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신에 빠져있는 비참한(키케로의 표현) 자들은 죽음이라는 확실한 방법 앞에서 자꾸 ‘자살은 신에 대한 의무 위반’이라는 공포 때문에 자살을 실제로 행하지 못하고 비참한 삶을 계속 이어간다.
2. 자살이 범죄라면 그것이 신에 대한 의무의 위반, 사회에 대한 의무의 위반, 나 자신의 의무에 대한 위반 셋 중 하나여야 되는데 셋 다 아니라는걸 논증하겠다.
3. 전능한 창조주(신)는 두 가지 세계의 법칙을 다루는데 하나는 물질 세계의 법칙(중력, 우주법칙), 다른 하나는 동물 세계의 법칙(생각, 감정, 의식)이다. 그리고 이 두 세계는 독립된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작용하며 동물 세계가 물질 세계의 법칙을 변형시킬때도 있다.
4. 만약 자살이 신이 만들어놓은 법칙을 변형하고 침범해서 범죄인거라면, 생명을 파괴하는것 만큼이나 생명을 연장하는것 역시 똑같이 범죄일 것이다. 물질과 운동의 법칙들이 내게 배정해 둔 기간을 내가 인위적으로 연장시켰기 때문이다. 강의 흐름을 바꾸는 것이 범죄가 아니라면 피 몇 온스를 자연스러운 통로에서 돌리는건 왜 범죄인가?
5. 신의 섭리를 원망해야 할 쪽은 오히려 고통과 질병, 수치에 짓눌린채로 존재를 계속 연장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당신이다. 인간의 행위 역시 신의 작용이라면 내가 자살하는것도 신의 손에서 죽음을 받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당신이 요구하는 ‘섭리에의 복종’은 내가 인간의 능력과 노력으로 불행을 피하거나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왜 자살을 치료법으로서 사용하지 못하는가?
6. 집을 짓고 땅을 경작하며 바다를 항해하는 것 역시 자연의 경로에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낸다. 자살이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범죄라면 이 행위들도 똑같은 수준의 범죄여야 한다.
7. 만약 내가 태어난것이 신의 동의를 통해 이루어진것이라면 내 죽음도 신의 동의 없이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고통이나 슬픔이 내 인내를 압도하게 됐을때 그건 신이 자살해도 된다는 신호를 보낸 것일수도 있다.
8. 피조물이 신의 섭리를 침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거야말로 신성모독이다. 그것은 그 피조물이 창조주를 넘어선 권력과 능력을 지녔다고 가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9. 자살한 사람은 더 이상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 선을 행하지 못할 뿐이다. 만약 그것이 해악이라면, 가장 낮은 종류의 해악일 뿐이다.
10. 나는 나 자신에게 큰 해가 되는 대가를 치르고서 사회에 작은 선을 베풀 의무는 없다.
11. 내가 더 이상 공공의 이익에 기여할 수 없고 사회에 짐만 된다면 그때는 자살이 칭찬받을 일인가?
12. 중요한 기밀을 털어놓지 않으면 고문하겠다는 위협 속에서 기밀을 지키기 위해 자살하는 경우에서도 자살은 죄인가?
13. 사형수가 사형에 대한 공포를 덜어내기 위해 형벌을 앞당길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형을 명령한 자보다 섭리를 더 많이 침범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자살은 사회에서 해로운 구성원이 사라진거니 유익하다.
14. 죽음에 대한 공포는 너무 커서 삶이 붙들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쉽게 자살하지 않는다고 나는 믿는다. 자살에는 신중함과 용기가 필요하다.
흄 vs 칸트
언뜻 보면 칸트의 주장과 상충되는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기자신을 수단으로 대우하지 말라고 했던 칸트도 정작 사형은 찬성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사형이 고통받는 인격 안의 인간성을 끔찍하게 만들 수도 있을 모든 가혹 행위에서 범죄자를 벗어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에 응보적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범죄자 자신에게도 차선이라는 논리다. 게다가 https://pdfs.semanticscholar.org/5376/e11161545ea76ad8b3d537c7ee4d265e2e55.pdf?utm_source=chatgpt.com
48페이지에 따르면 “생명 그 자체보다 존엄, 인간성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구절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 칸트는 이미 비참한 삶 vs 상대적으로 존엄한 죽음 중에서 후자를 택할수도 있다는걸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맹목적인 생명 연장이라는 목적을 위해 내 정신을 수단으로 쓰는건 옳은가?
개인적으로 쇼펜하우어의 논지는 애매모호하다고 느꼈다. 자살이 삶 전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특정 조건에 대한 부정일 뿐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그게 어떻게 자살을 반대하는 근거가 된다는건지 모르겠다. 애초에 의지를 부정하려 했던 이유가 의지가 고통을 증폭시키기 때문에 그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면 만성적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이 자살을 선택지 중 하나로 고려히는것도 결국 고통 최소화라는 같은 목적을 향한 것인데? 그리고 쇼펜하우어의 철학도 결국 조건의 산물 아닌가? 만약 의지가 고통을 전혀 증폭시키지 않았다면 그때는 그럼 의지를 긍정할 건가? 쇼펜하우어가 좋아하는 인도, 자이나교식 금욕주의의 가장 극단적 형태는 식욕 없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대로 굶어 죽는것인데 그것도 자살 아닌가? 차라리 필립 마인랜더가 더 일관성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