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하지 않을 사람이여
우리의 관계는 습관 같았다. 그 누구도 그 시작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저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는 서로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이 습관이 우리를 좀 먹고 있다는 것을 알아도 우리는 방치했다. 넌 겁쟁이였고, 나는 회피만 할 뿐이었다. 감히 이 관계에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아니게 될 것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너에게 정의하지 않은 채 남고 싶었다.
이 길고 긴 글에 앞서,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넌 나에게 그립다 못해 미운 사람이고, 우리를 떠올릴 때면 행복보다는 억울함이 먼저 떠오른다. 너의 우울은 너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내 우울의 8할은 너였다. 너는 많이 힘들어했고, 나는 그런 너에게 동화되어 있었다. 가끔은, 너를 보자마자 눈물이 나는 날도 있었다. 길거리에서 서러움이 물밀듯 치밀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를 받았었다. 이제 서야 고백하는 거지만 너와 함께 있던 나는 외로웠다. 자꾸만 떠날 것 같은 너를 붙잡고 있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 고통이 너무 억울해서 너를 많이 원망했었다.
네가 영화를 볼 때, 나는 책을 읽었고, 우리가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영화를 보는 건 아주 드물었다. 한국어로 된 노래만 듣는 나와 다르게, 너는 일부러 한국어가 아닌 노래를 들었다. 팝송이니 J-pop이니 하는 세계 각지의 노래가 너의 플레이리스트에 차곡차곡 쌓였다. 우리는 고집스러운 사람이었다. 서로가 추천하는 모든 것들을 진심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도, 우리는 이 고집을 꺾지 않았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더라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너는 나와 다르게 태생적으로 밝고 화려한 사람이었다. 너의 주위에는 언제나 사람이 가득 차 있었고, 너는 그런 사람들을 귀찮아하면서도 그들의 호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네가 그 사람들에게 늘 진심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너는 사람을 좋아하기보다는 버거워하는 편이었으니까. 그래서 우리의 관계가 시작될 때, 나는 네가 싫었다. 관계에 있어, 뭐든 제멋대로 행동하는 너의 행동이 거슬렸다. 아마 너도 나를 처음부터 좋아하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펼쳐져 있는 책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라서, 너는 금방 내 생각을 읽어냈을 테니까. 분명 내가 너를 싫어한다는 것도 훑어보기만 하더라도 알았을 것이다.
그때, 나는 너를 모르고 있었다. 너는 사람과 사랑을 귀찮아하면서 사실은 그 누구보다 갈구하고 있었고, 나는 그걸 제대로 바라봐 주지 못했었다. 관계를 유지하며 수십 번의 거짓말을 듣고, 진실을 찾아내야 하는 너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 수십 번의 거짓을 말하고 진실을 숨겨야 하는 나는 처음부터 어울리지는 않는 한 쌍이었다. 나는 꽤 감성적이고, 감정적인 사람이라서 내 진심은 꼭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너는 분명 불행한 사람이었고 또 그만큼 행복한 사람이기도 했다. 가끔, 너의 그 불행이 오히려 너를 행복하게 만드는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의 불행을 질투했다고 말한다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평소처럼 아무 표정 없이 나를 바라볼까. 아니면 그저 미소를 지어 보일까. 어느 쪽이든 그건 나를 불편하게 만들 터였다.
우리는 오지랖 넓은 친구들을 갖고 있었다. 그래. 우리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좋은 친구들이었다. 누군가를 챙겨주지 못해서 안달이 난, 배려와 다정함이 몸에 익어 숨 쉬듯이 자연스러운 아이들이었다. 우리의 미묘한 기류를 눈치챈 건지 아이들은 우리를 친하게 지내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래봤자 대부분의 행동이 헛수고로 돌아가긴 했지만, 허둥대는 애들과 미적지근한 우리의 온도 차가 커 지금 떠올려도 웃음이 새어 나오는 기억이다.
J는 그 수많은 아이 중에서도, 그 행동이 가장 심한 애였다. 틈만 나면 내게 너와 어색하냐고 물었다. 자기가 만든 그룹, 자기가 좋아하는 친구들. 그 친구들 모두가 사이좋게 지내길 바라는 건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그 몇 주가 힘들어서 일부러 모임에 나가지 않았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너도 마찬가지였고, 오히려 그런 행동이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인지, 결과적으로 우리 둘을 붙여놓는 일이 늘었다, 모임을 피하는 건 최악의 패였다. 애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는 애들의 노력에 부응하고자 관계를 위해 노력했다기보단, 그저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가장 편안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서로 정반대라는 점 때문인지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곁에 있을 수 있었다.
너는 이상하리만큼 나에게 너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너의 속마음이든, 지금의 현실이든, 어쩌면 남들에게는 불쾌하다고 여겨질 수 있을 정도로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딱히 나에게서 어떤 반응을 바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너는 타인에게 기대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건 사람을 향한 너의 일방적인 실망이었다. 그렇게 깊은 속내를 털어놓는 너와 다르게 내가 너에게 털어놓는 얘기는 그냥 단순한, 정말 단편적인 일상 이야기였다. 물론 그 일상도 전부 너와 함께 겪은 일들로 이루어져서 그저 말하는 일기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분명 그 자리에는 네가 있었고, 네가 보고 들은 모든 일이 내가 겪은 일과 똑같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너는 잠자코 들었다. 지루하든, 재밌든 별다른 반응 없이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우리는 대화를 많이 했다. 그것도 새벽에. 너는 쉽게 잠들지 못하는 편이었고, 나는 잠에 들기 직전 몽롱함이 좋아 일부러 새벽에 깨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점점 대화하는 게 늘어나게 되면서, 나도 너를 따라서 잠을 자는 시간이 늦게까지 미뤄졌다. 잠의 시간보다 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나였지만, 노트북과 핸드폰을 오랫동안 보면서, 점점 시간과 질 모두 부족해졌다. 부족해진 잠을 채우고자 낮잠을 자기 시작한 나에게 부모님은 왜 유치원 때도 안 자던 낮잠을 자느냐며 꾸짖으셨다. 너 때문에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는 나의 불합리한 타박에 너는 그게 왜 자기 탓이냐고 대꾸하고서는, ‘잠이 잘 오는 수면 음악’이라는 영상 하나를 보내왔다.
네가 잘 잤으면 하는 마음 반, 너와 대화하고 싶은 마음 반. 그 마음이 공존하면서 나는 연락을 지속했다. 우린 굳이 따지자면, 문자보다는 전화를 더 자주 했다. 너는 내 고집에 아무 말 없이 따라와 주었다. 문자는 귀찮다는 내 말에 너는 한숨을 쉬면서도 꼬박꼬박 내 전화를 받았으니까. 너무 늦은 새벽에는 당연히 문자밖에 할 수 없었다. 종종 전화하다 시계를 보고 문자를 하는 일도 있었다. 실제로 대화를 주도하는 건 나였지만, 대화의 모든 내용은 전부 다 너였다.
나는 다정하다거나, 친절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너의 슬픔을 완벽히 이해해 준다는 그런 마음이 넓은 행동 따위는 할 수 없었다. 공감은 해주되, 해결은 할 수 없었다. 보듬어 주되, 치료는 할 수 없었다. 무력감이라고 해야 할지, 답답함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조금 회의적인 감정이 있었다. 너는 기본적으로 다정한 사람이지만, 그 다정이 친절로, 배려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너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울 것 같은 얘기를 툭툭 내뱉고는 했다. 그리고 그런 너는 너의 고통을 말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말을 내뱉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괜찮은 거야?”
너는 단 한 번도, 내게 괜찮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게 끝내 서러워 너에게 화를 냈었다. 들어주는 내 입장도 생각 좀 해보라면서 화를 냈던 것 같은데, 너는 그 순간에도 괜찮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도, 괜찮다는 말도, 화해랄 것도 없이 다음 날에 우린 아무렇지 않게 인사했다. 그게 우리였다. 딱히 그런 행동이 우리답다고 느낀 건 아니었다. 서로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에는, 그 누구도 잘못한 게 없었고, 그럴 사이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는 것이 우리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었다.
내 우울의 8할이 너였다면, 네 죄책감의 8할은 나였을 것이다. 너는 내 숨기지 못하는 감정을 보면서 많이 괴로워했다. 아무렇지 않다는 너를 붙잡고 놔주지 않는 내가 힘들어서 더욱더 괜찮다는 말을 내뱉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너는 무책임한 주제에 죄책감이 너무 컸다. 내게 어떤 말도 하지 못하면서, 혼자 끙끙 앓는 시간만 늘어났다. 너는 점점 나를 피했고, 나는 겁이 났었다. 어쩌면 그 겁이 우리를 친구보다 가깝게, 그리고 남보다도 못하게 만들었나 보다.
너는 미로 같은 사람이어서 나는 길을 알아도 그 속에서 헤매는 일이 많았다. 너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편 나는 너를 가장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는 분명 너의 친구들과는 다른 존재였지만, 가끔 나는 그들보다도 너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서로의 행복보다 불행을 더 많이 지켜본 사이였다.
우리의 관계는 딱 그 정도였다. 서로에게 좋은 영향보다 나쁜 영향을 끼치면서 서로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우습게도 우리는 단둘이 함께 쌓은 추억이랄게 별로 없었다. 함께 밥을 먹은 적도, 함께 여행을 간 적도 없었다. 같이 영화를 본 적도, 노래방을 간 적도, 함께 한강에 놀러 간 적도 없다. 그럼에도 우린 이 관계를 끈질기게 이어갔다. 나는 늘 너 때문에 울었고, 너는 늘 나 때문에 늘 죄책감에 시달렸다.
나는 아직도 우리를 설명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쓰고는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어리다고 할 수 없었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관계를 이어갈 여력이 없었다. 연민과 죄책감만으로 관계를 지속할 수는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우리의 관계는 습관 같았다. 어느샌가 고쳐져 있는 습관처럼 우리는 더는 서로를 찾지 않았다. 그게 아무리 원망스럽고 허전해도 우리는 우리에게 안녕을 고했다. 아주 어린 그리고 허무한 7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