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결국 내 책임이다
어릴 때 나이 든 사람들 보면 ‘다 늙어 가지고 무슨 재미로 살아갈까?’라고 생각했었다. 표정 없이 지친 얼굴에 깊게 파인 주름이 고된 세월과 그들의 시름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이다.
그런데 어느새 나도 그만큼 나이를 먹어 버렸다. 몸과 마음 구석구석 세월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다행히 어릴 때 품었던 그 두려움은 없다. 요즈음 산다는 게 나름 재미있고 여전히 새로운 일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물론 쭈글쭈글한 피부, 망가진 몸매, 듬성듬성한 머리숱 등 “젊은이들의 세상에 이민 온 이방인”이 되어 버린 쓸쓸한 측면이 없지는 않지만 젊은 시절의 방황이나 예민함, 열정이 가져다주는 고통을 또다시 겪지 않아도 되는 지금의 내가 좋다.
10대를 거쳐 이미 한국 나이 70대에 접어든 지금까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것들을 거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좀 단단해진 나 자신이 좋고,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지고, 웬만한 일들은 수용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기고, 어떻게 살아야 행복하고,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세월이 나에게 선물로 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이 든 사람들이 “요즘 젊은이들은 어른 대접을 할 줄 몰라”하고 불평을 한다. 하지만 살아온 것에 대해 대접받기만 원한다면 스스로 해야 할 일, 스스로의 삶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
교육학자 버틀러는 "아무리 노인이라도 도덕적 잘못이나 행동까지 너그럽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라고 지적한다. 노인도 탐욕스러울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 노인이라고 면죄부를 주는 것은 오히려 노인의 인간성을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가만히 둘러보면 유명한 사람이 아니어도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철학자 플라톤이 말했다. “늙음에 만족할 때 늙음을 지탱할 수 있지만 늙음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늙음 자체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된다. 이것은 젊음에게도 해당이 된다”. 나이에 관계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상실을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개방적이고 융통성이 있다면 늙는다는 게 그리 두려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이에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나 이외의 타인에게도 관심을 갖는 것이며 다른 사람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이며 비록 내가 살 세상은 아니지만 다음 세대를 위하여 미래에 투자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정신적, 물질적으로 유산을 남기려고 하는 노력이 바로 나이 든 사람들에게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 또 지나간 과거에 대한 강박적 집착을 없애고 현재에 충실하며 감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게 된다.
‘내 인생은 결국 내 책임’이라는 사실 하나만 명심하자.
나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다. 통찰의 지혜와 여유로 그 시간 동안 조금 더 현재에 충실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자. 여전히 처음 겪어보는 나의 미래가 기대된다.
아자 아자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