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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시대를 견디는 법

인간 조건에 대한 이해와 거리두기

by 엠에스

<배신의 시대를 견디는 법: 인간 조건에 대한 이해와 거리두기>

우리는 배신의 시대를 살고 있다.

믿었던 이에게서, 가까웠던 사람에게서, 때로는 오랫동안 함께한 관계 속에서 불쑥 마주하게 되는 배신은 단지 관계의 단절을 넘어서 깊은 감정적 충격을 남긴다. 도대체 왜 우리는 그렇게 자주, 그렇게 아프게 배신당하는가? 그리고 그때마다 상처받는 것은 어째서 우리 쪽일까?


배신을 당한 이들은 흔히 말한다.

“나는 진심이었는데, 왜 저 사람은 나를 그렇게 쉽게 버렸을까?” 그러나 진심이란 말은 언제나 자기 시점의 기록이다. 내가 베푼 것을 상대는 과연 동일한 가치로 받아들였을까? 또는 내가 준 것을 상대는 부채처럼 느끼며 부담스러워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서로 다른 계산법과 감정 곡선 위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두 개의 이야기를 살아간다.


진화심리학은 이런 인간의 배신을 단지 도덕적 일탈로만 보지 않는다.

협력과 배신은 인류의 생존 전략이었다. 초기 인류는 협동을 통해 생존했지만, 때로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배신을 택해야만 했다. 현대의 배신 또한 이런 원초적 전략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익이 더 커지면 협력은 무너지고, 계산이 달라지면 충성은 배신으로 뒤바뀐다. ‘죄수의 딜레마’처럼, 인간은 구조적으로 언제든 배신할 수 있는 조건에 놓여 있다.


심리학적으로도 배신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나쁜 행위’가 아니다.

인간은 자기 합리화의 존재다. 인지부조화 이론에 따르면, 자신의 행동과 내면의 가치가 충돌할 때 인간은 현실을 왜곡해 불편함을 줄이려 한다. 그래서 배신자들은 스스로를 ‘피해자’로 포장하거나, 상대방의 단점을 과장함으로써 자신이 떠난 이유를 정당화한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을 구하고, 우리는 버려진다.


그러나 우리가 놓쳐선 안 되는 것은 배신이 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구조적으로 유도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많은 조직은 충성보다 성과를 우선시하고, 관계보다 효율을 중시한다. 성과 중심의 자본주의 시스템은 배신자에게 더 많은 보상을 제공하고, 충직한 자에게는 ‘순진함’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다시 말해, 구조는 배신자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우리는 그 구조 안에서 반복적으로 상처받는다.


철학자들의 관점에서도 이 문제는 엇갈린다.

칸트는 인간을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며 어떤 상황에서도 배신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고 본다. 반면 니체는 기존의 도덕률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충성과 도리를 넘어서야 하며, 필요하다면 배신조차 자기 초월의 일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느끼는 배신의 고통은 이러한 윤리적 충돌과 세계관의 차이에서도 기인한다.


특히 한국 사회는 유교적 전통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충, 효, 의리라는 단어가 여전히 관계의 중심에 있고, ‘정’이라는 독특한 감정의 결이 인간관계를 더욱 끈끈하게 만든다. 이 문화 속에서의 배신은 단순한 신뢰의 파괴가 아니라 ‘정의 파괴’, 나아가 존재의 배척으로 느껴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관계의 끊어짐을 쉽게 용납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집착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시대일수록 우리는 관계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가져야 한다.

배신이 만연한 세상에서 상처받지 않는 방법은 단순히 사람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도 쉽게 냉소에 빠지게 하고, 결국 고립을 자초하게 된다. 대신 우리는 ‘선의의 거리두기’를 배워야 한다. 신뢰하되 맹신하지 않는 것, 기대하되 집착하지 않는 것. 관계의 열정만큼 냉정한 자리를 남겨두는 것. 그것이 배신의 시대를 견디는 법이다.


결국 배신은 인간 조건의 일부이다.

누구도 완벽히 선하지 않고, 누구도 완전히 악하지 않다. 우리 모두는 타인의 필요에 따라 충직할 수도, 혹은 상황에 따라 배신할 수도 있는 복잡한 존재다. 이 모순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여전히 ‘함께 살아가는 법’을 고민하는 것. 그것이 성숙한 인간관계의 시작이며, 고통을 넘어서는 지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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