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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의 숨겨진 칼날: 인간은 배신하는 존재다

한국 정치에서 드러나는 ‘배신’의 심리

by 엠에스

<인간관계의 숨겨진 칼날: 인간은 배신하는 존재다>

한국 정치에서 드러나는 '배신'의 심리


인간은 참으로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가족, 학교, 직장, 사회라는 다양한 무대 위에서 수많은 인연을 겪는다. 그러나 그 수많은 관계 속에서도 ‘나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해 주는 이는 드물다. 인간관계는 때로는 삶의 기쁨과 지지의 원천이 되지만, 동시에 깊은 상처와 좌절감을 안겨주는 근원이 되기도 한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배신하는 존재”라 단언했다. 그의 시각에서 인간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며, 자신의 이익이 위태로워지면 언제든 관계를 끊을 수 있는 존재다. 우리는 흔히 배신을 낯선 사람에게서 당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가까운 이로부터 느닷없이 배신을 경험할 때가 더 많다. 이러한 경험은 단순한 상처를 넘어, 인간관계 전반에 대한 신뢰를 흔든다.


지나친 친절의 역설


우리는 어려서부터 ‘착한 사람이 돼라’는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지나친 친절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호의가 반복되면, 그것은 쉽게 ‘권리’로 오해된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무조건적인 친절을 베풀면, 결국 그 친절은 요구와 무시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쇼펜하우어가 지적했듯, 친절은 그것을 알아보고 되돌려줄 줄 아는 사람에게 베풀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친절은 자기 소모로 끝나며, 관계는 불균형해진다. 인간관계의 핵심은 ‘주고받음의 균형’이며, 때로는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보다 단호한 선 긋기가 더 현명할 때도 있다.


배신은 먼 곳에서 오지 않는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배신의 상처는 깊다. 오랜 친구, 가족, 연인 같은 관계는 기본적으로 높은 신뢰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해관계가 어긋나는 순간, 수십 년간 쌓아온 신뢰마저 부정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인간관계가 ‘무상(無常)’함을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관계는 변할 수 있고, 인간의 마음은 상황과 이익에 따라 쉽게 달라진다. 이를 인정하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전적인 의존을 하지 않으면서도 보다 성숙하게 관계를 바라볼 수 있다.


고슴도치 딜레마와 거리 조절


쇼펜하우어가 자주 인용한 ‘고슴도치 딜레마’는 인간관계의 본질을 잘 드러낸다. 추위를 피하려 가까이 모이면 가시에 찔리고, 멀리 떨어지면 추위에 떨게 된다. 인간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필요한 것은 ‘적절한 거리 유지’다. 이는 무조건적인 친밀감이나 의존이 아니라, 상호 존중과 자율성을 동시에 지키는 상태를 뜻한다. 적절한 거리는 상처와 배신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관계를 오래 유지하게 만드는 완충 지대다.


고독과 외로움의 차이


외로움(loneliness)은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결핍과 고통을 의미하지만, 고독(solitude)은 스스로 선택한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내면의 안정과 창의성을 얻는 상태다.


외로움은 부정적 감정이지만, 고독은 자기 성찰과 창조의 시간일 수 있다. 시인, 철학자, 예술가들은 종종 고독 속에서 가장 깊은 통찰을 발견했다. 고독은 관계로부터 물러나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귀중한 기회다.


자기 확립과 선택적 관계


인간은 결국 홀로 태어나 홀로 죽는다. 가까운 이마저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인간관계를 더 냉정하게 선택할 수 있다.


‘합리적 친절’을 유지하되, 상대가 선을 넘으면 단호히 선을 긋는 용기가 필요하다. 또한 “저 사람 없어도 나는 잘 지낼 수 있다”는 내적 확신은 불필요한 집착과 비굴함을 없앤다. 이런 태도는 관계를 가볍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건강하고 상호 존중적인 관계로 만든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가?


맹자는 ‘성선설’을,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했지만, 쇼펜하우어와 같은 실존주의적 비관론자들은 인간의 본성을 이기심에서 찾았다. 현실에서 우리는 이익 앞에서 변하는 인간을 자주 목격한다.


이를 인정하는 것은 냉소가 아니라, 인간관계를 좀 더 현명하게 바라보는 방법이다. 사람마다 욕망의 크기와 방향이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우리는 불필요한 충격을 줄이고, 보다 현실적인 신뢰를 구축할 수 있다.


고독의 힘과 내면의 자유


나이가 들수록 고독의 가치가 커진다. 젊을 때는 외부 자극에 몰두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내면의 세계가 더 큰 위안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독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내면의 욕망과 한계를 직시하는 사람은 외부의 인정이나 변덕에 휘둘리지 않는다. 고독은 인간관계의 질을 높이고, 스스로 행복을 지킬 힘을 길러준다.


불확실성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쇼펜하우어는 인생을 고통과 불안의 연속이라 보았다. 욕망이 채워지면 권태가 오고, 권태가 오면 새로운 욕망이 생긴다.


그러나 불확실성은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실험실이 될 수 있다. 시행착오와 실패,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고독은 우리를 강인하게 만들고, 세상과의 거리를 재조정하게 한다.


고독과 연대의 균형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지만, 완전한 고독 속에서도 충만함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고독은 자기 성찰과 창조의 시간이 되고, 연대는 의미와 활력을 준다. 이 둘의 균형을 찾을 때, 인간관계는 두려움이나 상처의 원천이 아니라 삶을 풍요롭게 하는 기회가 된다.


결론 — 고독을 벗 삼아 관계를 선택하라


우리가 타인에게 느끼는 실망과 배신감은 대개 과도한 기대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관계를 더 성숙하게 바라볼 수 있다. 고독은 회피가 아니라 자기 확립의 과정이며, 외로움과는 다른 질감을 지닌다. 내면의 풍요를 키운 사람만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통찰은 결국 이렇게 귀결된다.


인간관계의 환상을 버리고, 고독 속에서 자기 자신을 세워라. 이것이 배신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길이다.




- 한국 정치에서 드러나는 ‘배신’의 심리


최근 한국 정치에서도 ‘배신’이라는 단어가 과도하게 사용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헌법 위반과 국정농단으로 탄핵된 것은 법적 절차를 거친 결과였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권력 행사 과정에서 국가와 국민을 실망시키는 행위를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보수 진영의 일부에서는, 당시 탄핵에 찬성하거나 비판적 태도를 보인 유승민, 한동훈 등을 ‘배신자’로 규정한다.


이 현상에는 심리적 투사와 집단 동일시라는 심리가 작동한다.


지도자 동일시: 특정 정치인을 ‘자기 집단의 상징’으로 동일시하면, 그 사람에 대한 비판을 곧 나 자신과 집단에 대한 공격으로 느낀다.


도덕적 면죄부: 지도자의 잘못 보다 ‘우리 편을 공격한 행위’를 더 큰 죄악으로 여기며, 사실·법리보다 ‘충성’이 우선된다.


배신의 프레임: 객관적 비판과 내부 견제를 ‘배신’으로 낙인찍음으로써 집단의 결속을 유지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부패를 심화시키고 자기 정화를 막는다.


이런 심리는 진영 논리와 부정한 충성 문화의 산물이다. 지도자의 잘못을 바로잡는 합법적 절차와 내부 비판은 민주주의 건강성의 핵심이지만, 이를 ‘배신’으로 보는 시각은 제왕적 권위주의 시대의 유물이다.


지나친 친절과 맹목적 충성의 함정


우리는 어려서부터 ‘착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친절이나 충성이 무조건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반복되는 호의나 맹목적 충성은 곧 권리로 오해되거나, 비판 능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친절은 그것을 알아보고 되돌려줄 줄 아는 사람에게 베풀 때 가치가 있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편’이라는 이유로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면, 지도자의 일탈과 무능이 방치되고, 그 결과 피해는 국민 전체에게 돌아온다. 이는 국가에 대한 진정한 충성이 아니라, 집단에 대한 감정적 의존에 불과하다.


배신은 먼 곳에서 오지 않는다


정치적 ‘배신’의 감정이 유독 강하게 작동하는 이유는, 같은 진영·같은 당·같은 역사적 배경 속에 있던 인물이 이탈했을 때 심리적 충격이 크기 때문이다. 이는 가족이나 오랜 친구가 등을 돌렸을 때 느끼는 배신감과 유사하다. 하지만 민주주의 체제에서 이는 정상적인 정치적 견해 차이이며, 오히려 권력 남용을 막는 안전장치다.


고슴도치 딜레마와 건강한 거리


쇼펜하우어가 자주 인용한 ‘고슴도치 딜레마’처럼, 정치와 인간관계 모두에서 중요한 것은 ‘적절한 거리’다. 절대적인 친밀감이나 무조건적 충성은 위험하고, 비판 없는 지지는 부패를 낳는다. 상호 존중과 자율성을 지키면서 필요한 때는 단호하게 거리를 두는 태도가 필요하다.


고독과 내면의 자유


고독은 회피가 아니라 자기 확립의 과정이다. 외부의 인정과 집단의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혼자서도 서 있을 수 있는 내적 힘이 필요하다. 이는 정치 참여에서도 동일하다. 집단의 열광 속에서 이성의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만이, 진영을 넘어 진실과 정의를 바라볼 수 있다.


결론 — ‘배신’이 아니라 ‘책임’이다


오늘날 우리는 국민 주권 시대에 살고 있다. 제왕과 신하의 왕권 시대가 아니다. 지도자도 국민의 한 사람이다. 따라서 진정한 배신은 지도자가 헌법과 국민을 저버리는 행위다. 권력자의 잘못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것은 ‘배신’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충성이며,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다.


보수 일부가 유승민, 한동훈을 ‘배신자’로 보는 심리는, 집단 동일시와 맹목적 충성의 부작용이다. 그러나 민주사회에서 이런 인식은 잘못된 것이며, 오히려 내부의 비판자와 견제자를 존중할 때 진영의 건강성이 유지된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인간 본성의 이기심을 인정하되, 정치에서는 그 이기심을 제어하고, 개인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 전체의 이익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배신’이라는 단어가 감정적 낙인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는 정의의 언어로 사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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