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머씨 윈터양 이야기 14화: 새로운 여정

고요한 걷기에서 피어나는 관계와 회복의 서사

by 글빛누리

14화. 새로운 여정


이별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온다.

2년이 더 흘렀다. 소년은 이제 열두 살이 되었고, 그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키는 한 뼘 더 자랐고, 목소리는 조금씩 굵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의 관찰력은 더욱 예리해졌다.

좀머 씨는 조금 더 늙었지만,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어깨가 더 곧게 펴졌고, 걸음에 묵직한 확신이 생겼다. 15년간 같은 길만 걸었던 그가 이제는 가끔 다른 길로 가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윈터 양은 조금 더 따뜻해졌다. 말 그대로였다. 예전처럼 항상 차가운 손을 호호 불지도 않았고, 코트 깃을 바짝 세우지도 않았다. 가끔은 햇빛이 좋은 날, 코트를 벗고 걷기도 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이사를 가게 됐어요."

소년의 말은 폭탄선언 같았다. 그들이 공원을 막 한 바퀴 돌고 벤치에 앉으려던 참이었다.

좀머 씨의 발걸음이 멈췄다. 윈터 양은 벤치에 앉으려던 몸을 다시 일으켰다.

"아버지가 새 직장을 구하셨어요. 다른 도시로 가야 해요."

소년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떨리고 있었다. 2년 동안 이들과 함께 걸으며 쌓아온 모든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처음 좀머 씨를 따라걸었던 그 겨울날, 윈터 양과 처음 대화를 나눴던 날, 세 사람이 처음 함께 걸었던 날들...

좀머 씨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벤치에 천천히 앉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었다.

윈터 양이 소년 옆에 앉아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녀의 손이 예전처럼 차갑지 않다는 걸 소년은 느꼈다.

"언제 가니?"

좀머 씨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어딘가 서글픈 기운이 돌았다.

"다음 달이요... 아버지가 미리 가서 집을 구해놓으셨어요. 저와 어머니는 다음 달에 가기로 했어요."

소년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어 말했다.

"저는... 저는 여기 남고 싶어요. 두 분과 계속 같이 걷고 싶어요."

그 말을 하자 소년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지난 2년간 이들과 함께한 시간은 그에게 단순한 산책 이상의 의미였다. 그것은 성장이었고, 우정이었고, 세상을 보는 새로운 방법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윈터 양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우리도 네가 그리울 거야. 정말 많이. 하지만 때로는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할 때가 있단다."

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계속했다.

"나도 처음에는 이 마을이 낯설었어. 모든 게 새롭고 무서웠지. 하지만 걷다 보니까 조금씩 익숙해졌고,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게 됐어. 너도 그럴 거야."

소년은 눈물을 참으려 애썼다.

"하지만 어떻게 해요? 두 분이 없으면 저는..."

그때 좀머 씨가 입을 열었다. 그는 오랫동안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잠깐만... 우리가 너를 방문하러 가면 어떨까?"

소년과 윈터 양 모두 놀라서 좀머 씨를 바라봤다. 윈터 양은 특히 놀란 표정이었다. 좀머 씨는 그동안 이 마을을 떠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떠나려 하지 않았다.

"정말요?"

소년의 목소리에 희망이 스며들었다.

좀머 씨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무언가 중요한 결심을 내린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우리도 새로운 길을 걸어볼 때가 된 것 같구나."

그는 자신도 놀란 듯 고개를 끄덕였다. 15년간 같은 길만 걸었던 자신이 다른 도시로 여행을 간다니.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생각이 두렵지 않았다.

윈터 양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좋은 생각이에요! 우리 셋이서 여행을 하는 거죠. 오랜만에 기차도 타고요."

소년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정말요? 기차를 타고 오실 수 있어요! 제가 새로 사는 동네도 보여드리고, 새로 다니게 될 학교도 구경시켜 드릴게요!"

좀머 씨는 빙그레 웃었다. 언제부터인가 웃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래, 기차를 타자. 정말 오랜만이네."


걷는다는 것은 마음도 함께 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날부터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소년이 이사간 후 한 달 정도 지나면, 좀머 씨와 윈터 양이 기차를 타고 그를 방문하기로 했다. 그것은 모두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특히 좀머 씨에게는 15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걷기 루틴을 깨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불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되기까지 했다.

소년은 남은 시간 동안 더욱 열심히 그들과 시간을 보냈다. 평일 오후에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공원으로 달려갔고, 주말에는 아침 일찍부터 그들을 기다렸다.

어느 날 소년이 물었다.

"좀머 아저씨는 왜 15년 동안 같은 길만 걸으셨어요?"

좀머 씨는 한참을 생각했다. 예전 같으면 대답하지 않았을 질문이었다.

"처음에는... 다른 길을 걸을 용기가 없었어. 익숙한 게 편했거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도망이었던 것 같아."

"도망이요?"

"응. 새로운 것들로부터, 변화로부터. 하지만 너희들을 만나고 나서야 깨달았어. 걷는다는 건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걸 말이야."

윈터 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걷는 건 마음도 함께 움직이는 거예요."


마지막 산책

이사 전날, 그들은 특별한 마지막 걸음을 계획했다. 이번에는 평소와 조금 다른 코스로.

그들은 마을을 한 바퀴 완전히 둘러보기로 했다. 좀머 씨가 매일 걸었던 그 익숙한 길에서 시작해서, 소년이 학교에 다니던 길을 지나고, 윈터 양이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 지났던 기차역 근처까지.

"여기서 처음 윈터 양을 봤어요." 소년이 공원 입구에서 말했다.

"그래? 기억하고 있었구나." 윈터 양이 웃었다.

"네. 그때 윈터 양은 정말 슬퍼 보였어요. 지금은 완전히 달라요."

윈터 양은 그 말에 잠시 과거를 떠올렸다. 2년 전,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 이 마을에 처음 왔을 때의 자신을.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자신을.

"사람은 변할 수 있어." 그녀가 말했다. "특히 좋은 친구들과 함께라면."


그들은 학교 앞도 지났다. 소년이 2년 동안 다녔던 학교, 그가 좀머 씨를 처음 발견했던 바로 그 교문 앞.

"여기서 처음 좀머 아저씨를 봤어요. 그때는 정말 무서워 보였는데."

좀머 씨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도 무섭지 않니?"

"아니요. 이제는 가장 든든한 어른이에요."

좀머 씨는 그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언제부터인가 아이들이 자신을 피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자신이 먼저 마음을 열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공원의 벤치에 앉았다. 처음 세 사람이 함께 앉았던 바로 그 벤치.

"내일이면 가는구나."

좀머 씨의 말에는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

"걱정하지 마." 윈터 양이 따뜻하게 말했다. "우리는 약속을 지킬 거야. 한 달 후에 너를 만나러 갈 거야."

"정말 올 수 있으실까요?"

소년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불안함이 서려 있었다.

좀머 씨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약속하마. 우리는 갈 거야. 그리고 네 새로운 걷기 길도 함께 걸어볼 거야."

소년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그들을 꼭 껴안았다. 작은 몸으로 두 어른을 한꺼번에 안는 모습이 귀여웠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진심이었다.

"정말 보고 싶을 거예요."

"우리도 그럴 거야."

윈터 양이 소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기억해. 걷는 건 어디서든 할 수 있어. 네가 새 동네에서 걸을 때, 우리도 여기서 걷고 있을 테니. 그럼 우리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는 거야."

소년은 그 말에 큰 위로를 받았다. 물리적인 거리가 생겨도 마음의 거리는 그대로일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좀머 씨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작은 수첩이었다. 검은 가죽으로 된 표지에는 '걷기의 이야기'라고 단정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이걸 네게 주고 싶구나."

소년은 놀란 눈으로 그 수첩을 받아들었다.

"이건..."

"내가 쓴 거란다."

좀머 씨가 약간 부끄러운 듯 말했다.

"네가 우리를 관찰하고 기록했듯이, 나도 우리의 이야기를 적어왔어. 우리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어떻게 서로를 만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네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소년은 감동한 채로 수첩을 조심스럽게 펼쳐봤다. 그 안에는 좀머 씨의 깔끔하고 정성스러운 글씨체로 지난 2년간의 이야기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첫 페이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어떤 소년이 나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귀찮았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 소년이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는 것을."


소년은 수첩을 가슴에 꼭 안았다.

"감사해요. 정말... 정말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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