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있었다.
대사 없는 시간, 침묵이 흐르는 그 몇 초. 그때 기훈은 가장 편안했다. 왜냐하면 그 침묵에는 누구의 기대도, 해석도, 평가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들은 기훈의 그 침묵조차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의 무표정과 무기력한 연기는 처음엔 ‘스타일’이라 불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게으름, 무책임, 혹은 무관심으로 읽혔다.
기훈은 해명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종류의 피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본 리딩 날, 그는 대사를 넘기며 멈췄다.
“그냥… 이렇게 해도 괜찮지 않나요.”
그의 말투는 부탁도, 질문도 아니었다. 그건 마치 모든 감정의 전원을 내린 사람의 톤. 그 문장 안엔 연극도, 타인도, 그리고 자신조차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연출가는 고개를 숙였고, 동료들은 시선을 피했다.
누군가는 중얼거렸다.
“선배,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예요…?”
하지만 기훈은 이미 무대 밖에 있었다. 아니, 그보다 더 먼 어딘가. 자신이 다시 살아야만 하는 어떤 다른 무대 위로 옮겨가야 한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는 연습실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누군가 말리거나 찾지도 않았다.
그가 떠났다는 사실은 말이 아니라, 단지 빈 의자로만 전해졌다.
그는 무대 밖을 걸으며 생각했다. 나는 이 무대를 잃은 것이 아니라, 내 자리를 벗어난 것이다. 남아 있을 자리가 아니라면, 떠나는 게 순서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명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국은 아니었다. 어딘가, 자신의 고요한 침묵이 이상하지 않게 여겨질 수 있는 장소. 침묵을 병으로 의심하지 않고, 지쳐 있다는 말을 고백이 아닌 정보쯤으로 받아들이는 곳.
기훈은 책상 한쪽에 무심코 적어둔 도시 이름을 떠올렸다.
하이델베르크.
낯선 곳, 낯선 언어. 그러나 거기서는, 적어도 자신이 왜 우울한지를 해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어차피 어딘가로 가야 했다면, 책에서만 보던 고독한 도시 하나쯤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기훈은 고등학교 시절 어떤 이유에선지 꽤 오랫동안 독일어를 공부한 적이 있었다. 특별한 계기는 아니었다. 그저 국어나 영어보다 구조가 더 단단해 보인다는 이유. 혼자서 단어장을 만들고, 문법 책을 필사하듯 베껴 적으며 누군가 말도 안 되는 말을 조곤조곤 이어가듯 그는 독일어의 어순에 자신을 맡겼다.
문장이란 건, 어쨌든 누군가의 세계관이니까.
그 시절의 그는, 다른 누구의 언어라도 빌려야 자신의 말을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대는 끝났고, 관객은 떠났다.
이제는, 무대 밖 어딘가로.
조용히, 걸어 나갈 시간이었다.
『하이델베르크에서의 죽음』은 이제 두번째 단계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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