 알려드렸다. 하지만 부모님은 4수만큼은 절대 안 된다고 단호히 말씀하셨다. 집안 사정이 넉넉한 편도 아님에도 재수, 3수까지 지원해 주셨으니 나는 집안의 혜택 받은 죄인이었다. 그런 죄인이 한 번 더 혜택을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 점을 충분히 인지했기에 학원에 보내 달라 하지 않았다. 그간 3수를 하며 나름대로 터득한 공부법이 있었다. 그래서 독학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마저도 극구 반대하셨다. 재수에서 3수까지 이어지는 수험생활 동안 부모님은 많이 지치셨고, 질려 있었다. 무엇보다 기계공학과를 포기함은 부모님께 말 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당시 기계공학과는 '취업 깡패'라는 별명까지 있을 정도로 취업에 유리한 학과였다. 미래도 불투명하고, 수입도 불확실한 영화감독 따위는 쳐다봐서도 안 되는 대상이었다. 놀이터에 나타난 엄마가 “쟤랑은 절대 같이 놀지 마”라는 경고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연출이 하고 싶으면 집을 나가 알아서 하라고 하셨다.
나는 체념 한 채로 1년을 버텼다. 그 후 말 그대로 알아서 하기로 했다. 공학인증을 포기하고, 영화와 연출 관련 교양 과목을 듣기 시작했다. 처음엔 기대했던 것만큼의 만족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수학은 좋아했지만 그 숫자를 가지고 물리적 현상을 다루는 일에는 염증을 느꼈다. 그 염증이 해소될 곳이 필요했다. 숭실대 기계공학과에 합격했을 때 영화나 연출과 관련된 수업을 꼭 듣겠다고 다짐했는데, 그 다짐이 1년 만에 이뤄졌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은 우연히 내 시간표를 보게 됐다. 부모님은 나를 식탁 앞에 앉혀놓고 시간표를 들이미셨다.
"이게 뭐야?"
그 한 마디와 부모님의 눈빛에는 “뭐 하는 짓거리야”, “왜 쓸데없는 짓 해?”, “취업 잘 되는 기계공학과 나 두고, 무슨 엄한 짓을 하는 거야?”, “엄마가 쟤랑 놀지 말랬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나한테 이래?”, “우리가 너를 어떻게 공부시켰는데 엄마 아빠를 배신할 수가 있어?”와 같은 말들이 담겨 있었다. “하고 싶으면 알아서 해”라고 하셨으니 말 그대로 알아서 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하고 싶으면 너 알아서 해”라는 말은 허락이 아니었다. “절대 하지 마”라는 엄포였다. 실망과 분노가 가득한 말이 내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언쟁은 자정을 넘어서까지 이어졌다. 그 언쟁 끝에서 엄마는 내 시간표를 찢어버렸고, 아빠는 몇 번이나 식탁을 힘껏 내리치며 분노를 표출했다. 결국 나는 다음 학기 휴학을 했고, 1년간 아르바이트와 방황을 오간 뒤 입대했다.
도망쳐야 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세상에서 벗어나야 했다. 제대하는 날이 다가 올 수록 가슴이 무거웠다. 그런 와중 알게 된 호주 워홀은 한줄기 빛처럼 다가왔다. 빨리 해외로 가고 싶었다. 그리고 내 꿈을 무시하거나 반대한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성공해 돌아오겠다고 결심했다. 내 안의 뜨거운 기운은 꿈을 향한 열정과 내 꿈의 적대자를 향한 복수심이 적절히 섞여 있었다.(그 당시에는 내 꿈을 향한 열정으로만 생각했다)
부모님께는 영어 공부 겸 경험을 쌓는다는 핑계로 호주에 간다고 했다. 영화학교라든지 유학이라는 등의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출국을 1주일 앞둔 시점에서, 나는 제일 친한 친구들과 송별회를 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한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그거 시간 낭비야"
벗어나야 했다. 나를 가두기만 하는 곳에서 빨리 떠나고 싶었다. ‘시간 낭비’라는 말은 나를 깊게 찔렀다.
그렇게 열정, 희망, 분노, 도피가 적절히 섞인 채로 호주에 왔다. 그리고 어느덧 1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 1년 동안 목표했던 것 중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호주에 오기 전 호기로웠던 기세는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어느 늦은 밤, 소파에 누워 지난 1년을 되돌아봤다.
‘호주에 온 지 벌써 1년이 넘었는데, 나는 대체 무엇을 이뤘지? 돈, 영어, 경험 세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것 자체가 무리였나? 지금이라도 한국에 돌아가야 하나?’
하루빨리 귀국해 복학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이 현실적이고 옳은 선택처럼 다가왔다. 어른들이 늘 말했던 ‘쓸데없는 짓’ 따위를 빨리 관둬야 할 것 같았다. 착실하고, 성실한 청년의 옷을 걸침이 옳은 길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1년 동안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돌아갈 수는 없었다. 영어와 경험은 둘째 치더라도, 모은 돈은 푼돈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졸업까지의 학비로는 택도 없었다. 남들은 호주 워홀 가서 몇 천만 원씩 모아 온다는데 내가 모은 돈은 형편없었다. 지금 한국에 간다면 더 큰 조롱을 받을 것 같았다. 그 어떤 선택도 확신이 안 섰다. 무엇이 맞는지,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었다. 혼돈만 가중 됐다. 불안이 점점 커졌다. 뼛속 깊은 좌절감을 한숨으로 토해 냈다.
‘하…. 친구들이랑 소주 한 잔 하고 싶다’
답답한 마음에 나는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때마침 친구들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야, 우리 갈매기살에 소주 마시고 있다!"
친구들은 장난스럽게 나를 약 올렸다. 오랜만에 듣는 익숙한 농담이 반가웠다. 나도 웃으며 농담을 받아쳤다. 친구들과 오랜만에 장난을 주고받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중 한 친구가 내 워킹홀리데이 선택을 비아냥대기 시작했다. 약 1년 전 무렵처럼.
"너 거기서 뭐 하고 있냐? 그냥 한국 와서 우리랑 놀자. 거기서 뭐 제대로 되긴 하냐?"
말투는 농담처럼 들렸지만, 그 속엔 무시와 조롱이 깔려 있었다. 그 친구는 호주에 오기 전부터 내 선택을 존중해주지 않았고, 호주에 온 후에도 비슷한 말을 계속해왔다. "거기 가서 뭐 할 건데?", "차라리 한국에 돌아와서 제대로 된 일이나 해"라는 식의 말을 해 왔다. 오랜만의 통화에도 그 태도는 다르지 않았다.
술에 취한 말투와 농담조로 이야기하니 나도 화를 내기 민망했다. 애써 태연한 척하며 농담으로 받아쳤다. 그 친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거기서 얼마나 번다고? 결국 시간 낭비 아니야?"
‘시간 낭비’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그 친구의 목소리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치 내 꿈을 위한 여정이 이미 실패로 끝났다고 낙인찍는 것 같았다. 그 친구는 술에 취해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말들을 나를 깊숙이 찔렀다. 불쾌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가족도 친구도 그 누구도 내 꿈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느낌이 점점 커졌다. 세상에 내편 하나 없는 것 같았다. 호주에서 겪은 모든 일이 갑자기 아무 의미가 없어 보였다. 불안이 내 마음을 잠식해 나갔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나 정말 쓸데없이 시간 나이 중인가?’, ‘내 젊음, 청춘을 허튼 곳에 쓰고 있나?’ 불안과 초조함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닭 농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닭 발톱에 찔려가며 돈을 모으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나는 내 꿈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어느새 그런 믿음은 사라졌다. 불안과 혼돈만 가중되는 질문들만 계속 떠올랐다.
‘그 꿈이 정말 이뤄질 수 있을까?’
‘내가 이 길을 선택한 게 맞는 걸까?’
‘지금이라도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까?’
불안감이 가슴을 조여왔다. 숨이 막혔다. 나는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저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듯 소파가 나를 천천히 삼켜주길 바랐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다.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
한인 커뮤니티에 접속해 이런저런 글을 읽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이야기를 찾아보고 싶었다. 이런저런 글을 읽어가며 10년 전에 올라온 사연부터 각종 뉴스까지 읽어 나갔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구구 절절한 사연에 안타까웠다. 하지만 간사하게도 그들의 이야기에 위안을 얻기도 했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다 타지에 와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애처로웠다. 나와 닮은 이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호주 워홀 와서 한 푼도 모으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일자리를 못 구한 나머지 한인잡만 전전하다 귀국하는 경우는 양반이었다. 한인 잡을 했던 사람들 중엔 제대로 정산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었고, 한 푼도 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까 영어 공부 했어야지”, “누가 영어 공부 하지 말랬나?”, “지가 영어 공부 안 해서 저렇게 됐으면서 저런 애들 정말 이해 안 감” 등이 댓글로 달려 있었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욕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었다.
호주에서 큰돈을 벌지 못한 채 돌아간 사람들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열심히 모은 돈을 순식간에 날린 사람들도 있었다. 캠핑카를 렌트해 여행하던 중 교통사고가 나 병원비와 배상금으로 돈을 다 쓴 사람. 호주 생활을 마무리하고, 동남아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소매치기당한 사람. 일하다 크게 다쳐 병원비가 많이 나온 사람. 법적인 문제에 휘말려 변호사 수임료로 돈을 다 쓴 사람 등. 적어도 경험이란 자산을 얻었다곤 하지만 결코 위로가 안될 것 같았다.
폭행을 당한 사람도 많았다. 지나가는 10대들 한테 집단 구타를 당한 사람, 술 취한 애보리진이 둔기로 내려친 사람, 클럽에서 백인들한테 폭행을 당한 사람 등. 위험한 곳에 가지 말라곤 하지만 사고란 것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들이 명백한 피해자임에도 경찰은 별다른 조치를 안 했다. 억울한 상황을 영어로 말하기 힘들고, 무엇보다 호주 경찰은 웬만해선 워홀러들을 보호하지 않는다. 그들은 외노자들이 자국민에게 어떤 피해를 입든 큰 관심이 없다.
정신적 타격을 입은 사람들도 꽤 있었다. 사기를 당해 큰돈을 잃은 사람, 도살장에서 큰돈을 벌었지만 여전히 한국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는 사람, 인종 차별에 시달린 나머지 우울증에 걸린 사람 등.
호주는 아름다운 자연이 숨 쉬는 곳. 친절하고, 유쾌한 사람들이 사는 곳. 여유와 친절이 퍼져있는 사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 나라는 엄연히 외국인이었다. 자국민이 아닌 사람들을 보호할 의무는 없었다. 워홀을 오든, 유학을 오든, 관광을 오든 결국 스스로 조심해야 함이 최선이었다. 경찰은 도와주지 않고, 현지 변호사를 고용하는 일은 비싸고, 의료보험 따위는 없다. 이 나라도 천국은 아니었다. 한국에 비하면 호주는 참으로 천국 같은 곳인 줄 알았데 어디든 사는 것은 다 힘들더라.
그런 사연들을 접할 때마다 안타까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더 화가 나는 점이 있었다. 타인의 아픔을 후벼 파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타인의 상처에 기뻐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늘 있었다.
몇몇 커뮤니티나 뉴스 기사의 댓글엔 워홀 간 사람들을 조롱하는 말들이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비난했지만 결국 하나로 귀결 되는 말들이었다.
“쓸데없이 워홀을 왜 가?”
‘누가 뭐라고 하든 스스로를 믿고, 나만의 선택을 내릴 것. 그리고 그 선택에 따르는 책임을 외면하지 말 것. 그렇게 스스로의 길을 만들어 나갈 것.’ 이런 메시지들이 그날은 참 무용하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악플들도 따갑게 나를 찔렀다. 나를 응원해줬으면 하는 사람이 유달리 고픈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