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각류 인간

25.01.05 ~ 26.01.27

by 조앤



약점을 공유한 사이만큼 치열한 관계는 없다.


-25.10.12 (갑각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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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론자의 사랑은 그 신념만큼이나 다정한 것이었다. 사랑을 주고받는 것 중 기꺼이 사랑을 주고, 그 사랑에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왜’라는 물음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주기만 하는 것이 그들의 사랑 방정식이었다. 조건 없는 사랑, 이유를 묻지 않는 사랑. 그런 사랑을 품을 수 있는 건 세상에 몇 안 되는 운명론자뿐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너를 포기한다는 건 사랑한다는 의미였다.


-25.01.05 (사랑 운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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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비도 다 같이 맞아주겠다는 사람이 있었다. 비가 오는 그날 밤 우산 하나 없이 내가 있는 곳으로 뛰어온 사람이었다. 내 귀를 막으며, 내 눈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괜찮아.' 그것이 무슨 주문이라도 되듯, 이 세상을 고쳐줄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듯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


먼 훗날, 나를 기꺼이 빗속으로 손을 잡고 달렸던 그와 이별하고 나서 깨달았다. 아, 나는 우산이 필요했던 거구나. 함께 비를 맞을 사람이 아닌 우산을 씌워 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구나. 비에 맞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게 아닌, 그 비를 감사 안아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구나. 소리 지르지 않는다. 귀를 막지도 않는다. 괜찮다는 주문을 외우지도 않는다. 그저 곁에서, 조용히 속삭일 뿐이었다. 돌아가자고.


-25.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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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세상 따위에 당신 양보하지 마.

내가 필요한 건 세상이 아니라 당신이니까.


우리는 종종 세상을 너무 거대한 거라고 생각해. 강대하고 완전무결한 그런 거라고. 그렇지만 사실 세상만큼 작은 건 또 없어. 고작 세상이 어떻게 우리를 이기겠어. 완벽하지만 단순한 것들은 말이야 복잡하고 작은 것들을 이길 수 없어.


-25.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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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지구의 절망을 상상했다. 그것은 광대한 파도가 넘실거리고 새하얀 구름이 떼 지어 세상을 나르는 것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때리고 뜨거운 태양이 숨지 않는 그곳에서 사람들은 아무런 추위도 배고픔도 느낄 수 없었다. 일말의 애정도, 온기도 도달하지 못하는 그곳에서 남겨진 이들은 각자의 절망을 떠올렸다. 구원 없는 세상에서 구원을 바라는 것처럼, 절망뿐인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절망을 바라지 않았다. 당장 절망을 떠올리는 와중에도 자꾸만 두려움에 머뭇거렸다. 그런 이질적인 고집 속에서 우리는 남몰래 지구의 절망을 꿈꿨다.


-25.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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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왜 금방이라도 사랑을 말할 것 같은 얼굴을 짓고, 당장이라도 이별을 고하려 굴며, 그 많은 굴곡에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지


-2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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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을 사랑하고 평생을 미워할 사람. 그리고 그게 잘 안되어서 가끔 그리워할 사람. 그랬던 사람이 있었다.


-25.02.12 (그랬던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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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모래를 삼키고, 모래는 바다를 머금는다. 고래는 가라앉고 아귀는 떠오른다. 하늘은 고요하고 파도는 찰박 소리를 낸다. 발을 간지럽히는 파도와 우리를 아프게만 하는 바람 사이에서 우리는 길을 잃었다. 태초인지 끝인지 알 수 없는 그 경계에서 감히 한 걸음을 내었다.


-25.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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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후기부터 작성되었습니다.

무엇하나 출발하지 않았지만, 어떤 것도 이곳에 남지 않았죠.

어쩌면 시작보다 끝에 가까운 글이라도 볼 수 있겠군요.



“더는 괜찮아졌다는 말이 더는 거짓이 아닐 때, 습관적으로 자기를 다독이지 않을 때 우리 그때쯤 만나자. 딱 사람으로서 사랑할 수 있을 때 만나서, 다시 사랑을 하자.”


-25.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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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정체되고 싶다. 잔류하고 싶다. 파도가 떠밀듯 무언가가 나를 떠밀어 주었으면 한다. 그럼 그곳에 기꺼이 표류할 텐데. 며칠 전, 아진(가명)이가 말했다. '넌 당연히 글 쓰고 살 줄 알았는데.' 그러게. 나도 그럴 거라고 믿었다. 나는 분명 글을 쓰며 살아갈 것이라고.


-25.02.20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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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먼지 쌓인 외투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귀걸이 한 짝과 겨울날 사 먹었던 붕어빵 봉투, 찢어지고 해진 영수증 따위의 한낱 추억이 고집스럽게 모습을 나타냈다. 소중한 건지, 그렇지 않은 건지 자신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잠깐의 고민 끝에 부러 몇 자 적히지 않은 편지 한 장을 선별했다. 소중하든, 그렇지 않든 이 행위는 그저 손때가 가득 묻어 이미 보기 좋은 상태라 할 수 없는 종이에 약간의 흙을 담는 것뿐이었다. 괜한 죄책감이 앞서기 전에 서둘러 종이를 발에 대었다. 까슬까슬한 종이가 발가락 구석구석을 옮겨 다닌다. 종이 한 장으로는 다 털어낼 수 없어 다른 종이 한 장을 더 찾아 발을 닦았다.

손의 힘을 따라 구석구석을 비벼댔던 종이는 그 모양에 따라 곡선을 만들어냈다. 소중히 읽히고, 얌전히 보관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성되었을 편지는 한순간에 넝마가 되었다. 타인의 마음을 짓밟는 고약한 취미 따위 존재할 리 없기에 너덜거리는 편지를 보는 건 영 마음이 불편했다. 작약꽃을 짓밟았던 일보다 더욱 마음이 아려왔다. 웃긴 일이다. 생명을 짓밟는 것보다 마음 아픈 일이 존재하는 게 우스웠다. 차라리 영수증이 나오길 바랐다. 붕어빵 봉투가 나오길 바랐다. 아니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뒤늦게 그러길 바랐다.


-25.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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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린 살을 뜯다 피가 몽글몽글 맺혔다. 동그랗고 구슬 같은 게 맹랑한 색을 띠었다. 맺힌 구슬을 바라보다 숨이 턱 하고 막혔다. 흐르지 않고 얌전히 고여있는 피를 편지 귀퉁이로 닦아냈다. 붉은 봉투에 스며든 피는 홀로 갈색 얼룩 자국을 남겼다. 솜사탕도 피도 모두 몽글몽글이란다. 둥그런 발음이 둥그런 것들을 불렀다. 마음이 몽글몽글했다. 둥그렇지도 않았는데도 자기를 몽글몽글이라 불렀다.


-25.03.01 (몽글몽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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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나를 모르는 너와 대화를 하고 싶을 때가 있어

이름도 얼굴도 목소리도 아무것도 모르던 상태의 우리에게 되돌아가고 싶어.

나에 대해 그 무엇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가끔 씩 나를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어.

익명이란 이름 뒤에 숨어 오랜 친구 같은 편지를 쓰고 싶어


-25.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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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지구의 종말이 찾아온다면 눈이 내린 하루면 좋겠다. 방대한 눈이 주는 새하얀 공포와 압박은 어딘가 아름답고 따뜻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눈이 내린다. 새하얀 것이 새하얗지 못한 것들 위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그들의 의지로 내려앉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세상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고한다. 참 우스운 관계다. 누구도 바라지 않았지만 가장 뜨겁게 달아오른다.

눈이 내린다. 하필이면 봄에 눈이 내린다. 뒤늦은 생일 선물이구나. 그렇구나.

이기적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25.03.18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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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굳은살이 박였다.

너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25.03.25 (심장에 굳은살이 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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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이란, 그 자체로 외롭고 사랑스러운 것이겠지요. 그리움과 원망으로 점철된 한낱 추억이 자꾸만 저를 붙잡는 거겠죠. 세상에 있는 다양한 사랑 중에서 우정이란 이름을 빌려 그 아이를 사랑했습니다. 한때 세상을 나눠 가졌던 그 사람이 여전히 보고 싶네요. 더 이상 안부를 물을 수 없다는 게 자꾸만 저를 무너뜨리네요. 상처가 많았던 사람이라, 더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잘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더는 아프지 않고 행복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25.03.31 (죽지 않은 연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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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우리는 왜 살아야 할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죽음과 삶을 반복해 온 그에게 우리가 질문해야 할 건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특히나, 미지의 행성에서 정착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죽음에 대한 감상이 아니다. 삶을 살아갈 용기, 의지 혹은 삶의 가치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답이다. ‘살아가자.’ 아니. 삶은 아름답지 않다. 그럼에도 아주 조금은 괜찮은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5.03.21 (미키17 산다는 건 어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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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이란, 손가락을 짓누르는 연필과 같다. 칼처럼 무언가를 베어내지도, 불처럼 지지도 않고 부대낄 뿐이지만 떠난 자리에 딱딱한 굳은살을 남겨둔다. 남겨진 그것은 찌르릇 아프기도 하고, 어느 날은 모양만 툭 튀어나올 뿐 아무렇지 않을 때가 있다.


-25.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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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야마토 모토이는 소금이 우리에게 필수적이듯 그리움과 슬픔 또한 그렇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슬픔을 가능한 한 빨리 잊기를 바라고, 사람들은 살아가지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억지로 슬픔을 잊는다. 우리는 정성을 들여 슬픔을 받아들이는 법을 알지 못한다.


정성이 소중한 건, 슬픔이 아픈 건 모두 그 흐름이 느리기 때문이다. 앞서 흘러간 시간을 따라잡기에는 슬픔은 한 없이 더디다. 그럼에도 우리는 슬픔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렇게 착실히 그리워해야 한다.


-25.03.28 (日, 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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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다 문득, 날씨가 좋다는 얘기를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어. 하늘은 뿌옇고 바람이 좀 찬 날이었는데도 나는 멋대로 날씨가 좋다고 적고 있더라. 굳이 지우지는 않았어. 어차피 미래의 나는 그날의 날씨를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그냥 미래의 내가 그렇게 믿었으면 좋겠더라. 아, 이 날은 날씨가 좋았구나. 그 고운 날씨가 그때의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구나. 지금의 내가 미래의 행복을 꿈꾸듯, 미래의 나도 지금의 내가 행복하길 바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차마 지울 수가 없었어. 나는 내가 행복하길 바라니까.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온갖 부정적인 것들과 온갖 긍정적인 것들 속에서 살아가. 울지 못하는 날에는 글을 쓰고, 울고 싶은 날에는 내가 남긴 글을 지워. 그리고 몇 번이고 되뇌어. 내일은 반드시 행복해질 거라고. 수천번을 떠올려. 내일의 나는 얼마나 행복할까. 막연한 기대와 막연한 두려움 그리고 명확한 설렘 속에서 그 행복을 기다려.


-25.04.02 (Yo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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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용서힐 수 있는 날이었기에,

사소한 거에 아픈 하루였다.


일기를 쓰는 내가 신기하단 사람들을 만났다.

나는 내게 미안해서 글을 썼다.


-25.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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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호에 있어 한 가지 특이한 건 나는 천둥소리가 두려웠던 게 아니라 빗소리고 두려웠다는 것이다. 하늘을 가르는 번 개와 삶을 뒤흔드는 천둥보다도 막막히 쏟아지는 빗소리를 더 두려워했다. 한때 나조차도 내가 천둥소리를 두려워한다 고 착각했을 무렵을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천둥보다 빗소리 가 더 꺼림칙하다. 꼭 바다에 빠진 기분이라고, 익사할 것만 같은 기분이라고 수도 없이 말하고 다녔었다. 실내에 있어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소리로부터 마땅히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없기에 나는 내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창문을 잠그고, 귀에 이어폰을 꽂으며 최대한 그 소리에게서 멀어지고자 했다.


-25.04.06 (파도와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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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인생을 들춘다는 것만큼 무례한 일은 없을 것이다. 관심과 애정이란 거짓말로 현혹시켜 타인의 마음과 삶을 갈취한다. 그어 놓은 선을 훌쩍훌쩍 뛰어넘는다는 건 눈치가 없거나, 눈치가 없는 척하는 것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타인의 삶을 훔치고 싶어 한다. 사랑이란 명목 하에 그들의 삶을 낱낱이 파고들고 싶어 한다. 너의 세상은 어떤지, 너의 삶은 어땠는지. 너의 꿈은 무엇이었는지. 너는 무얼 위해 살아가는지. 그리고 너는 나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사람은 그러한 것들을 궁금해한다. 그래. 우리는 종종 타인의 삶을 훔치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굴었다. 마치 타인의 삶조차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우리는 '너'의 삶을 꿈꾼다.


-25.04.13 (책 <마음>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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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마음속에는 괴물이 살아.

추악하지 않은 괴물에 늘 괴로워해.


-25.05.08 (영화 <괴물>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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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떤 행복에 웃고 어느 슬픔에 우는지가 궁금해.

우리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랑을 하고 똑 닮은 크기의 꿈을 꿔.


-25.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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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 때 떠오르는 사람이 넌데, 이거 보복심리인 걸까.


-25.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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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모든 문제는 자기혐오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25.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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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좋아

시간을 돌려 그곳으로 향할까

너와 내가 처음 만났던 그때로 달릴까

그렇게 멋대로 항해할까


너는 책을 읽고 있었고

그 옆의 나는 글을 쓰고 있었지

서로를 흘깃흘깃 곁눈질로 바라보던 우리는

서로의 시선을 애써 모른 채 했었지


그래 좋아

시간을 돌려 그곳으로 향할까

너와 나의 마지막 인사를 고하러 걸을까

그렇게 멋대로 정착할까


너는 소원을 빌었고

그 옆의 나는 희망을 품었지

끝끝내 서로를 마주 보고 서있던 우리는

감히 서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지


-25.06.01 (Time Mach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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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투른 사람만이 수줍음 많은 소년의 꿈을 응원하는 법을 알고 투박한 사람만이 소녀의 설익은 희망을 믿었다.


-2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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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나우어에게 데미안은 자신을 구원해 주리라 믿었던 동경이었으며, 반대로 싱클레어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상대였으리란 생각이 든다. 싱클레어가 자신을 구원해 주리라는 믿음보다 사랑하니까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한 것 같다고 할까. 같은 스승 밑에서 배웠다는 동질감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스승과의 이별은 성장을 위한 길이라고 치부했다면 싱클레어는 자신이 처음 품은 사랑이었으니까 지켜주고 싶은 존재였던 거였겠지.


자신이 싱클레어를 사랑했듯이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사랑했으니까

마찬가지로 지켜주고 싶었던 거 아닐까

싱클레어가 숨 죽게 품은 ‘데미안’이라는 사랑을.


만약 크나우어가 죽지 않았다면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그리워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

그냥 증오만 남았겠지

근데, 크나우어가 죽었으니까

정말 죽어버렸으니까

이제 더는 닿을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갔으니까

마지막으로 그가 사랑한 인간을 한 번 더

사랑해 보자고 믿어본 건 아닐까

결국 크나우어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데미안을 떠올려야 하니까


-25.07.11 (뮤지컬 <헤르츠클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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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왜 이견이 필요한가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다수의 동조는 때로 집단을 안락하고 효율적으로 만들지만, 동시에 획일적인 사고와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정보의 흐름을 막고,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키며, 궁극적으로는 퇴보를 가져올 수 있다. 반면 소수의 이견은 집단에 활력을 불어넣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며, 잠재된 문제점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이견은 비판적 사고의 결과물이며, 혁신과 발전의 씨앗이다. 이견을 존중하고 경청하는 사회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개선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 물론 모든 이견이 옳은 것은 아니며, 무분별한 반대는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건설적인 이견을 분별하고,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더 나은 결론에 도달하려는 노력이다. 궁극적으로 이견은 사회가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유동하며 진보하도록 돕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25.07.28 (책 <세상에는 왜 이견이 필요한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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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언제쯤 나를 돌아볼지 궁금했다. 발그레한 뺨과 부드러운 눈썹 위로 떨어진 머리카락은 내가 너를 쫓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턱을 괸 너를 사랑했다. 나는 사랑에 빠진 너를 동경했다. 차마 숨기지 못한 너의 사랑이 부러웠다. 너를 사랑하지 않는 그는 무엇을 사랑했던가. 그는 6살 강아지를 아꼈고 낡아 빠진 담요에 밤잠을 설쳤다. 부드럽게 쏟아지는 햇살에 웃었고, 녹빛 잔디에 몇 번이고 손을 문질렀다. 양말을 벗고 모래사장을 거닐었으며 바닷물에 푹 젖은 신발을 신고 회색 길가에 발자국을 남겼다. 손으로 비와 해를 가리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자주 손바닥을 펼쳤고 우산과 양산 사이를 피해 질주했다.


-25.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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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철이 들지 못했다.

머리기 희끗한 노인이 되어도,

또래가 전쟁터에서 사망할 무렵에도,

그날 분수대를 몰래 훔쳐보던 시절에도

그녀는 철이 들지 못했다.


오만한 몽상가.

자신을 보호하고 위로하는 데 전념하는 소설가.


-25.08.15 (책 <속죄>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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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란 무엇일까. 희령은 오래 생각했다.


이름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이름은 습관이었다. 누군가가 무심히 뱉어낸 단어가 시간이 쌓여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인생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이름을 부르며 타인의 존재를 붙잡는다. 그리고 그 이름을 반복할수록 그 존재는 더 깊이 각인된다. 이름이란 결국 습관화된 애정이었다.



“그냥 평범하게 너를 미워할 수 있으면 좋겠어.”


-25.08.25 (희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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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장이 가득한 책 속에서

희릿하지만 마음에 꽂히는 문장이 있다.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나만의 문장이.

누군가는 흘깃 지나가는 오직 나만이 멈춘 문장


-25.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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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래와 바다의 경계에 서서

나의 발가락이 이끄는 대로 몸을 흔든다.

어느 쪽으로도 발걸음을 옮길 수 있지만

구태여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25.08.30 (책 <면도날>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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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구역질 난다는 것, 하수구 같은 사랑에 실망한다는 것.

모두 네가 고작 그 정도의 사람이란 걸 증명하는 거야.


-25.09.11 (책 <얼룩진 여름>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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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꼭 내가 당신을 신뢰하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어. 그것이 당신 스스로를 자책하는 탓인지 아니면 나를 혐오했던 과거의 증거인지는 알 수 없었지. 언젠가 당신이 그랬지? 신뢰와 의지는 다른 거라고. 의지는 해도 신뢰는 하지 말라고.



종이와 연필을 품고 다니는 버릇을 들이려고 해. 오늘처럼 문득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싶을지도 모르니까. 스마트폰 세상은 모든 것이 간편하고 쉬워서 이 마음조차 축소되는 것 같아. 그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억울해서 일부러 스마트폰을 멀리하는 거 있지?


-25.09.12 (수취인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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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당신은 끝내 나를 사랑하지 못했을 거야. 당신은 이미 내게 이 얼굴을 주었고 훔친 이름을 내게 붙였지. 당신과 나는 서로 사랑하지 못했을 거야. 그래. 그것이 당신과 내게 내려진 저주겠지. 당신은 그 무엇도 사랑하지 못하고 나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사랑받지 못할 거야. 다름 아닌 우리가 그걸 선택했으니까.


창조주여, 나의 창조주여.


우린 어찌 이 세상에 함께 버려졌나.

우린 어째서 서로를 버리지 못하나.


-25.10.01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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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다리를 지나며 보는 한강은 심해를 닮아 두렵지만 때로는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25.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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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이별이 그러하듯 나의 이별 또한 그럴 줄 알았다. 정확히 무엇이 다른지 알 수는 없어도, 이 이별이 내가 꿈꿔온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만이 확실했다.


-25.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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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보다 혐오가 낫죠. 증오는 사람이 품기에 너무 다정하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혐오가 더 친절한 것 같아요. 실망도 없고 그리움도 없고 오로지 사라져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훨씬 품기에는 적절하잖아요."


“증오하는 사람을 절대로 잊지 않는 방법은요, 그 사람의 것을 훔쳐 오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내 일부로 여기는 거죠.”


-25.11.14 (이름의 어원)



*



그녀는 사소한 규칙에 행복을 느꼈다. 월요일이면 머리를 빗어 하나로 묶어 올리고 자기 직전까지 머리를 풀지 않았다. 목요일이 되는 새벽 12시에는 따뜻한 우유를 마시는 의식을 치렀고 이를 단밤이라 불렀다. 또 매달의 셋째 주 토요일이면 기차를 타고 바다를 보러 떠났고, 그 지역의 간식거리를 사 와 주위에 나눠 주는 식이었다.


-25.11.20



*



그럼에도 당신은 끝내 나를 사랑하지 못할 거야


당신은 그 무엇도 사랑하지 못하고

나는 당신을 잃어만 가겠지

그것이 우리의 사랑이라 마음을 토닥이겠지

그러니 떠나가는 나의 마음이여

나를 안아주는 육신이여

저 멀리, 아주 멀리 날아가길


그럼에도 나는 끝내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은 그 무엇도 놓지 못하겠지

그것이 우리의 이별이라 마음을 보내주겠지


-25.11.02 (떠나가는 마음에게)



*



어린 왕자처럼 살자. 평생 순수하게 삶을 사랑하면서 사는 거야. 졸업 이후의 삶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외롭고 힘들겠지만 우리는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상처받는다는 건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잖아. 그러니까 그 특권에 따라 무언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아가길 바랄게. 너희는 분명 너희만의 장미꽃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졸업 진심으로 축하하고 12년 동안 정말 수고 많았어.


-25.12.01



*



나의 불행을 바라는 사람과 함께 하는 삶


밤마다 나는 맥을 짚고

낮이면 그 애는 칼을 쥐고 망설인다

서로가 몰래 행하는 그 행위를

우리는 모르는 체 지나간다


나의 죽음을 바라는 사람과의 삶은

그렇게 흘러간다


-25.12.05



*



A. 옛날 예

B. ? 아주 먼 옛날에 고라니가 살았어요?

C. 고라니는 인간세상이 궁금해 마을에 가보 기로 했다

D. 비록 인간들은 그를 혐오할지라도 그는 자신의 고향을 파괴한 이들을 용서하기로 했다.



D. 여름의 첫사랑은 무더위였다.

C. 무더위가 가시자 첫사랑도 홀연히 사라졌다.

B. 그랬는데 복제인간 어쩌구로 다시 부활함

A. 난 알고 보니 인간이



C. 소녀는 오빠의 친구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했다.

D. 불도저 같은 소녀는 첫눈에 반한 그날 소년을 붙잡고 입을 부딪혔다. 소녀의 첫 키스였다.

A. 어머 어머

B. 못 볼 꼴을 봤다 그래서 난 그냥 튐


-25.12.26 (친구들과 소설 이어 쓰기 절망 편)



*



편지의 서문입니다.

당신의 삶은 좀 어떠한가요?

좀처럼 떨칠 수 없다던 무료함은 가셨나요?



나는 이제야 겨우 당신을 부정하는 단어를 찾았습니다.

언젠가 당신을 다시 만난다면 잊지 않고 전하기 위해 이리 적어둡니다.


-26.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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