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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야 Dec 05. 2022

왜 그런 희생을 했나요, 뭘 위해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후기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는 나를 뮤지컬 덕후로 만든 인생작 중 하나이다. 2022년 한국 프로덕션으로 고대하고 고대하던 마이클리가 캐스팅 되었다길래 기대했는데...아뿔싸!


내가 캐나다로 유학을 오고 말았다.


다행이라 할지, 여기에서 또한 브로드웨이팀이 투어를 돌고 있었다.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곧장 표를 끊었다.


위대함과 바꾼 죽음 만족하시나
실수인가 계획인가 당신의 그 죽음은


단 한문장으로 이 작품을 정리하고자 한다면, 신이라 불리는 예수에게 빗엿을 날리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작품 속의 예수는 상당히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구원을 바라는 수백만의 백성들을 피해, 그저 하룻밤 편이 차고 싶어하는 한낯 청년일 뿐이다. 자신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하늘을 향해 분노하며 손가락질하고, 그토록 믿었던 아버지에게 버림받아 마지막 순간까지 무기력하게 죽어간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종교란 사회의 필요에 따라, 삶과 죽음등;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 삶에 대한 공허함과 무의미함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입장이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는 그런 나와 상당히 유사한 관점을 공유한다. 예수라는 유약했던 한 인물이 사회의 필요에 의해 신이라 포장되고, 잔혹했던 죽음 뒤에 '희생'이라는 목적의식이 주어졌다.


몇달 전인가, 이태원에서 일어난 참사에 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표했다. 하지만 일부, 자신의 선택으로 놀러가다가 죽은 것 뿐인데, 왜 애도해야 하나...등의 의견 또한 있었다. 그들의 주장은 이러했다; 세월호 참사의 경우 수학여행을 갔다가 불가피한 죽음을 맞은 것이고, 이태원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는 묻고 싶다.


그날 이태원에 있었던 이들 중 단 한명이라도 그러한 참사를 예상한 이가 있었을까?


나는 적어도 그 사람의 심성이나 죄 또는 사회적 지위와는 상관없이 죽음만은 모든 이에게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은 이가 강간범이든, 마더 테레사든 상관없이 모든 이에게 슬퍼할 권리가 있다. 그 사람이 한 업적, 또는 살아온 삶에 따라 생명이 수단삼아 진다면, 사람이라는 존재는 사회를위한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사람이란, 떳떳한 주체여야만 한다.


무엇보다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분들은 무고하고 평범한 누군가의 아이, 친구가 아니었던가.  


언론은 그들에게 꼬리표를 붙였다. 하지만 묻고 싶다. 그것이 외국 명절이든 아니든 젊은 나이에 나가 놀고 싶은 것이 도대체 왜 잘못이란 말인가.


더욱 화가 났던 것은, 그들의 죽음이 sns 또는 무분별하게 퍼지는 유튜브 렉카등을 통해 '소비'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 중 몇몇은 진정한 마음으로 애도하는 것이 아닌, 슬퍼하는 자신, 공감 능력 높은 자신에게 심취되어, '말'로서 이용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족분들과, 희생된 분들을 향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극 중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라 부르는 빌라도에게 말한다.


그건 당신의 말이야


어쩌면 그의 죽음을 '희생'이라, 한낯 사람이었던 그를 '신'이라 칭한 것은,


예수 그 자신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죽인 당시 대중이 붙인 말이다.


마치 이태원, 세월호 등의 비극적인 참사를 우리의 입맛대로 해석한 우리처럼 말이다.


나는 인간에게 신이 필요하지 않다고 믿는다. 설령 신이 존재한다고 해도 말이다. 큰 그림, 목적 따위 대신 하루 하루를 충실히 살아내고 싶다. 삶에 있어서 불가피한 비극, 죽음, 공허함, 그리고 고통 등에 또한 의미를 부여하는 대신, 그 자체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감히 다른 이가 나의 시간을 함부로 해석하도록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내겐 인간다움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애국이나, 정의, 또는 엄벌주의등의, 누군가를 수단삼아 큰 뜻을 이루려는 그 모든 피상적인 개념에 또한 접목된다.


나는 내 자신을 희생하기도,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켜서라도 알지도 못하는 정치적 변화 따위를 이루어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삶을 존중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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