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눈이안보여요
요즘 갑자기 눈에 이상이 와서 술을 마시지 못하고 있다. 정확하게는 망막에 염증이 잔뜩 생겼고,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다. 흔히 아는 병명은 진단받지 못하였다. 일단 약으로 염증을 없애고, 다시 정밀 검사를 하잔다. 한 달가량 항생제를 먹으며 차도를 보고 있다.
2년 반 전에도 같은 증상으로 대학병원을 다녔고, '다발성 소실성 흰점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건강한 30, 40대 여성에게 희귀하게 나타나며, 망막에 흰점들이 생기고 수일이 지나면 사라지는 예후가 좋은 증상?이다. 지금도 같은 증상이지만, 흰점뿐 아니라 염증을 동반하고 있어 눈이 거의 안 보이는 상태가 되었다.
눈이 안 보인다는 사실보다, 좋아하는 술을 한 모금도 마시고 싶지 않다는 게 놀라웠다. 어쨌든, 나는 한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음에도 왜 이렇게 태연한 걸까? 우리나라 의학기술을 믿는다. 무척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IMF를 겪으면서 나라 경제를 살리고자, 허리띠를 졸라매며 집안에 숨겨둔 금덩이들을 꺼내놓았으며, 코로나의 습격을 당하면서 밀착된 한국의 정(情) 문화를 변화시켜 왔다. 우연히 찾아온 위기들이 삶을 변화시키고 의도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했다. 지금 나에게 그런 때가 온 건가 생각했다. '애주가'라는 다소 미화된 표현으로 술 마시는 행위를 어떻게든 즐거운 취미정도로 만들어보려 했다. 40대 초입도 아니고, 여성성을 잃어가는 호르몬의 변화와 노화가 동시에 찾아온 나이에 술 취미라니. 가장 약한 신체부위에서 아우성을 친 것이 아닐까.
아우성치는 육신의 목소리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술을 끊은 게 아니다. 그렇게 단언한 적도 없다. 나의 남자, 집사람은 아주 잘됐다는 듯이 회심의 미소를 짓지만, 나는 술을 끊은 게 아니다. 냉장고에 가지런히 줄 서있는 하이트 맥주를 보아도 손이 가지 않는다. 항생제 부작용쯤으로 판단된다. 밥 주는 종소리에 반응하는 강아지의 혓바닥마냥 맥주를 보자마자 무조건반사적인 목마름이 없다. 은근 서운하면서도 정도(正道)를 지킬 줄 아는 내 자신 칭찬한다.
며칠 후, 서울 아산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는다. 오가는 꼬박 예닐곱 시간을 들여서 다녀오는데, 결과마저 안 좋으면 안 된다. 게다가 보호자를 동행해야 해서 1+1으로 인건비도 들어간다. 서울 지리(地理), 병원 지리 모른다며 애꾸눈 상황극으로 남편의 팔짱을 끼고 돌아다니는 행각도 연출된다. 사랑이 꽃피는 병원 나들이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조금 두렵다.
눈은 보이기 시작해서 다행인데, 혹시나 근본적으로 내 망막이 안고 가야 할 특이점이 나올까 봐. 그래서 술도 끊어라, 스트레스도 줄여라, 채소만 먹어라 등등 수명을 단축할만한 경고성 멘트가 나올까 두렵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뜬금없이 인생을 배운다. 어릴 때, 엄마는 말씀하셨다.
"살아봐라, 옛말 틀린 거 없더라"
나이 들어갈수록, 스치듯 숨 쉬듯 하셨던 어른들의 말씀이 다 맞아 들어간다는 생각을 한다. 일명 '삶의 지혜'라는 것들을 무시할 수 없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자식 소용없다, 부부지간 밖에 없다... 등등
눈 건강 이슈로 술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기로 했지만, 아직 술을 끊은 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