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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d Fashioned NuBoi Jul 14. 2022

늦게 일어났지만, 일찍 자고 싶습니다.

  난 그닥 오래 사는 것에 큰 관심이 없다. 더 정확히는, 그닥 오래 살고 싶지가 않다. 내가 이 말을 세상으로 처음 내뱉을 때 친구의 표정이 아직 생생하다. 그 친구는 마치 자살하려는 친구를 말리려는 것 마냥 내게 희망찬 말들, 오래 살아야하는 이유를 내내 나열했다. 6년 정도 지난 지금도, 크게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고, 사람들의 반응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들 의아하게 보거나, 마치 삶에 희망이 없는 사람처럼 보곤 한다. 유감스럽게도 삶에 비관적이거나, 희망이 없거나, 의욕이 없진 않다. 이루고 싶은 것이 있고, 여전히 기다려야 할 것이 있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있다. 내가 짊어지고 가야할 사람도 있고, 내가 끌고 가야 할 사람도 있다. 여전히 못해본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다시 경험하고 싶은 것도 많다. 나는 당장 죽고 싶은 게 아니다. 그저 무의미하게 오랜 삶을 지속하면서 목숨줄을 붙잡고 싶진 않다는 뜻이다. 내 온전한 힘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을 해낼 수 없으면, 그건 더 이상 온전한 내 인생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고,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고 이를 완수하면, 미련 없이 떠나고 싶다.


  나는 쇼펜하우어가 말한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다’라는 말을 다소 믿는 편이다. 하지만 그 뒤에 일정한 보상이 따라온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 보상이 재화가 됐든, 행복이 됐든, 사랑이 됐든 말이다. 결국 우리는 아픔과 기쁨의 굴레 속에서 살아간다. 대가 없는 보상은 없다. 난 이 대가와 보상의 굴레를 그렇게 많이 겪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크게 달라질 건 전혀 없다. 그저 나에게 찾아오는 고통과 기쁨의 주기를 한두 번 정도 줄이는 것뿐이다. 솔직하게 얘기해서, 난 벌써부터 보상을 받기 전에 다가 오는 대가를 치르는 게 버겁다. 지금은 버텨야 할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사라질 즈음엔, 내가 그 대가를 견딜 만큼 강하지도, 그만한 목적을 가지지도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단지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대가를 감당해야할까. 아직까진 아니라는 답으로 내 시선은 향해있다.


  결국 지금까지 나열한 내 생각들은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내가 언제까지 온전한 힘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 인생에 다가올 고통을 내가 컨트롤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고통이 싫은, 아니 고통을 견딜 힘과 자신이 없는 나는 한 번이라도 그 고통을 맞닥뜨리지 않는 게 상책이다. 고통은 성장을 낳는다고들 하지만, 여태 내가 겪은 고통들은 내게 상처만을 남겼고, 상처들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 사회화, 규격화가 타인들이 이야기하는 성장이라면 성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타인의 관점인거고. 나에겐 그저 우울과 강박에 더욱 잠식시키는 요인일 뿐이다.


  그래서 뭘 말하고 싶냐. 그냥 오래 살 생각이 없다. 그게 끝이다. 이제는 한 몸 같은 무기력함이 날 떠날 때쯤엔 생각이 바뀔지 모르겠다. 그리고 슬프게도, 오래 살지 않겠다는 내 목표는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깔아놓은 생각의 전제를 따라가면 결국 난 내 죽음도 뜻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몽롱한 몸살 기운을 안고 2달 만에 이 글에 마침표를 찍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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