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한국은 세계가 주목하는 ‘한강의 기적’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취한 드문 국가로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은, 한국인은 정말 다시 가난해질 수도 있는가?
이 질문은 단지 경제지표나 성장률에 관한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구조적 위기이며, 국가 전체 시스템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과거의 성취가 무너질 수 있다는 근본적인 경고다.
세계 경제의 질서는 급속히 재편되고 있다. 먼저, 외부 환경을 보자.
미국은 오랫동안 한국의 최대 무역 파트너이자 동맹국으로서 자유무역을 촉진해 왔지만, 최근에는 자국 우선주의, 산업 보호주의 노선을 강화하고 있다. 핵심 산업에서조차 동맹국을 밀어내고 자국 기업을 앞세우는 전략이 노골화되고 있다.
중국 역시 과거의 ‘세계의 공장’ 이미지에서 벗어나 고부가가치 산업 전반에서 글로벌 시장을 재편하고 있다. 반도체, 전기차, 플랫폼, 인공지능 등 첨단 분야에서 무섭게 성장한 중국 기업들은 더 이상 ‘후발주자’가 아니다.
한편 한국은 과거처럼 ‘가성비’나 ‘기술력’만으로 승부를 보기 어려운 시대에 들어섰다. 중국의 내수시장은 자국 기업으로 이미 포화상태이며, 대규모 정부 보조금과 정책적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 기업들은 세계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을 적극적으로 밀어내고 있다. 미국과 중국, 두 경제 대국 사이에서 한국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한국 내부의 구조적 취약성이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기득권 장벽’과 이해당사자 간의 극심한 대립이다. 대표적인 예가 의료 분야다. 문제는 의료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제조업, 교육, 공공부문, 국회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기득권이 개혁을 저지하며 국가 전체의 역동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마치 ‘내 몫을 줄일 수는 없다’는 집단 심리가 작동하는 듯, 사회는 합의보다 갈등으로 치닫는 구조에 갇혀 있다.
과거 외환위기 당시, 한국은 ‘불도저 정신’과 국민적 근면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그때는 ‘공멸’이라는 위기의식이 국가 전체를 하나로 묶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회가 복잡하게 다원화되었고, 이해관계는 더욱 분화되었다. ‘한마음’이 되기 어려운 시대, 위기의식은 분산되고 개혁은 지체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 속에서 한국 기업들은 연구개발과 생산 거점을 해외로 옮기고 있다. 미국은 기술패권 전쟁을 명분으로 자국 내 생산기지 유치를 독려하고 있으며, 한국 기업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이에 응하고 있다. 문제는, 그렇게 벌어들인 이익이 국내로 유입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선순환 구조가 무너졌고, 한국 내 일자리 창출과 투자 여건은 점점 더 위축되고 있다.
중국은 더욱 직접적으로 한국을 압박한다. CATL, BYD, 텐센트, 핀둬둬, 샤오미 등 중국 기업들은 거대한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세계 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영역을 파고든다. 이제 그들은 단순한 추격자가 아니라, ‘지형 자체를 바꾸는 자’로 등장했다.
지금은 미래 산업을 준비해야 할 골든 타임이다. 그러나 한국은 노동시장 유연화, 신산업 육성, 규제 완화 등에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국회는 포퓰리즘적 법안에 집착하고, 이해당사자들은 눈앞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싸운다. 규제 샌드박스, 스타트업 지원, 반도체 지원, 인공지능·바이오산업에 필요한 법제화는 지지부진하다. 결국 산업구조 고도화의 시간은 뒤로 밀리고, 시장은 중국과 선진국들에게 하나 둘 빼앗기고 있다.
그 결과, 미래를 위한 씨앗을 뿌리기보다, 현재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 에너지를 쓰는 구조가 자리 잡았다. ‘성장 없는 복지’는 재정의 한계를 불러오고, 인구 절벽과 맞물리며 복지 시스템의 지속 가능성마저 위협받고 있다. 젊은 세대는 희망을 잃고, 중장년층은 자산 가치 하락에 흔들릴 수 있다. 이는 단순한 경제 지표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통합과 신뢰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악순환이다.
오늘날의 위기는 단순히 ‘성장이 둔화되었다’는 차원을 넘어선다.
양질의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부동산·자산 가격 불안정으로 가계 재무 상태는 악화되며,
인구절벽과 고령화는 복지와 연금 시스템에 지속가능성 위기를 야기한다.
젊은 세대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고,
중장년층은 자신이 쌓아온 자산 가치의 하락과 복지 부담 증가에 시달릴 수 있다.
이는 단순한 경제 문제를 넘어, 사회적 갈등과 공동체 분열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시작일 수 있다.
우리는 단순한 위기 대응을 넘어 새로운 도약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총체적 전환이다. 다음은 이를 위한 다섯 가지 전략이다.
① 산업구조 고도화와 미래 산업 육성
반도체, 2차 전지, AI, 바이오, 미래 모빌리티 등 고부가가치 산업을 국가 전략산업으로 지정하고, 정부-민간 공동 투자 확대
스마트 제조, 디지털 전환, 그린 에너지 인프라 구축 등 전통산업의 업그레이드 병행
글로벌 기업 유치와 첨단 산업 클러스터(Tech Valley) 조성을 통해 국내 산업의 국제 경쟁력 확보
② 교육·인재 양성 시스템의 재구축
디지털·AI·환경 등 미래 핵심 역량 중심의 교육 커리큘럼 개편
초·중·고·대학·평생교육 전반에서 능력 기반, 융합형 인재 양성 체계로 전환
이공계 중심의 고급 인재에 대한 장기적 투자 확대 및 해외 우수 인재 유치 정책 병행
③ 노동시장 유연화와 일자리 혁신
연공서열·정규직 중심의 고용 구조를 직무 중심·유연 고용체계로 개편
플랫폼 노동, 프리랜서, 1인 창업 등 다양한 노동형태에 대한 제도적 보호 및 사회안전망 강화
성과 기반 보상체계를 정착시켜 젊은 세대의 도전과 창의적 활동을 유도
④ 기득권 구조 해체와 공공개혁
의료, 교육, 국회, 공공기관 등 기득권화된 구조에 대한 제도적 개혁과 경쟁 유도
이해충돌 방지법, 공정 경쟁 촉진 제도 강화
개방과 자율, 경쟁이 작동하는 공공서비스 시스템으로의 전환
⑤ 민관 협력 거버넌스 구축
산업정책, 복지정책, 기술투자 등 주요 어젠다에 대해 정부-기업-시민사회 간 중장기 협의체 운영
법과 제도 정비를 민관 공동기획 모델로 전환
정치의 정쟁화 방지, 공공정책에 대한 사회적 신뢰 회복을 위한 리더십 발휘 필요
한국은 여전히 세계가 인정한 기술력과 교육 수준, 단단한 사회적 기반을 갖춘 나라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 간다면, 변화하지 않는 한국은 변해가는 세계 속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실패’가 아니라, ‘변화를 주저하다가 기회를 영영 잃는 것’이다. 과거의 기업가정신과 국민적 근면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다시 깨워내기 위해서는 과감한 결단과 구조개혁, 그리고 미래를 위한 통합적 전략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경고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다. 변화의 방향을 인식하고, 실천으로 옮기는 지금의 선택이 한국이 다시 도약할 수 있는 결정적 분기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