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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스타샤 Jun 16. 2024

곧 새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게 하필.

그날 함께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해.

그분에게 새끼 밴 엄지를 집안으로 들이자고 제안했지만 알레르기가 심한 탓에 선뜻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그분과 아이들은 미국 출장 일정이 잡혀 있었고 의논할 시간은 충분치 않았다. 그분 의견을 무시한 채 엄지를 집안으로 들일수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 그분의 동의를 얻고 싶었지만 출장을 다녀온 후 다시 이야기하기로 했다. 다음날 출국을 위해 저녁에 공항 근처 호텔로 가서 숙박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날 저녁 그분과 아이들을 예약된 호텔에 내려주고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마당에 차를 세우자 기다렸다는 듯 엄지가 곁으로 다가왔다. 늦은 밤 엄지와 단둘이 마주하는 마당은 쓸쓸한 기운이 감돌았다. 풀 벌레 소리가 더해진 저녁 공기 속 엄지의 눈동자는 까만 바둑알 모양으로 빛나고 있었다. 쓰다듬는 손길을 따라 이리저리 얼굴을 비비고 앉아 있던 엄지. "엄지야, 엄마 좋아? 엄마도 엄지가 너무 좋아." 둘만의 대화 속에 위로를 주고받으며 더없이 행복한 순간이었다.


장거리 야간 운전으로 피로가 몰려왔다.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일어나려는 순간  엄지가 앉았던 자리에 무언가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문득 낮에 엄지 초음파를 봐준 수의사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곧 새끼를 낳을 수 있다고 했지만 설마 아니겠지.' '곧이라는 게 오늘이라고? 말도 안 되지.' 아직은 아닐 거라고 생각의 끈을 느슨하게 풀었다. 시간은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때 마침 그분에게 전화가 왔다. 출장에 필요한 서류를 놓고 왔다며 가져다 달라는 전화였다. 나는 볼맨소리를 했다.


"잘 좀 챙기지. 나보고 이 시간에 다시 인천을 왕복하라고?" 


전화를 끊고 엄지와 눈이 마주쳤다. '음.... 진짜 엄지가 새끼 낳으려는 거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엄지는 차분한 듯 보였지만 평소와 달리 미세하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일단 엄지를 안심시켰다. 아니, 나부터 누가 좀 안심시켜 주길 바랐다. 당장 인천까지 다시 갔다 와야 하니 상황은 최악이었다. 


"엄지야, 엄마 인천 갔다 올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엄마 기다리고 있어야 해. 빨리 갔다 올게. 가지 말고 꼭 이 자리에서 있어야 해."


엄지는 나에게 눈을 떼지 않았고 분명 내 말을 알아들었을 거라 믿었다. 엄지에게 말한 대로 빨리 갔다 오면 될 일이었다. 이럴 땐 몸이 두 개였음 했다. 분신술은 가당치도 않으니 축지법을 사용하는 흉내라도 내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빨리 움직였다. 그분에게 서류를 전달하며 확실하진 않지만 수상한 낌새가 보이는 엄지 소식을 알렸다. 


본인 딸이 아기를 낳는 소식이 아닌 이상 별 반응이 없었다. "엄지가 누구야?"라고 하지 않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출장 갈 준비를 하는 그분에게 엄지 얘기가 뭐 그리 크게 와닿을까 싶었다. 공감하지 못하는 그분을 뒤로 한채 빠르게 차를 돌려 집으로 향했다.


우리 집 마당은 먹먹할 정도로 고요했다. 엄지는 온대 간대 없었다. 엄지가 앉았던 자리에 남은 흔적이 엄지를 대신했다.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엄지를 향한 왠지 모를 불안감이 온몸을 감쌌다. 그리곤 타이밍 맞춰 전화한 그분을 향한 원망과 미움이 마음 가득 차올랐다. 


오랜 세월 출장을 다니면서 물건을 빠뜨려 전화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인천을 두 번 왕복하게 한일도 지금까진 없었다. 그날은 이상한 운명의 장난이었다. 엄지에게 미안하고 속상한 마음뿐이었다. 


나는 어둠이 옅어지기 무섭게 마당으로 나갔다. 엄지가 코를 벌름거리며 뛰어 오길 바라며 캔 사료 하나를 땄다. 그날따라 캔을 따는 딸깍 소리가 유난히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마을 전체를 깨우는 기상나팔을 불듯 엄지를 불러댔다. 부르면 언제나 달려오는 엄지였으니까.


"엄지야!"

"엄지야, 맘마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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