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지만 나를 붙잡은 순간/ 『일상의 블랙홀』31
늙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어릴 때부터 조금 솟아 있는 평평한 바위 위로 두 발을 모아 뛰어오르는 일을 좋아했다. 처음엔 낮은 바위에서 시작해, 점점 더 높은 바위로 옮겨 가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몇 번이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다 보면, 뛰기 전에 어느 정도의 힘을 써야 하는지, 어떤 거리에서 몸을 던져야 하는지 요령이 자연스레 생겼다. 호흡과 자세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몸이 먼저 배웠다.
그 시절 내게 몸이란 의지의 충실한 집행자였다. 마음먹으면 곧 실현되는, 생각과 행동 사이에 어떤 간극도 존재하지 않던 시간. 바위 위로 뛰어오르는 일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세계와 나 사이의 거리를 확인하는 의식이었다. 나는 높이를 정복하며, 중력을 이기며, 내 몸이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시험했다.
장년이 되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보는 사람이 없고, 적당한 바위나 턱이 있으면 나는 여전히 곧잘 뛰어올랐고, 웬만한 높이는 어려움 없이 넘을 수 있었다. 몸은 여전히 내 말을 잘 듣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사실은 그렇게 '느껴졌다'는 것만이 진실이었는지도 모른다. 몸은 이미 조용히 변해가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젊은 시절의 감각으로 세상을 대하고 있었다.
얼마 전의 일이다. 이미 '노년'이라는 시간대에 들어와 살고 있던 어느 날, 5~60센티미터쯤 되어 보이는 벤치 옆에서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 '혹시나'에는 여러 가지가 섞여 있었다. 호기심, 자존심, 그리고 아마도 자신의 젊음을 확인하고 싶은 은밀한 욕망. 나는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직 나는 괜찮다고, 여전히 할 수 있다고.
잠깐 준비 자세를 취하고, 예전처럼 몸을 솟구쳤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거꾸로 흘렀다. 공중에 떠 있는 찰나, 나는 다시 열다섯 살의 소년이었고, 서른 살의 청년이었다. 중력이 작동하기 전 그 짧은 무중력의 시간 속에서, 나는 내가 늙지 않았다고 믿었다.
다행히도 나는 벤치 위에 올라섰다. 동료들은 놀라움과 걱정이 섞인 찬사와 경고를 동시에 쏟아냈다. "대단하네요!" "위험하잖아요!" 그들의 말 속에는 존경과 염려가 공존했다. 성공의 순간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 한순간의 집중과 격한 동작을, 이미 그 행동에 어울리지 않게 변해 있던 나의 다리는 끝내 견뎌내지 못했다. 무릎과 골반에서 삐걱거리는 통증이 늦은 항의처럼 올라왔다.
그것은 단순한 통증이 아니었다. 몸이 보내는 메시지였다. "너는 이제 예전의 네가 아니다." 성공적으로 벤치 위에 올라섰지만, 그 성공의 대가로 나는 며칠간 무릎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승리는 곧 패배였고, 증명은 곧 반증이었다.
나이 든다는 것이란, 아마 이런 순간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성공과 실패가 동시에 도착하는 순간. 할 수 있다는 것과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사이의 미묘한 경계선. 우리는 그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의 나이를 실감한다. 젊음이란 그 경계가 아직 멀리 있어 보이지 않는 시절이고, 늙음이란 그 경계가 생각보다 가까이 와 있음을 깨닫는 시간이다.
아직 젊은 시절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채 살아가는 이 시대의 보통 노인들은 대개 꼭 한 번쯤 사고를 치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아, 이제 내 몸은 내 마음의 시계를 따라가지 않는구나.
현대의 노년은 과거와 다르다. 우리는 예전 세대보다 훨씬 젊은 마음으로 살아간다. 육십을 넘어서도 여행을 계획하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등산을 하고, 연애를 한다. 정신은 여전히 삼십 대처럼 활발하고, 욕망은 사십 대처럼 생생하다. 문제는 몸이다. 몸만이 정직하게 시간을 기록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고를 친다. 너무 무거운 짐을 들어 허리를 다치고, 젊은이들처럼 달리다 넘어지고, 밤새 술을 마셨다가 며칠을 고생한다. 각자의 벤치가 있고, 각자의 바위가 있다. 그리고 그 위로 뛰어오른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인정한다.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이것은 일종의 통과의례다. 노년으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작은 실패들. 우리는 그 실패를 통해 배운다. 겸손을, 수용을, 그리고 새로운 리듬을.
이 깨달음은 바위 위에서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이성에 대한 생각, 영어 단어를 외우는 일, 책을 읽고 내용을 정리하는 일처럼 일상의 거의 모든 활동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경고를 보내온다.
새벽에 책을 읽다 보면 예전보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시간이 빨라졌음을 느낀다. 한 페이지를 읽고 나면, 방금 읽은 내용이 가물가물하다. 다시 읽는다. 이번엔 천천히. 그러면 이해가 된다. 단지 속도를 늦춰야 한다는 것. 같은 분량을 소화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외국어 단어를 암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십 대엔 한 번 보고 외워졌던 단어들이, 이제는 다섯 번을 반복해야 겨우 머릿속에 남는다. 그것도 다음 날이면 반은 잊어버린다. 좌절스러운가? 처음에는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방법을 바꾸면 된다는 것을. 노트에 적고, 소리 내어 읽고, 문장으로 만들어보고, 그림으로 연상하면 된다는 것을.
이성에 대한 감정도 변했다. 젊을 때의 그 격렬하고 맹목적인 끌림은 사라졌다. 대신 더 깊고 차분한 관심이 생겼다. 외모보다는 대화가, 열정보다는 이해가 중요해졌다. 이것이 퇴보인가, 진화인가? 단지 다름일 뿐이다. 다른 시간대의, 다른 리듬의 끌림.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안 된다고.
이 문장이 처음엔 슬프게 들렸다. 뭔가를 잃었다는, 뒤처졌다는, 능력이 떨어졌다는 느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안 된다'가 아니라 '달라야 한다'로.
늙어간다는 것은 무언가를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아니라, 같은 일을 다른 리듬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바위 위로 뛰어오를 수 있다. 단지 더 낮은 바위를 선택하고, 더 신중하게 준비하고, 착지 후 스트레칭을 해야 할 뿐이다. 여전히 책을 읽을 수 있다. 단지 더 천천히 읽고, 중간에 쉬어가고, 메모를 더 많이 해야 할 뿐이다. 여전히 사랑할 수 있다. 단지 다른 방식으로, 다른 깊이에서, 다른 온도로.
젊음의 리듬은 빠르고 강렬하다. 알레그로 비바체, 활기차게, 생동감 넘치게. 노년의 리듬은 느리고 깊다. 아다지오, 천천히, 여유롭게. 어느 것이 더 나은가? 그런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 봄의 햇살과 가을의 햇살 중 어느 것이 더 나은지 물을 수 없는 것처럼.
결국 늙어간다는 것은 두 개의 시계 사이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하나는 마음의 시계. 여전히 빠르게 돌아가며, 호기심을 유지하고, 새로운 것을 갈망하고, 도전을 즐긴다. 이 시계는 나이를 먹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나이를 먹을수록 더 풍부해지고 섬세해진다.
다른 하나는 몸의 시계. 점점 느려지며, 회복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한계를 명확히 알려준다. 이 시계는 정직하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무시할 수 없다.
젊음이란 이 두 시계가 거의 같은 속도로 가는 시간이다. 늙음이란 두 시계 사이의 간격이 점점 벌어지는 시간이다. 그 간격을 인정하지 않으면 고통스럽다. 벤치에서 뛰어내린 후의 무릎 통증처럼. 하지만 그 간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빠른 마음과 느린 몸 사이에서, 우리는 더 신중해진다. 더 지혜로워진다. 더 온화해진다. 젊었을 때는 '할 수 있다'만 생각했다면, 이제는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먼저 묻는다. 이것은 나약함이 아니다. 성숙이다.
벤치 위로 뛰어오른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다. 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할 필요가 없어서다. 더 이상 내게 무언가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나는 이미 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이제 바위를 보면, 뛰어오르는 대신 그 위에 앉는다. 그리고 바라본다. 하늘을, 나무를, 지나가는 구름을. 젊었을 때는 바위를 정복의 대상으로만 봤다면, 이제는 휴식의 장소로 본다. 이것 역시 리듬의 변화다.
늙어간다는 것은 상실이 아니다. 변화다. 빠름에서 느림으로, 힘에서 지혜로, 정복에서 공존으로. 우리는 무언가를 잃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얻는다.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다른 리듬으로 살아가는 여유를, 다른 깊이에서 사랑하는 능력을.
그리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변화를 받아들이는 마음의 유연함일지도 모른다. 벤치 위에서 내려온 후, 무릎의 통증을 느끼며 나는 웃었다. 동료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지만, 나는 괜찮았다.
이제 안다. 늙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은 끝이 아니라 다른 시작이라는 것을.
마음은 여전히 열다섯 살이지만, 몸은 정직하게 이미 도달한 나이를 기록한다. 이 간극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리듬을 찾는다. 그것이 늙어간다는 것의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