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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혐오와 국가 정체성

열린 사회는 어떻게 스스로를 지킬 것인가

by 엠에스

<외국인 혐오와 국가 정체성>

— 열린 사회는 어떻게 스스로를 지킬 것인가


시대의 불안, 정체성의 혼란


최근 여의도 한강변에서 중국 인민해방군 복장과 붉은 깃발을 든 이들이 행진하는 장면이 공개되었을 때, 많은 국민은 한순간 ‘여기가 과연 대한민국인가’ 하는 충격을 받았다. 이는 단순한 퍼포먼스의 차원을 넘어, 우리가 무심히 지나쳐온 ‘국가 정체성’과 ‘주권의 실감’을 되묻는 사건이었다.


바로 그 직후 국회에서는 양부남 의원 등 11명이 ‘외국인 혐오 발언 처벌법’을 발의하였다. 한쪽에서는 혐오와 차별을 금지하자고 외치고, 다른 한쪽에서는 외국의 상징이 공공장소를 점령하는 듯한 장면에 불안을 느낀다. 이 두 장면은 서로 다른 듯하지만, 사실은 하나의 질문에 닿아 있다.


“열린 사회는 어디까지 개방할 수 있으며, 어떻게 자신을 지킬 것인가?”


중국의 인구정치, ‘무혈 점령’의 시대


중국은 전통적으로 영토 확장에 군사력만을 사용하지 않았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그들은 ‘인구 이동’과 ‘정치적 통합’을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지배 방식을 발전시켜 왔다.


홍콩에서는 대규모 본토 인구의 이주를 통해 선거제도와 지역 정서를 바꾸었고, 신장(新疆)에서는 산업정책과 이주 정책을 결합해 소수민족의 자치 기반을 사실상 무너뜨렸다. 이 과정에서 무력이 아닌 ‘투표’와 ‘경제력’이 동원되었다.


중국 내외 연구자들은 이를 ‘인구정치’라 부른다. 즉, 군사 대신 인구와 자본, 여론과 제도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전략이다.


이러한 전략은 단지 내부 문제가 아니라, 이미 국제적 현상이 되었다. 미국과 호주, 유럽 여러 나라들은 ‘통일전선(United Front)’이라는 이름의 해외 네트워크를 통해 중국 정부가 우호세력을 만들고 여론을 조작한다는 보고서를 내놓고 있다. 표면상으로는 문화 교류나 경제협력이지만, 그 속에는 정치적 연계와 영향력이 얽혀 있다. 강제의 시대가 끝나자, 설득과 침투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한국의 취약한 구조


한국은 외국인 영주권자에게 3년이 지나면 지방선거 투표권을 부여하고 있다. 이는 국제적으로도 드문 제도이며, 민주주의의 개방성을 상징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가 정체성과 정치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가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다. 특정 국적의 장기거주자들이 특정 지역에 집중될 경우, 그들의 표가 지역 정책과 인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부동산 취득이나 기업 설립에도 큰 제약이 없어 경제적 영향력까지 누적될 수 있다.


물론 이는 불법이 아니라 제도의 결과다. 그러나 문제는, 제도가 만들어진 당시와 지금의 세계 환경이 다르다는 점이다. 세계는 이미 ‘인구 이동을 통한 정치 확장’이라는 새로운 현실을 맞고 있다. 과거의 개방이 지금의 허점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혐오와 경계의 경계선


그렇다고 외국인을 향한 배타적 감정이나 혐오로 흐르는 것은 더 위험하다. 혐오는 언제나 이성보다 먼저 폭발한다. 어느 사회든 두려움이 커질수록 혐오는 정치의 언어가 되기 쉽다. ‘그들’에 대한 불안이 커질수록 ‘우리’의 자유가 축소된다. 따라서 혐오를 처벌하는 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에도 일정한 타당성이 있다. 문제는 그것이 어디까지를 ‘혐오’로 보고, 어디부터는 ‘정당한 비판’으로 인정할 것인가의 경계다.


열린 사회가 스스로를 지키려면, 단지 금지와 처벌로는 충분하지 않다. 법은 최소한의 울타리일 뿐, 진정한 방어는 시민의 판단력과 국가의 투명성에서 나온다. 정부가 외국인 유입 현황과 선거 참여 현황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정치자금과 단체 활동을 엄정히 감시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지를 두려움으로, 두려움을 혐오로 바꾸지 않기 위해서다.


자유와 안보의 균형


민주주의의 진정한 시험대는 외부의 침입이 아니라 내부의 균형에 있다. 자유를 지키려다 안보를 잃을 수도 있고, 안보를 강화하다 자유를 포기할 수도 있다. 오늘날의 한국은 그 두 끝점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 위에 서 있다.


우리는 이미 경험했다.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는 사회는 결국 권력이 사유화되고, 외부의 영향에 무방비한 사회는 결국 주권이 흐려진다는 것을. 그러므로 우리가 찾아야 할 해답은 ‘닫힌 국경’이 아니라, 투명한 제도와 성숙한 시민의식이다. 열린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깨어 있는 시민이 가장 강한 방패다.


국민의 성찰 —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지금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외국인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판단력을 잃고, 감정이 이성을 압도하는 순간이다. 이성의 자리를 선동이 차지할 때, 민주주의는 스스로 무너진다.


시민 각자는 혐오의 언어 대신 사실을 확인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이웃의 국적보다 그가 지닌 인간적 존엄을 먼저 봐야 한다. 동시에, 우리 사회가 누군가의 전략적 침투에 이용되지 않도록 냉정한 눈을 유지해야 한다.


관용은 무지의 다른 이름이 되어선 안 되고, 경계는 혐오의 다른 얼굴이 되어선 안 된다.


결론 — 열린 사회의 방어선


중국의 인구정치 전략은 단지 하나의 국가 전략이 아니라, 21세기 ‘비군사적 패권’의 전형이다. 그 영향은 경제·문화·선거·여론을 가로질러 작동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아직 미숙하다. 법은 느리고, 사회의 감정은 빠르다.


이럴 때일수록 필요한 것은 균형감각이다. 외국인 혐오를 법으로만 다스릴 수도, 중국의 전략을 감정으로만 대응할 수도 없다. 국가의 주권을 지키는 일은 군대의 일이 아니라, 시민의 일상적 선택과 판단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판단의 힘은 오직 성찰에서 비롯된다.


‘열린 사회’란 문을 잠그지 않은 사회가 아니라,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 스스로 감시할 수 있는 성숙한 사회를 뜻한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과제는, 바로 그 문을 지키는 시민의 지혜를 되살리는 일이다.


결어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곧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같다. 지금 이 순간, 한강변의 붉은 깃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의 마음속 깃발이 어떤 색으로 흔들리고 있는가이다. 두려움의 붉은 깃발을 내리고, 이성의 푸른 깃발을 세우는 것 —그것이 열린 사회의 진짜 용기이며, 대한민국이 지켜야 할 품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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