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만하는 아이

[부인] 모두 다 나를 위해서 그런거야

또다시 눈을 꼭 감는다.


"아니야, 아니야, 그런 일은 없었어"


뾰족한 말 속에서

차가운 등 뒤에서

무거운 침묵 속에서

작은 손으로 귀를 막고


"아니야, 모두 다 나를 위해서 그런거야"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어도

그 아이는 여전히 눈을 감는다.


기억이 떠오르면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서

진실과 마주하는 것이 무서워서

"괜찮아, 괜찮아" 중얼거리며

부서진 것들을 외면한 채


어른이 된 지금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여전히 그 작은 손으로 세상을 가리고 있다.






눈을 감는 어른들: 우리가 '없던 일'로 만드는 상처들


"아니야, 아니야, 그런 일은 없었어"


어린 시절, 감당하기 힘든 현실 앞에서 우리는 눈을 꼭 감고 귀를 막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뾰족한 말들이 가슴을 찔러올 때, 차가운 등 뒤에서 외로움이 밀려올 때, 무거운 침묵이 숨통을 조여올 때... 작은 손으로 귀를 막고 스스로에게 속삭였죠. "모두 다 나를 위해서 그런 거야"


그런데 사실은,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어도 우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몸은 자랐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그 작은 아이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현실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일상 속 부인



우리가 매일 하는 자기기만


오늘도 우리는 익숙하게 현실을 포장합니다:


SNS에는 행복한 순간만 올리며 "내 삶은 완벽해"라고 연출합니다.

누군가 상처 주는 말을 들어도 "농담이었을 거야"라고 스스로를 달랩니다.



아이에게 소리를 지른 후 "사랑해서 그런 거야"라고 정당화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인(Denial)'입니다. 견딜 수 없는 현실을 '없던 일'로 만드는 우리 마음의 방어기제죠.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실은 마음속 작은 아이가 여전히 눈을 꼭 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말로 진실을 가리고 있을까요?


"그래도 날 버리지 않았어"
폭력과 무시를 사랑으로 포장하며, 최소한의 위안에 기댑니다.


"그 정도 스트레스는 다들 받아"
과로와 번아웃에 시달리면서도,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며 자신의 고통을 축소합니다.


"원래 그런 거야"
상처가 될 일을 '원래 그렇다'고 정당화하며 참습니다.


"성공하면 행복할 거야"
현재의 불행을 미래의 성공으로 보상받을 거라 믿습니다.




부인이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 신호


마음이 보내는 SOS


무의식에서 부인을 방어기제로 선택하여 살아가다 보면,

우리 몸과 마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경고를 보냅니다:


관계 패턴의 반복
부인한 상처가 비슷한 관계에서 계속 재현됩니다. 같은 유형의 사람을 만나고, 같은 상황에서 상처받습니다.


감정 마비
아픈 것뿐만 아니라 기쁜 것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감정의 스펙트럼 자체가 좁아집니다.


현실 검증력 상실
무엇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감정과 판단을 신뢰할 수 없게 됩니다.


정체성 혼란
진짜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가면을 쓴 채로 너무 오래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방어기제로 부인을 선택 했을까?



부인은 생존 전략이다.


부인은 우리를 괴롭히려는 적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부터 마음을 지키려 했던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때, 부인은 우리가 무너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것은 그 시절의 용기였고,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 우리가 어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른이 된 우리에게는 진실을 마주할 힘이 있습니다. 과거의 무력한 시절의 선택이 현재의 감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실과 마주하는 용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진실과 마주하는 것은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작은 발걸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1단계: 작은 인정부터
"그때 나는 정말 아팠구나"라고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2단계: 감정 허용하기
슬픔, 분노, 두려움이 올라와도 밀어내지 않습니다. 그것들도 나의 일부입니다.


3단계: 안전한 공간 찾기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진실을 나눕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4단계: 점진적 직면
한 번에 모든 것을 마주하지 말고 천천히 접근합니다. 자신의 속도를 존중합니다.



진짜 강함이란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었던 일'을 흘려보내고 살아가는 것이 진짜 강함입니다.

진정한 치유와 성장은 현실을 외면하고 얻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상처를 온전히 인정하고 품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힘을 기르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제는 눈을 뜰 시간



당신 안의 작은 아이에게


더 이상 눈을 감아서는 안 됩니다. 현실은 때로 아프지만, 그것이 우리 삶의 진실입니다. 부인은 잠시 고통을 덜어주지만, 진짜 자유는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 시작됩니다.


당신 안의 작은 아이는 이제 진실을 함께 볼 수 있는 어른인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말해주세요.


"그래, 아팠구나. 정말 힘들었구나. 이제는 내가 너와 함께 있을게."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안전함입니다.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상처받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날카로운 현실 앞에서 진실을 외면하는 것은 일시적인 도피일 뿐입니다.


상처를 드러내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진실과 마주해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원한 부인이 아니라, 진실과 함께 살아가는 용기입니다.


오늘부터라도 작은 진실 하나씩 마주해보는 건 어떨까요? 그 용기가 당신을 진짜 자유로 이끌 것입니다.

화요일 연재
이전 03화이성은 감정을 속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