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의 책들을 뒤져보자. 신학책이나 강단 형이상학책을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고 치자. 묻겠다. 이 책에 양이나 수에 관한 추론(수학/논리)이 담겨 있는가? 아니오. 그럼 사실과 존재에 관한 경험적인 추론(과학/데이터)이 담겨 있는가? 아니오. 그렇다면 불에 던져버려라. 그것은 궤변과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흄 <인간 지성 탐구>-
이런 배경 속에서 하이데거 철학을 비합리적이며 무의미한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논리실증주의자 카르납(Rudolf Carnap)은 1931년에 발표한 자신의 「Überwindung der Metaphysik durch logische Analyse der Sprache」(언어의 논리적 분석을 통한 형이상학의 극복)에서 하이데거의 무에 대한 사유를 “무의미한 담론의 극단적 경우”라고 ‘극단적으로’ 폄하한 바 있다.
(https://m.jsd.or.kr/?c=culture/culture1&uid=23122)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자연과학의 명제—그러므로 철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어떤 것—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다른 어떤 사람이 형이상학적인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그가 그의 명제들 속에 있는 어떤 기호들에도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것이 본래 철학의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이상현상災과 사변異을 논하는 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즉 이상현상과 사변이 닥친 것은 군주가 정치로 하늘을 움직이고, 하늘은 기氣를 움직여 이에 응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물건으로 북을 두드리고, 몽동이로 징을 치는 것과 같다. 북은 하늘과 같고, 몽둥이는 정치와 같다. 종소리와 북소리는 하늘이 응답하는 것과 같다. 군주가 아래에서 정치를 하면 하늘의 기는 사람에 따라서 이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의심스러운 것이다. 대체로 하늘이 개별자를 움직일 수는 있으나, 개별자가 하늘을 움직일 수도 있을까?(…)인간이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것은 마치 벼룩이 옷 속에 있는 것과 같고, 개미가 굴 속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벼룩과 개미가 이리 뛰고 저리 날뛰지만 옷 안과 굴 속의 기를 움직일 수가 있겠는가? 벼룩과 개미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런데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개별자와 기의 이치를 명확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왕충 <논형>-
가장 깊은 침체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갑작스레 죽음의 실체를 포착한다. 표현 불가능한 의식의 한계, 언어화가 불가능한 형이상학의 실패, 그것이 죽음이다.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무식한 노파의 한숨이 철학자의 현학적 말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에밀 시오랑 <독설의 팡세>-
요즘 상을 받았다는 시를 보면, 무슨 놈의 시가 그렇게 어려운지. 소설도 그렇고. 어려운 글은 심오한 글이 아니라 못쓴 글이야. 근데 사람들은 어렵게 쓰는 걸 좋아해. 난해하게 써야 존경을 하지. 내 글은 쉽고 술술 넘어가는데, 그걸 가볍다고 해. 사실 돌아온 사라도 최대한 쉽게 가려고 몇 번을 고치고 고친 거야. 우리나라는 작가들이 문장으로 독자를 고문하고 있는데도, 그걸 존경해. 쉽게 말해서 한국 독자나 비평가들은 마조히스트야.
-마광수(대학내일 2011년 5월 둘째 주판(5.9~5.15) 인터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