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하다, 허무하다! 모든 것은 언젠가 사라질 뿐이다.”
인간은 태어나 죽음으로 귀결되는 존재다. 설령 우리의 이름이나 업적이 한때 세상을 울리고 뒤흔들었다 해도, 결국은 시간 속으로 흩어진다. 한 세대가 가면 또 다른 세대가 오고, 대지는 여전히 덤덤히 그 자리에 남는다. 영광과 수치, 사랑과 미움조차도 역사의 어느 지점에서 묻혀 버린다. 아무리 빛나는 순간을 살아냈다 해도 결국은 흙먼지로 돌아간다는 자각은, 오래도록 기독교 전통 속에서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라는 성찰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기독교적 시선은 단순히 “모든 것이 헛되다”는 선언에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허무의 직시를 통해 인간에게 더 귀중한 삶의 태도를 촉구한다. 16세기 이후 유럽 화단을 지배했던 바니타스(vanitas) 회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화면 가득히 꽃, 금화, 술병, 월계관, 현악기 같은 세속적 쾌락의 상징들이 늘어놓여 있지만, 구석에는 반드시 두개골이나 모래시계가 등장한다. 그것은 결국 영광과 즐거움이 얼마나 빠르게 사라지는지를 일깨우며, 모든 인간이 죽음 앞에 겸손해야 함을 역설한다. 하지만 그 메시지는 절망이 아니라 초대다. 지나친 허영과 탐욕을 내려놓고 사랑, 겸손, 선, 신실과 같은 영원에 가까운 가치에 마음을 기울이라는 초대 말이다.
죽음을 묵상하는 태도는 18세기 영국의 ‘묘지파(Graveyard Poets)’에게도 이어졌다. 에드워드 영은 《밤 생각》(1742)에서 왕좌를 탐했던 자도 결국은 무덤 속 “여기 그가 누워 있다”는 비문으로 끝난다고 노래했다. 로버트 블레어의 《무덤》(1743) 역시 교만한 인간이 무덤 앞에서 철저히 평등해지는 모습을 그렸다. 토머스 그레이의 《시골 묘지의 비가》(1751)는 더 나아가 사회적 지위를 얻지 못한 평범한 자들의 삶을 오히려 따뜻하게 기린다. 성공하지 못해 좌절한 이들에게, ‘결국 모두가 같은 종착점에 이른다’는 인식은 위안이자 일종의 ‘조용한 해방’이었다.
화가들 또한 폐허가 지닌 상징성에 매혹되었다. 18세기 프랑스 화가 위베르 로베르는 화려한 건축물조차 무너져 황량한 폐허가 되는 장면을 즐겨 그려 ‘폐허의 로베르’라는 별명을 얻었다. 영국 화가 조지프 갠디는 잉글랜드 은행이 무너진 모습을 그려, 경제적 권력이 얼마나 덧없는가를 드러냈다. 19세기 귀스타프 도레가 상상한 ‘폐허가 된 런던’은 마치 고대 로마의 몰락을 연상케 했다. 스탕달이 “콜로세움의 폐허가 오히려 완성된 것보다 아름답다”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폐허는 권력과 문명의 절정을 보여주기보다, 오히려 그것들이 반드시 무너진다는 필연을 가장 아름답게 증명한다.
퍼시 셸리의 시 〈오지만디아스〉(1818)는 이 사유를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내 이름은 오지만디아스, 왕 중의 왕이라!”라는 당당한 비문은 황량한 모래벌판에 흩어진 석상 파편으로 무력화된다. 시간은 인간의 위업을 모래처럼 흩뜨려 놓는다. 이처럼 폐허는 인간의 교만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오히려 자유로워지게 한다.
허무의 직시는 단순한 체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집착해 온 성공과 명예, 비교와 경쟁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사유다. “나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라는 인식은 처음에는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만, 결국 마음을 가볍게 한다. 완벽을 이루지 못해도, 위대한 흔적을 남기지 못해도,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무너질 성이라면, 그 속에서 불필요한 집착을 버리고 진정 가치 있는 것에 눈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동양의 허무, 무상의 지혜
이러한 통찰은 서구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동양 사상에서도 오래전부터 무상(無常)과 허무의 자각은 중요한 철학적 주제였다. 불교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선언한다.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 따라 사라진다. 집착할수록 고통은 깊어지고, 무상함을 받아들일수록 자유와 평온이 다가온다. 도가(道家)의 철학 또한 ‘허無’를 강조했다. 노자는 “가득 차면 기울고, 날카로우면 무뎌진다”라 하며, 모든 존재가 흘러가는 도(道) 앞에서 집착을 내려놓을 것을 권한다.
이처럼 동서양은 서로 다른 전통 속에서도 동일한 깨달음에 닿는다. 인간이 붙잡으려 하는 모든 권력, 부, 명예, 심지어 생명조차도 결국은 허망하게 흩어진다. 그러나 그 허무를 직시할 때, 우리는 오히려 더 크게 자유로워진다.
한국 사회를 향한 성찰
오늘의 한국 사회는 치열한 경쟁과 과도한 자기 증명 욕구 속에서 불안을 키우고 있다. 학교 교육에서 조차 경쟁을 가르치는데 협력은 가르치지는 않는다. 직장, 재산, 명예, 자녀 교육 등에서 뒤처지는 순간 곧 ‘실패자’로 낙인찍힐 것 같은 두려움이 사람들을 압박한다. 그러나 역사와 예술, 철학이 반복해서 들려주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곧 무너질 것을 위해 너무 애쓰지 마라.”
이 통찰은 허무주의가 아니라 삶의 본질을 회복하는 철학적 겸손이다.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우리라면, 지금 이 순간 사랑할 사람을 더 사랑하고, 선을 실천하며, 작은 기쁨을 누리는 것이 훨씬 더 진실한 삶이다.
코미디언 출신 작가 고명환 씨가 최근 모 방송에 나와, 20여 년 전 매니저의 졸음운전 실수에 의한 교통사고로 의사가 곧 죽는다고 유언부터 남기라고 해서 이제 죽는구나 하고 현실을 직시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자신이 너무 미래를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지금 자신의 내면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살아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번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크게 후회했다고 합니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그는 코미디언이 아닌 요식업 CEO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저명한 강연자로 현재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돈만보며 살아왔던 과거로부터 자신과 자유를 찾은 것입니다.
맺음말
죽음과 허무, 그리고 폐허는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대신, 삶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하게 한다. 바니타스 회화가 그러했고, 묘지파 시인이 그러했으며, 폐허의 화가와 셸리가 그러했다. 불교와 도가 또한 같은 지혜를 속삭인다.
결국 허무의 자각은 패배가 아니라 자유다. 그것은 우리가 집착하던 허상의 무게를 벗겨 내고, 삶의 가장 중요한 질문 앞에 서게 만든다.
“나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