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가 놀이가 된 시대, 스마트폰 액정 너머의 아이들

정보 편식과 혐오에서 벗어나 비판적 사고를 키우는 부모의 역할

by 박수열

아이들의 시선이 작고 머무는 빛나는 스마트폰 액정 너머에는 우리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거대한 심연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종종 아이들이 방 안에서 조용히 영상을 보거나 게임을 즐길 때, 그들이 안전한 테두리 안에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그 평온한 침묵 아래에서는 거센 물살이 소리 없이 아이들의 가치관을 휩쓸고 있습니다. 수익 극대화를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미디어의 알고리즘은 가장 자극적이고 편향된 정보를 끊임없이 밀어 넣습니다. 그 망망대해 속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은 채, 혐오와 차별이라는 차가운 강물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부의 단순한 일탈이 아닙니다. 오늘날 청소년들의 일상에 깊숙이 스며든 거대한 문화적 현상이자,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가장 서늘한 위기입니다.


알고리즘의 늪, '놀이'가 된 혐오


요즘 아이들은 극단적인 콘텐츠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정치 사회적 사안을 깊이 이해해서가 아닙니다. 지금의 아이들에게 혐오와 조롱은 일종의 '놀이'로 소비됩니다. 소수자를 비하하고 특정 성별이나 집단을 깎아내리는 표현들은 온라인 생태계에서 그저 '쿨하고 재미있는 밈'으로 포장됩니다.


이러한 행동의 기저에는 또래 집단 안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자극적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또래 집단 내에서 권력의 우위에 선 듯한 쾌감을 느끼고, 이를 공유하며 사회적 소속감을 얻습니다. 유튜브와 소셜 미디어가 제공하는 확증편향의 굴레는 이러한 현상을 가속합니다.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혐오 표현을 당당하고 멋진 것으로 내면화하며, 이를 지극히 '정상적인' 문화의 일부로 받아들입니다.


이 과정에서 교실과 게임방의 언어는 점차 거칠어집니다. 친구라는 얇은 유리벽 안에서 관계를 잃을지 두려워 침묵으로 동조하는 아이들도 늘어납니다. 결국 아이들은 정답을 탐구하는 대신 무비판적인 '수용'을 배우고, 건강한 질문 대신 알고리즘이 쥐여주는 가짜 권력에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답 없는 세상을 온전히 살아내는 법, '회색지대'의 사고력


아이들이 이토록 쉽게 극단주의에 빠져드는 배경에는 우리의 교육 현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우리의 입시 중심 교육은 철저한 '정답 맞히기 게임'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질문하고 의심할 시간을 빼앗긴 채, 누군가 정해놓은 하나의 결론만을 수동적으로 암기해 왔습니다. 그 결과, 새로운 정보를 접했을 때 "정말 그런가?", "왜 그렇게 말하지?"라고 따져 묻는 비판적 사고력이 심각하게 훼손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많은 문제는 흑과 백으로 명확히 나뉘지 않습니다. 삶의 진실은 대개 그사이의 넓은 '회색지대'에 존재합니다. 비판적 사고란 무언가를 보았을 때 그것이 이성적으로 논리적인지, 도덕적으로 올바른지 스스로 헤아려보는 능력입니다. 이는 창조와 혁신의 토대이자, 혐오의 논리에 휩쓸리지 않는 가장 강력한 방패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흑백의 정답을 쥐여주는 대신, 회색의 영역을 넓혀주어야 합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자율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너의 생각은 무엇이니?"라고 묻고, 하나의 사안을 둘러싼 다양한 맥락을 탐구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기계적으로 양쪽의 의견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가짜 중립이 아니라, 사실과 증거를 바탕으로 윤리적 가치를 판단하는 '비판적 중립'의 태도를 길러주어야 합니다.


심리적 방어막을 허무는 공감과 대화의 기술


아직 정체성이 확립되어 가는 시기의 아이들은 자신이 믿는 정보에 대한 비판을 자기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오랫동안 특정 알고리즘에 노출된 아이에게 다짜고짜 "네 생각은 틀렸어"라며 사실관계를 들이밀면, 아이는 심리적 방어막을 치고 감정적으로 반발합니다. "유튜브를 당장 끊어라"라는 강압적인 명령은 결코 해법이 될 수 없습니다. 핵심은 그 거대한 정보의 바다 안에서 아이 스스로 불순물을 걸러낼 필터링 능력을 길러주는 것입니다.


변화의 시작은 언제나 치열한 논쟁이 아닌, 신뢰에 기반한 평화로운 대화입니다. 아이가 극단적인 발언을 했을 때, 즉각 반박하는 것은 역효과를 낳습니다. 대신 아이의 세계로 잠시 들어가 먼저 들어야 합니다. 아이가 보는 콘텐츠의 논리를, 끝까지 경청한 뒤, 감정과 맥락을 인정해 줍니다. "왜 그렇게 느꼈는지" 부드럽게 묻는 것입니다.


공감은 단순한 설득의 전략이 아닙니다. 공감이 효과적인 이유는 분명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이해받고 있다고 느낄 때 비로소 심리적 방어막을 낮추기 때문입니다. 경계가 허물어지는 그 순간에야 비로소 다른 관점이 들어올 여지가 생깁니다.


이후에는 추상을 인간으로 바꾸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이 혐오하는 대상은 대개 추상적인 집단입니다. 여성, 이주민, 소수자. 그것을 구체적인 이름과 얼굴을 가진 실제 사람의 이야기로 연결해 줄 때, 닫혀있던 공감의 회로가 열립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팩트 체크를 하고, 다양한 관점을 보여주되 스스로 판단하게 합니다.


부자연스러운 민주주의, 그리고 타협할 수 없는 원칙


대화와 존중이 중요하다고 해서 모든 것을 비판 없이 수용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넓은 회색지대 안에서도 절대 타협해서는 안 되는 명확한 선이 있습니다. 바로 '혐오'와 '폭력', 그리고 '배제'입니다.


혐오는 자신보다 약한 자를 깎아내려 알량한 우월감을 확보하려는 현대판 신분제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는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고 건강한 사회를 좀먹는 독과 같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개인의 불편함을 정의로운 공분으로 착각하지 않도록, 참아야 할 불편함과 정당하게 표출해야 할 분노를 분별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틀린 것은 명확히 틀렸다고 단호하게 짚어주어야 합니다.


사실 민주주의는 본능에 역행하는 '부자연스러운' 제도입니다. 타인을 배려하고, 다름을 관용하며, 절제하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공동체 안에서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본능을 거스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솔직한 감정이라는 핑계로 이기적인 혐오를 쏟아내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타인과 의견을 나누고 합의점을 찾아가는 토론의 과정 자체가 민주주의 라이프스타일을 내재화하는 훈련입니다.


결국, 우리가 이토록 치열하게 고민하고 물밑에서 끊임없이 궁리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다음 세대의 주인인 우리 아이들이 타인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무탈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간절한 사랑 때문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할 것이고, 부모나 어른으로서 어떤 가르침이 옳은지 확신이 서지 않는 순간도 올 것입니다. 하지만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틈날 때마다 아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스스로 생각할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는 한 명의 어른이 곁에 있다면, 아이는 반드시 삶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가장 현명하고 따뜻한 선택을 내릴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어둠 속에서 아이를 구출해 내는, 가장 위대하고 유일한 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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