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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은 May 14. 2022

티탄


 모든 것이 기계화되는 세상에서, 모두가 기계를 숭배하는 세상에서도 가장 가치있는 것은 인간성이다. 이런 흔한 메시지를 이상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영화였다. 보는 내내 뭐지, 대체 뭐지, 왜 다들 이 영화를 극찬하는 거지. 의미하는 바가 뭐지. 고민했다.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 채 엔딩크레딧이 올라왔다. 극장을 나온 후 다시 생각해보니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것 같았다. 현대 사회에서 흐려지는 존재의 경계, 그리고 인간에 대한 찬사. 

 알렉시아는 인간성의 상실, 기계, 그외 등등 현대 사회가 표방하는 것을 뜻한다. 어릴 적 수술을 받아 뇌가 티타늄인지 기계인지...여튼 보통의 인간과는 다르게 이루어졌다. 섹스조차 기계와 하는 인간으로. 보편적인 도덕 윤리조차 없다. 남이 아프다는 신체 부위를 건들고, 심지어 살인도 일삼는다. 결국 그는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 하는 현상수배범으로 전락한다. 도망치기 전에는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른 뒤 잠들던 부모가 있던 방을 잠근다.인간 말종. 인간도 아닌 것. 알렉시아에겐 이런 명칭들이 어울릴 것이다. 그렇다고 알렉시아가 정말 인간이 아닌가? 그건 아니다. 인간성이란 추호도 없어 보이는 알렉시아도 실은 인간이란 징조는 영화 초반부터 등장한다. 바로 임신이다. 그는 생명을 잉태하고 창조할 수 있는 인간이다. 

 머리를 깎고, 직접 자신의 코를 부러뜨려 외형을 바꾼다는 말도 안 되는 발상을 실행한다. 그 발상은 우연찮게 애닳토록 아들을 찾던 한 아버지에게 먹혀든다. 여자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말을 하지 않지만, 마침 자신이 행세해야 하는 아들에겐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말을 하지 않아도 아버지는 그저 기다릴 뿐이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찾던 아들에게 떨어져 있었던 시간만큼 크나큰 사랑을 준다. 다 큰 아들의 머리를 직접 깎아주고, 자신의 직장에도 데려간다. 알렉시아는 그저 숨어있을 요량으로 그 집에 살고 있었지만 점점 아버지에게 마음을 열며 감정적 교감을 나눈다. 무관심하던 실제 아버지와는 다른 양상인 동시에 감정 교류, 즉 인간성을 알게 되는 알렉시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초반에는 알렉시아가 친아들인 아드리앵으로서만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알렉시아가 누구든간에 아드리앵이다. 아드리앵은 친아들을 명명하는 호칭이 아니라 사랑하는 존재를 뜻하는 것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집에 찾아온 이혼한 어머니는 알렉시아의 알몸을 보지만 그저 '저 남자의 곁에 있어달라'는 강요만 할 뿐이다.(실은 부탁에 가깝지만)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매번 주사를 놓고, 전처럼 턱걸이조차 하지 못하는 늙은 아버지에게는 그게 누구든간에 아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아버지는 알렉시아에게 수염이 자라라며 면도약을 발라주고, 가슴을 보고도 별말업이 수건을 둘러준다. '네가 어떤 존재여도 내 아들이다' 라는 말은 간절하게 사랑할 이가 필요한, 누구보다 인간다운 존재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아무리 붕대로 몸을 둘러싸도 점점 차는 알렉시아의 배는 출산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러 아버지는 알렉시아의 출산을 돕는다. 끝에 검은 기름에 둘러쌓인 아이가 나오는데, 인간성을 상징하는 인물인 아버지에게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 출산을 한다는 점이 상징적이다. 알렉시아는 출산 후 사망하고 마지막 장면은 외롭기에 사랑하고 싶은 인간과 갓 태어난 생명으로 채워진다. 결국 영화는 인간을 말하며 끝난다. 

 알렉시아가 남자 행세를 하며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존재 양태가 뚜렷이 드러난다. 여자이기도 하고, 남자이기도 한 존재. 기계이기도, 인간이기도 한 존재. 이를 나타내기 위해 자극적인 시각적 요소가 무수히 등장한다. 피 대신 검은 기름이 나오고, 모유조차 검은 기름이다. 아이를 낳는 배는 점점 갈라지며 티타늄이 드러난다. 그렇지만 그 티타늄과 검은 기름 속에서 나온 것은 평범한 아기이다. 모든 요소가 혼종된 상태이다. 이런 알렉시아를 무어라 규정하기 혼란스러운데, 이 혼란스러움이 감독의 의도같다. 애초에 규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 것이다, 감정노동을 하는 기계도 나올 것이다. 별 얘기가 나오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존재의 경계는 흐릿해 질 수밖에 없는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결국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혼돈 속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외롭고, 그래서 끝없이 사랑할 거라고. 

++ 갑자기 알렉시아가 산통을 느낄 때 아버지도 배에 불이 붙어 고통을 느끼는 장면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공감이 아닐까? 알렉시아의 고통을 공감하는 장면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인간성을 상징하는 존재라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인간 양상의 상징적 표현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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