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적인 영화/드라마 리뷰 #1. <지금 우리 학교는>
주변의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그 중 내가 생각하는 나쁜 사람을 몇 명 추려보자. 뚜렷하게 떠오르는 몇 명이 있다면, 이 질문에 답해보자. 그들이 과연 나 뿐 아니라 다른 모두에게도 나쁜 사람일까? 사람마다 ‘나쁘다’에 대한 각자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길에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을 나쁘다고 할 수도, 자신에게 피해를 끼친 인물이 나쁜 사람이라 할 수도 있다. 이런 건 다 감수하더라도, 범죄를 저지르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나쁜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영화같이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이들은 누군가에겐 좋은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선과 악 중 어디에 위치해 있나. <지금 우리 학교는>은 이 질문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2학년 5반 학생인 나연은 집안 사정을 통해 사람을 차별한다. 결벽증도 있으며, 어떤 정보든 과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만큼 자존심도 강하다. 이러한 성향으로 인해 나연은 자신이 기생수(기초생활수급자)라며 무시하던 경수를 의도적으로 좀비로 만들어버렸고, 독단적으로 친구들과 숨어있던 방송실을 이탈하며 담임선생님까지 좀비로 만든다. 음악실 창고에 숨어 문을 잠근 탓에 친구들의 식량 확보 또한 방해한다. 마음을 다잡은 나연은 음식을 챙겨 친구들을 찾아 나서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불필요한 희생을 두 명이나 만들고, 생존에 중요한 식량 확보 영향을 끼쳤으니 결과적으론 반동인물이 맞다. 하지만 이런 나연에게 ‘악역’이라는 칭호를 붙이기에는 섣부른 감이 있다. 제 3자의 시선에선 확실히 나연이라는 인물이 좋게 보일 수 없다. 하지만 나연의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보자. 분명 경수를 좀비화 시킨 건 돌이킬 수 없는 명백한 과오다. 하지만 10명이 가까운 사람들이 자신을 몰아세우고, 완전한 악역으로 규정시킨 집단에서, 이성적이고 계산적인 판단이 가능할 리가 없다. 그 공간을 탈출해 혼자 위험한 공간에 남겨지는 것이 최선이었을 수 있다. 음악실 창고에서도 자신을 욕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누가 선뜻 문을 열어 줄 수 있을까. 여기서 나연의 심리는 ‘나를 욕했으니 복수 해야겠어’가 아닌, ‘도와주러 나갔다가 또 내게 화살이 돌아오면 어떡하지’다. 결국 친구들에게 그 마음이 닿진 않았지만, 나연은 친구들을 돕고 용서를 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비상사태가 발생했다고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급격히 성숙해지거나, 생존에 대한 판단과 기술이 발전하지 않는다. 여전히 나연은 10대고, 좀비사태라는 상황만 제외하면 충분히 10대로써 할 수 있는 행동이고,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우린 미성숙에 대해 처벌을 해야 할까, 변화의 기회를 줘야할까. 처벌을 받은 나연은 더욱 집단 내에서 어긋났고, 그 결과 반성과 변화에도 불구하고 좋지 않은 결과를 맞았다. 나연의 입장에선 자신을 악으로 규정한 시선들이 나연을 죽인 셈이다.
민은지는 매일 가해지는 학교폭력으로 인해 자살을 결심한다. 공교롭게도 투신을 하려는 순간, 좀비로 들끓는 학교를 목격한다. 은지는 살았다는 안도감보다 자신만 또 따돌려졌다는 한탄과 인터넷에 퍼질 자신의 나체 동영상을 막을 궁리만 하고 있다. 그 분노로 인해 완전한 좀비가 되지 않았고, 교무실에서 핸드폰을 부수는 일에 집착한다. 복수라는 명목 하에 체육 선생님을 잡아먹은 은지는 계엄군에게 구조를 당한 후에도 배가 고프단 이유로 자신의 왕따 친구를 잡아먹는다.
은지는 학교라는 집단 내에서 명백한 약자이자 피해자다. 처절하게 핸드폰을 부수는 장면은 충분히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녀의 분노도 십분 이해된다. 아무 이유 없이 당하는 폭력만큼 억울한 것이 있을까. 하지만 그 분노의 방향이 탈출을 위해 애쓰는 수혁과 청산, 그리고 자신의 친구에게 향한 점은 명백히 잘못됐다. 이런 행동들이 단지 왕따 피해자라는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심지어 이미 학교라는 사회는 무너졌는데도 말이다.
나연과 은지는 타인의 관점에 의해 악인으로 규정되는 반면, 계엄군 사령관은 자신을 스스로 악인으로 규정한다. 학생들의 구출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자신의 어머니도 구하지 못했다. 무증상 감염자의 정체를 안 뒤에는 효산고 학생들의 구출을 철회한다. 전부 죽이는 것이 해결방법임을 안 뒤에는 특정 위치에 좀비를 끌어 모아 미사일 투하를 지시한다. 사령관의 죄책감은 회를 거듭할수록 쌓여간다. 미사일이 포격을 마치고 모든 작전이 마무리된 순간, 그의 죄책감은 극에 달한다. 결국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진다는 영상을 남긴 뒤 가족과의 통화를 마지막으로 권총으로 자살 한다.
시청자들은 안다. 사령관은 끝까지 최고의 상황은 만들지 못해도 최선의 선택을 했고, 최선의 결과를 냈다. 하지만 그의 뜻대로 된 것은 없었다. 어머니도 구하지 못했고, 사령관의 시점에선 학생들도 구하지 못했다. 결국 수만 명의 시민을 미사일로 사살해야했다. 자살할 때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아 버벅인다. 의도대로 되지 않았을 뿐, 그의 의도는 매우 선했다. 최대한의 인원을 안전하게 구출한다는 임무는 충분히 완수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살린 사람보다 자신이 죽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짙게 남아있다. 결국 자신을 범죄자라 규정하고, 생을 마감한다.
선과 악의 경계에 서있는 세 인물이 악인인가에 대한 질문에 기준점을 제공하는 인물이 있다. 시리즈 내에서 절대악으로 등장하는 윤귀남이다. 그는 일진의 사회에서 낮은 계급인 ‘따까리’로 크고 작은 학교폭력을 일으켰고, 좀비 사태가 터진 뒤에는 교장선생님을 살해하고, 청산이도 제거하려 한다. 청산의 제거에 실패하고 좀비에게 물리지만, 민지와 같은 상태로 완전히 좀비가 되지 않는다. 은지는 자신의 따돌림에 대한 분노, 윤귀남은 청산을 죽이지 못한 분노라는 차이는 존재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이점을 이용해 이청산을 죽이려 하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인물들을 좀비로 만들어 버린다. ‘배고픔’이라는 핑계라도 있던 은지와 다르게 귀남은 그저 본인의 욕심과 쾌락을 위해 사람들을 잡아먹는다.
귀남에게 선한 부분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순전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쾌락을 위해 타인에게 고통을 준다. 비열함과 악랄함, 잔인함까지 모두 갖춘 귀남은 확실히 나연, 은지, 사령관과 결이 다르다. 타인에 대한 배려, 죄책감 같은 내적갈등도 존재하지 않고, 연민이나 동정심 같은 감정도 없다. 완전한 좀비화가 되지 않은 이유도 청산에 대한 이유 없는 분노와 살해하겠다는 목적 뿐이었다. 자세한 배경이 생략됐지만, 귀남은 우리 사회에서 절대악으로 규정되는 소시오패스나 싸이코패스에 가까운 인물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선과 악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 정확하게 주어진 기준도 없다. 애초에 기준이 있었다면 선과 악을 구분하는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각자 스스로의 판단에 맡기면 이 세상엔 나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국 모든 선과 악은 타인의 눈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제3자도, 전지적 관점에서 보는 신도 아니기 때문에 주관적인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최대한 가치중립적인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인간은 갈등이라는 감정을 거친다. 여기까진 좋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사람은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등한시한다. 인간에게 반성이라는 감정이 있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거짓되고 얕은 반성으로 인해 의미가 퇴색된 영향도 있지만, 우리는 유독 타인의 반성을 수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나연과 사령관의 반성을 지나치면 안 된다. 악행 하나로 그 사람을 완전히 악인으로 단정 지을 수도 없을 뿐 더러, 그 사람이 그 부분을 반성하고 변화할 수 있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다. 타인들에게 선과 악 중 어디에 위치해있는지 판단할 권리가 있는 만큼, 규정된 이들이 어디에 설지 선택하고 변화할 수 있는 기회도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