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2 Ep2 너 내 동료가 돼라

치킨나라 동료들

by Ted 강상원

“그 허무함 속에서도 나라는 자식새끼가 사랑스러웠을까?”


#달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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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농장 직원으로 받을 수 있는 혜택이 있었다. 신선한 계란을 아주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었다. 계란 한 판에 단돈 2불이었다. 원한다면 10판이든 20판이든 매주 주문이 가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맛이 매우 고소하고, 신선했다.


농장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이었다. 그간 일자리를 못 구해 통장 잔고가 1불도 채 안 됐다. 첫 주급이 들어올 때까지 빵, 라면, 통조림으로 버텼다. 며칠 후 드디어 먹고 싶었던 농장의 계란을 처음 받는 날이었다. 그날 퇴근 후 집에 도착하자마자 계란 프라이를 해 먹었다. 소금 간은 전혀 하지 않고, 그대로 먹었다. 익힌 계란에서도 생식(生食)을 먹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날달걀의 신선함과 맛있게 익은 계란 프라이의 맛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이어서 몇 개를 더 해 먹었다. 이번에는 소금 간도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포만감 이외의 감정이 올라왔다. 따뜻하고 건강한 식사를 해본 적이 언제였는지 더듬어 봤다. 사실 호주에 오고 나서 그렇게 건강하게 식사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 대부분 인스턴트식품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날의 계란 프라이가 내게 약간의 위로를 주었다. “앞으로 이제 잘할 수 있을 거야”라고 응원해 주는 것 같았다. 호주에 오고 나서 처음 몇 달은 계획대로 잘 안 됐지만 지금부터라도 잘해나가면 될 것이라 믿기 시작했다. 든든해진 배와 함께 떳떳한 마음으로 집에 안부 인사를 했다. 때마침 전역을 압둔 동생의 안부도 함께 물어봤다.


“지난주부터 닭농장으로 출근했어요.”

“일은 힘들지 않아요.”

“동생은 건강하게 잘 제대했어요?”

“나 밥 잘 챙겨 먹고 있어!”


지난번과 달리 끼니를 잘 챙긴다는 인사에 울컥하지 않았다. 어머니도 내가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다며 다행이라 하셨다. 그리고 동생도 조만간 호주로 갈 것이란 얘기를 들었다.


시간이 흘러 농장 생활에 제법 적응을 했다. 호주 은행의 적금 상품도 가입해 돈도 차곡차곡 모았다. 당시 2주 간격으로 1000불 이상씩 저축했다. 돈이 차곡차곡 쌓여가면서 다시 희망이 생겼다. 본래 1년 남짓할 시간만큼만 머물고 미국으로 갈 계획이었다. 미국에 있는 영화학교의 한 학기 등록금과 생활비 정도만 마련하고 호주를 떠날 계획이었다. 물론 계획대로 되지 않아 호주에 더 오래 체류하게 됐다. 그래도 비자 만료 기간인 2년(기본 1년 연장 시 1년 추가)을 꽉 채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지금 속도대로 돈을 모은다면 대략 8~9개월 뒤에는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에 초기 정착금만 어느 정도 더 마련하면 될 터였다.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게 됐다. 일을 못 구해 굶어야 했던 시절에는 심리적으로도 많이 위축된 상태였다. 하지만 어느덧 생활의 안정을 찾아 외국인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있었다. 같이 사는 하우스 메이트들과도 제법 친해졌다. 그리고 매일 영어를 사용하면서 다국적 친구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이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우리 숙소에는 한국, 일본, 대만, 홍콩,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친구들이 살았다. 이웃집에도 워홀 온 친구들이 살고 있었다. 닭농장에서 함께 일하는 친구 몇 명이 그곳에 살았다. 그렇게 두 집을 가득 채운 외국인 노동자들과 동고동락하며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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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끌모아 티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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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통장에 돈이 제법 쌓였다. 이대로면 계획대로 영화 학교에 입학이 가능할 것 같았다.(물론 처음 계획보단 한 학기 뒤로 밀렸지만) 시간 날 때마다 뉴욕 필름 아카데미와 밴쿠버 필름스쿨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다. 당시 그 학교에 재학 중인 사람들에게 페이스북 친구를 걸었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그들의 사진을 보며 나도 언젠가 저곳에서 나와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할 순간을 상상했다. 세계 각지에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내 꿈을 펼칠 것이라 다짐했다. 이를 위해서라면 닭장의 먼지와 오물쯤은 얼마든지 뒤집어쓰겠다는 각오가 생겼다. ‘내가 지금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은 신체의 오물뿐만 아니라 피로까지도 씻겨 줬다. 그렇게 호주 생활에 적응하면서 다양한 경험도 하고, 재밌는 추억도 쌓고, 영어도 생활화하면서 내 꿈에 다가가는 순간이 즐거웠다. 기계공학으로 복학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이상 적성에 맞지 않는 역학(力學)과 힘겨루기 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절대 돌아가지 않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반드시 해내고야 말 거야’


그렇게 내 꿈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고 있다고 생각하던 와중 좋은 소식을 접했다. 가고 싶었던 영화학교에서 입학 프로모션을 곧 진행한다는 소식이었다. 주어진 기간 안에 약간의 입학금과 함께 입학 신청을 미리 해 두면 학비를 할인해 주는 프로모션이었다. 문제는 그 돈이 그간 적금으로 모은 돈의 액수와 일치했다. 이를 지불하기 위해서는 적금을 깨야 했다. 당시 가입한 적금의 이율은 월 4% 상품이었다.


적금을 가입하려 할 때 연 4%가 아닌 월 4%라는 수치가 믿기지 않았다. 당시 Common Wealth Bank 홈페이지에 기재된 적금 상품의 설명을 읽고 또 읽었다. 월 4%라는 말이 믿기지 않았기에 내가 혹시 영어를 잘 못 번역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란 의심도 들었다. 결국 직접 은행에 방문해 해당 상품 문의를 했다. 월 4%가 맞다는 인도계 은행 직원의 설명을 직접 듣자 안심이 들었다. 자신도 이 상품에 가입해 모은 돈으로 인도에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많이 보냈다고 했다.


그렇게 애써 가입한 적금을 깨야 할지 고민이 들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입한 적금이었고, 이율이 워낙 좋아 막상 해지하기가 망설여졌다. 혹시 다른 방법은 또 없을까 고민했다. 점점 프로모션 기간은 끝을 향해 갔고, 나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고민 끝에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호주를 떠나면서 내 적금을 깨는 날 이자까지 후하게 쳐서 그 돈을 갚겠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일단 알겠다고 하셨다.

어느새 시간은 흘러 프로모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집에선 아무 연락이 없었다. 역시 큰 금액을 갑자기 마련하기 힘드셨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내 적금을 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형 나 어학원 학비 좀 빌려줄 수 있어? 나중에 엄마가 갚는대”


나는 적금을 깼다. 그리고 그 돈의 대부분을 시드니에 있는 한 어학원으로 송금했다. 어느새 영화학교의 프로모션 기간도 끝나 있었다. 몇 달 동안 모은 돈이 단 몇 초만에 사라져 있었다. 허무했다. 하루 종일 먼지를 뒤집어써도, 구더기를 밟는 역겨운 느낌이 들어도, 똥 물이 얼굴에 튀어도, 닭 발톱이 날카롭게 생채기를 내도, 시커먼 바퀴벌레가 내 몸 위를 기어 다녀도. 통장에 조금씩 쌓여가는 돈을 보면서 희망을 봤다. 무엇보다 내 힘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내 꿈에 다가간다는 사실에 심장이 뛰었다. 절대적 액수를 떠나 티끌이 모이는 모습에 뿌듯함을 느꼈다. 한국에서 응원받지 못했던 꿈을 해외에서 반드시 이뤄 돌아가겠다는 욕망이 있었다. 그 앙갚음이 실현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조금씩 쌓인 희망은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로 인해 단 한순간에 무너졌다.


처음 며칠은 허무함이 내 감정을 잠식했다. 하늘엔 공허라는 먹구름이 가득했다. 먹구름에선 부정적인 생각이 번개처럼 내리쳤다. 내 마음의 들판엔 무력감이 자라났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한숨부터 나왔다.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로 일을 했다. 그러다 보면 ‘내가 이 일을 해서 뭐 하나?’, ‘내가 이 일을 하는 의미가 있나?’, ‘호주에 온 지 1년이 다 됐는데 다시 처음부터 출발해야 하는구나’, ‘난 뭐 때문에 온갖 더러움을 참고 일했지?’ 등의 생각이 떠올랐다. 회의감이 몰아쳤다. 머릿속엔 그간의 노고가 보잘것없다는 의심이 계속 따라붙었다.


조금은 기운이 빠져있던 시기 집에서 연락이 왔다. 덕분에 동생 어학원 잘 등록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현하셨다. 통화를 마치고 하늘을 바라봤다. 청명한 캔버스 위에 먹음직스러운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적절한 미풍이 눈앞의 갈대밭을 스치며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언제나 아름답고, 친절한 위로를 건네는 자연 앞에서 조금의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재수, 삼수를 하면서 나간 돈 생각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 나 때문에 부모님 고생하셨는데 이까짓 것쯤이야.’

‘근데 우리 엄마 아빠도 그랬을까? 열심히 모은 돈으로 하고 싶은 게 있지 않으셨을까? 근데 나 때문에 계속 큰돈이 나갈 때마다 이렇게 기운이 빠지셨을까? 그때마다 우리 엄마 아빠도 이렇게 허무했을까?’

‘그 허무함 속에서도 나라는 자식새끼가 사랑스러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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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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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시간이 또 흘러 호주에 온 지 1년이 다 돼 갈 무렵이었다. 날씨가 다시 더워지면서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내겐 호주에서 두 번째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였다. 호주에서 처음 맞이한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서양권에서 크리스마스는 한국의 크리스마스와는 달랐다. 오히려 한국의 설날 또는 추석과 닮아 있었다. 즉, 가족과 함께하는 휴일이었다. 특히나 호주는 크리스마스부터 1월 1일까지 연휴다. 나는 이것도 모른 채 호주에서 처음 맞이한 크리스마스날 시내로 나갔다. 역시나 대부분의 가게는 문을 닫았고, 시내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한국의 크리스마스처럼 이벤트나 파티가 가득할 거란 나의 예상은 비껴갔다. 맥도널드 햄버거를 사 와 집에서 혼자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호주에서의 두 번째 크리스마스는 조금 특별했다. 한 이탈리아 친구가 크리스마스 홈파티를 하자고 제안했다. 각 나라별로 전통 음식을 하나씩 준비해 저녁을 즐기기 기로 했다. 나는 불고기를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홈파티 당일 이웃집에 도착하니 이탈리아 친구들이 피자를 만들고 있었다. 내게 피자는 항상 사 먹는 음식이었다. 그런데 그날 부엌에서 직접 밀가루 반죽을 하는 이탈리아인들을 보니 신기했다. 그전에도 그 모습을 몇 번 봤지만 그날은 더 특별해 보였다. 크리스마스날 피자 요리 중인 이탈리안의 모습은 그들의 고향이 어디인지 생생하게 말해주는 듯했다. 그들에게 피자는 홈메이드 음식이었다.


식탁에는 다양한 요리가 수놓아져 있었다. 피자, 샐러드, 파스타, 푸아그라, 불고기, 대만식 장조림 등등. 식탁 위로 음식이 담겨있는 접시를 주고받기 바빴다. 각자 접시에 음식을 조금씩 덜어서 세계 각지의 요리를 즐겼다. 그리고 다들 각국의 음식을 소개하기 바빴다.(파스타와 피자는 소개가 필요 없었다) 이어서 각 나라별로 크리스마스 시즌에 주로 무엇을 하는지 공유했다. 특히 유럽에서 온 친구들이 본인들의 크리스마스 전통을 즐겁게 이야기했다. 그들의 크리스마스 전통은 조금씩 달랐고, 조금씩 닮아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크리스마스 전통을 이야기하는 듯하더니 나중에는 자신들의 크리스마스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에는 가족과 온기가 가득했다. 따스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덧 기다란 식탁 위로 훈훈함이 번져 나갔다. 마치 영화 ‘나 홀로 집에’ 나오는 따뜻한 분위기가 퍼졌다. 크리스마스는 연인들에게만 따뜻한 날이 아니었다. 모두가 따뜻해지는 날이었다. 그렇게 온정이 담긴 음식을 함께 나눠 먹으며 크리스마스의 ‘함께한다’는 의미를 맛볼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서양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한 층 더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은 유럽 친구들이 고향과 가족을 특히 더 그리워하는 날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설날 또는 추석이면 가족과 고향이 더 그리운 한국사람들처럼. 한국 사람이 건네는 새해 인사처럼 그들의 “Merry Christmas”라는 인사에서 그 특유의 온기를 조금 알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인사가 조금은 더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그 인사말에는 안온한 연대가 담겨 있었다.


‘”Merry christmas”가 참 친절한 인사구나’


그렇게 성탄절이 건네는 따스한 위로에 힘을 얻었다. 그 덕에 허무의 무기력에 빠지지 않고, 기운 낼 수 있었다. 목표를 향해 다시 나아가겠다는 결의를 다시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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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ngin Backpackers(진진 백패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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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진(Gingin)에서의 생활은 제법 즐거웠다.


호주 워홀을 가는 청년들 대부분의 목표는 돈이다.(물론 아닌 경우도 있다) 소위 말해 한몫 댕기러 간다. 그래서 보통은 ‘대박 농장’ 혹은 ‘대박 공장’이라고 불리는 곳을 전전한다.


내가 일했던 곳은 대박 농장은 아니었다. 학비가 절실했지만 진진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일도 제법 손에 익었고, 어느덧 물청소 업무만 맡은덕에 조금 편했다. 그리고 벌어들이는 돈도 적은 편은 아니었다. 물론 이런 요인들이 나를 진진에 묶어둔 주된 동기는 아니었다. 나는 무엇보다 다국적 친구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어서 진진이 좋았다. 영어를 자주 사용하는 환경에 노출됨이 좋았다. 그리고 매일 다른 나라의 삶과 문화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점이 내 진진 생활의 큰 재미였다. 학교 다닐 때 제일 싫어했던 역사 과목을 그 나라 출신의 친구가 직접 이야기해 주니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이탈리아가 통일된 지 얼마 안 됐고, 다양한 지역어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한 이탈리아 친구는 마을 사람이 100명도 안 되는 시골 출신이었다. 고향 어르신 몇몇은 여전히 지역어만 쓴다고 했다. 그들은 통일 이전의 이탈리아를 살아 본 적이 없음에도 통일에 대부분 비판적이라고 했다. 나는 유럽 사람들이라면 전부 축구에 미쳐있는 줄 알았다. 같은 집에 살던 프랑스 친구는 정말 운동을 싫어했다. 한 번은 누군가의 생일파티 날 한 독일인과 프랑스인이 말다툼을 했다. 프랑스인은 ‘너네 나라가 전쟁을 일으켰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고, 독일인은 ‘우리 할아버지도 어쩔 수 없이 끌려갔다’라고 했다. 그냥 술자리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전쟁의 참상이 후대에까지 미치는 영향력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대만과 홍콩의 언어가 조금 다른 것은 알았지만 실제로 보니 더 신기했다. 홍콩 친구는 홍콩의 영화가 예전의 명성을 잃은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크리스마스 휴일에 급여를 2~3배씩 줘도 출근 안 한다는 호주인들을 보며 ‘가정, 개인의 삶, 휴식’에 그들이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있었다. 미국에서 건너온 할머니 한 분은 자신의 어머니도 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이라며 어머니와 자신이 인종차별을 많이 겪었다고 하셨다. 외형이 전형적인 백인이어서 전혀 생각 못했다. 불합리하고, 몰상식함이 가득한 소외나 억압은 결국 모두가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호주의 잔디는 푸르고 푹신푹신했다. 숙소 근처에 호주 풋살(럭비와 유사함. 운동장이 타원형인 것이 특징. 호주에선 이 스포츠를 Football이라 부름) 장이 있었다. 나는 주로 그곳에서 운동을 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대략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아름다운 호주의 햇살이 짙푸른 잔디 위에 미끄러지는 모습을 즐기며 운동했다. 매번 운동을 마칠 때면 햇살은 더 강렬한 황금빛을 바닥에 뿌려댔다. 그 풍경을 감상하며 하루의 피로를 달랬다.


주로 운동했던 곳 바로 옆에 또 다른 운동장이 있었다. 필드하키(Field Hockey) 장이었다. 직사각형 모양의 운동장에 하키 골대가 양 끝에 있어서 축구를 즐기기 아주 좋았다. 하루는 손님 몇몇이 찾아왔다. 하우스 메이트들의 친구들이었다. 그중 브라질에서 온 친구가 있어서 남자들 모두가 흥분한 눈빛으로 함께 축구하자고 했다. 축구가 끝나고 우리 모두 그 친구는 브라질 사람이 아닐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브라질 친구의 축구 실력과는 별개로 축구를 하는 도중 엄청난 고양감이 일었다. 푸른 잔디 위에 다양한 피부색이 어우러져 공을 차는 모습에 흥분됐다. 순간 우리가 유럽의 명문 축구팀 같다는 환상도 잠시 품었다. 남자라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 하나에 어린애가 됨을 여실이 느꼈다. 그렇게 다 함께 땀을 흘리고, 같이 즐긴 맥주는 그 청량함과 맛을 더해 줬다. 그날 경기 후 프로 선수들처럼 줄 맞춰 사진도 찍었다. F.C Gingin이라는 이름으로 페이스북에 포스트 하고, 한 명 한 명 태그를 걸었다. 그 사진은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좋아요와 댓글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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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농장 근처에 아이보리 빛의 백사장이 있었다. 그 고운 빛깔의 모래, 푸르른 파다, 경청(輕淸)함을 뽐내는 하늘. 호주는 예쁘다고 소문난 바닷가를 굳이 찾아갈 필요가 없는 나라였다. 마을마다 청량함이 넘실대는 바다가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예쁜 바다를 볼 수 있는 호주 사람들이 부러웠다. 다 같이 바다에 놀러 간 날 모두 “I love Australia”를 외쳤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예쁜 사막이 있었다. 그곳에서 샌드 보드(Sand Board)도 경험했다. 스노보드와는 느낌이 달랐지만 그 스릴은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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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진진에서 접하는 다양한 삶의 편린들이 내게 계속 도전할 힘을 줬다. 아쉽게도 모은 돈이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다시 기운을 낼 수 있었다. 오히려 진진이라는 지역에 더 머물면서 더 많은 추억과 더 많은 배움을 경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경험을 훗날 내 영화에 어떻게 녹여낼지 상상하기도 했다. 결국 상황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 상황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조금씩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정신을 다잡고 계획을 수정했다. 호주에 체류하는 기간을 더 늘리기로 마음먹었다. 비자가 만료하는 그 시점까지 일을 해 돈을 모은다면 예상 못했던 지출(동생 학비)을 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을 구하지 못해 1년 정도만 머물려했던 계획은 1년 6개월로 바뀌었고, 이는 다시 2년으로 늘어났다.


‘그래. 돈이야 다시 모으면 되지. 계획이 완전히 어긋난 것도 아니잖아. 이 경험이 훗날 더 큰 도움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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