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하나쯤은, 그런 여행이 있다

2024년 8월의 부산 여행

by 십이월

Prologue


언제부터인가, 나의 일상은 마치 끝없이 돌아가는 기계처럼 느껴졌다. 반복되는 하루들 속에서 길을 잃은 듯, 나는 어느 순간 ‘무엇을 위해 이토록 달려가는 것인가?’ 하는 의문에 휩싸였다. 그럼에도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흐르는 시간을 쫓을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마음 한구석에 머물던 생각이 조용히 형태를 갖췄다. 나는 계획도 없이, 목적도 없이, 그저 떠나기로 했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떠나게 했을까. 아마도 일상에 대한 지루함, 아니면 그 안에서 얽힌 고독이었을지도 모른다. 철저히 계획된 길을 따라가는 것이 나의 특기였지만, 그만큼 마음이 구속되었음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그 즉흥적인 결심은 마치 내 존재 자체를 다시 확인하는 순간 같았다. 나는 떠났고, 그곳에서 나를 만날 수 있을 거란 희미한 믿음만을 가지고 있었다.



1일차


새벽 5시 30분. 아직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원래 이른 시간에 떠날 생각은 아니었는데, 급하게 기차표를 구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불만은 없었다. 때로는 우연이 정교한 계획보다도 단단하게 짜여 있으니까.


가볍게 챙겨둔 배낭을 메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섞이는 곳. 기차가 출발하자 창문 너머로 무한한 풍경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가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면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빌딩들이 점차 낮아졌고, 도시는 점점 희미해졌다. 논과 밭, 비슷한 색감의 정겨운 집들. 나는 시골에 특별한 연고가 없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풍경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곳처럼, 어떤 감각이 나를 향해 손을 뻗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향수인지, 동경인지, 아니면 단순한 착각인지 알 길이 없다.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 뜨거운 열기가 피부 위로 들러붙었다. '8월’, 그리고 ‘여름’이란 단어만으로는 부족한 듯했다. 햇볕은 쏟아지다 못해 내리꽂혔다. 부산은 낯설지 않은 도시인데도, 처음인 것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어릴 적 가족여행의 희미한 기억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선 채로 부산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실감이라는 것은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오는 법이었다.


나는 깡통시장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시장에 도착하자 좁은 골목마다 뜨거운 공기가 가득 차 있었다. 무심하게 엉켜 있는 관광객들을 지나쳐 정처 없이 걷다가, 불현듯 마주한 한 작은 가게에서 떡볶이를 먹고

, 근처 노점에서 호떡을 하나 사 들고 다시 걸었다. 어쩌면 여행이란 계획된 목적지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발을 멈춘 곳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근의 책방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작고 소박한 풍경은 오래된 책들이 가진 시간의 깊이를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고 있었다. 빛바랜 간판 아래 줄지어 선 작은 서점들, 문 앞에 무심히 쌓여 있는 헌책들, 그리고 책방을 지키고 앉아 있는 주인들의 눈빛. 그것은 기다림이 아니라, 이미 책과 하나가 되어 버린 시선이었다. 먼지 냄새,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 모든 것이 흐르는 듯하면서도 그대로 멈춰 있었다. 부산이란 바다와 열기로 기억되는 곳이지만, 이곳만큼은 시간이 다르게 흐르고 있는 듯했다.


나는 다시 버스를 타고 한 시간가량을 달려 광안리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들, 부산 사투리, 그리고 느긋한 버스 기사의 적당한 속도. 나는 이 따뜻한 리듬과 여유가 좋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낯선 도시에선 오히려 모든 것이 부드럽게 녹아들었다.


버스에서 내려 걸었다. 골목 사이사이로 바다가 스쳤다. 마치 숨바꼭질하듯, 건물 틈새로 파랗게 번져왔다가, 이내 사라지고, 다시금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다 마침내, 시야가 열렸다. 순간 모든 것이 정지했다. 건물도, 자동차도, 사람도, 모든 것이 배경으로 밀려나고, 오직 바다만이 내 앞에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푸른 물결이 햇빛을 품고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토록 보고팠던 바다, 그 바다가 지금 내 앞에 있었다.

(중략)


호텔 곳곳을 둘러본 뒤, 루프탑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변은 고요했고, 바다와 하늘만이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 에어팟을 꽂고 Vietra의 노래를 들었다. 학창 시절, 지칠 때마다 자주 듣던 것이었다. 같은 음악을 들으며 바다를 바라보니 그때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음악이라는 것은 참 신기한 힘을 지닌 듯했다. 음악은 내가 있었던 그 순간으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과거의 힘들었던 기억은 그때 그 순간의 행복한 기억으로 덮여 그 음악에 새로 저장되었다.


두 시간이었을까, 그렇게 가만히 앉아 온몸으로 바다를 느꼈다. 파도 소리와 바람. 그 모든 것이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 되어주었다. 경련하던 마음이 서서히 풀어졌다. 내가 신경 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호텔에서 나와 맨발로 해변을 따라 걸었다. 행복해 보이는 연인들, 즐겁게 뛰어노는 아이들, 다정해 보이는 가족들. 각기 다른 삶들이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평화로워 보였다. 그저 그 장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어느 순간 발끝이 멈춰 섰다. 머리 위, 검은 하늘이 일렁였다. 점들이 모였다 흩어지고, 곧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하늘 위에서 무언가가 탄생할 때마다 환호성을 터뜨렸다. 드론쇼가 시작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을 보기 위해 모였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나는 완벽한 타이밍에 맞춰 그곳에 있던 것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선택한 발걸음이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이끌리듯. 그 찰나의 감각이 전부였다.


나는 골목을 돌아 작은 선술집으로 향했다. 낡고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시간은 천천히 흐르고 있었고, 은은한 조명 아래 손님들은 고요한 저녁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평소 술을 즐기지 않지만, 이날만큼은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한 잔의 술과 맛있는 안주, 그리고 가볍게 흘러나오는 음악. 그럴듯한 분위기와 함께 나는 괜히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는 내일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득, 이곳에 더 머물러야 할 것만 같았다. 정해진 계획 없이 흐름에 몸을 맡기는 일이 이렇게 충만할 줄은 몰랐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내일을 기대하며, 낯선 밤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2일차


새벽 5시 반. 알람을 맞춰둔 기억도 없고, 그저 무심하게 흐르던 시간 속에서 깨어났다. 일출을 꿈꾸었지만 이미 지나간 뒤였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바다를 닮은 파스텔 빛의 새벽하늘이었다. 그 고요하고, 아득한 색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날씨를 확인하지 않고 떠난 여행이었지만 하늘은 내내 맑고 따뜻했다. 간단한 조식으로 끼니를 해결한 뒤, 나는 버스를 타고 흰여울문화마을로 향했다. 경사면에 자리 잡은 마을은 바다를 품은 채 고요히 숨 쉬고 있었다. 첫인상이 묘하게 편안했다. 오래된 골목과 느릿한 공기, 어디선가 흐를 법한 지브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는 그 감성을 따라 골목 사이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작은 카페에 들어서자, 음악이 흘러나왔다. 토피넛 라떼를 주문한 뒤, 나는 바다가 보이는 통창 앞에 앉아 책을 펼쳤다. 책과 바다, 그리고 커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 한데 모인 순간이었다. 그 과분한 행복 속에서 문득, 아등바등 살아가는 일상의 분주함이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중략)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새 나는 크루즈에 올라 있었다. 서서히 저물어 가는 하늘, 저 너머 산 아래 보이는 마을과 함께 금빛 바다가 일렁였다. 배가 향하는 대로 갈매기들이 따라왔다. 바람이 스치고,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바다와 나, 둘뿐이었다. 저 멀리 흰여울문화마을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 카페에서 바라보던 그 풍경 속에 내가 있었고, 그 카페가 있는 곳을 하나의 풍경으로 바라보고 있는 순간이었다.


다시 광안리로 향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두 정거장이 지나 있었다. 하지만 아무렴 좋았다. 지난 길을 되돌아가며 해변을 따라 걷기로 했다. 이렇게 오늘을 끝내기엔 아쉬웠다. 나는 나쵸와 캔맥주를 사서, 밤바다로 향했다. 늦은 밤, 해변은 한산했고, 나는 야경을 바라보며 파도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부산에서의 마지막 밤을 맞이하며 일기를 썼다. 내일이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후회는 없었다. 과분할 정도로 행복했던 이틀이었다.


3일차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공간을 눈에 담은 뒤 체크아웃을 했다. 어제 늦게까지 이어진 야식 때문인지 머리는 조금 무거웠지만, 상쾌한 바람이 금세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나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밀면집으로 향했다. 평소에는 즐기지 않지만, 부산에 오면 꼭 맛봐야 한다는 음식이었다. 월요일 아침, 사람들의 소리와 잔잔한 바다의 윤슬을 바라보며 먹은 한 그릇의 밀면은 더없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복잡한 계획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저 바다만 있으면 충분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다시 올 수 있지만,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여유와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그곳을 떠날 때, 나는 계속해서 뒤돌아보며 끝까지 바다를 눈에 담았다. 1초라도 더 보면 뭐가 달라지겠느냐마는 그 아름다운 추억 속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완벽하고 행복했던 부산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Epilogue


부산의 거리를 떠돌며 나는 문득, 시간의 흐름에 대한 착각을 깨달았다. 나는 언제나 ‘다음’을 위해 살아왔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오늘의 행복을 미루고, 언제나 부족한 무언가를 쫓았다. 그러나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현재일 뿐이었다. 시간은 늘 그렇게 흘러가고, 나는 그 흐름을 쫓아 허둥대며 ‘지금’을 놓쳤다.


부산의 바다에서 느꼈던 것은 무엇인가. 파도가 나를 향해 밀려올 때, 그 순간만이 존재했다. 그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 나는 그렇게 몸을 맡기고, 그 찰나의 행복 속에서 숨을 쉬었다. 시간에 쫓기기보다는 그 흐름 속에서 나를 발견했으며, 나의 존재에 감사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 시간의 연대가 아닌, ‘이 순간’ 그 자체였다.


나는 내가 잃고 살아왔을지 모를 많은 것들을 아쉬워했다. 숫제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시간의 허물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아쉬움은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조용한 경고처럼 내게 다가왔다. 행복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을 꿈꾸며 미루었던 행복은 바로 여기, 바로 지금에 있었다. 무엇을 가져야만, 어디를 가야만, 어떤 위치에 있어야만 행복한 것이 아니다. 욕망의 충족은 끝없는 결핍을 채울 뿐,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내가 바랐던 모든 것은 결국 또 다른 결핍을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욕망의 악순환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지금 이곳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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