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지나간 손길, 이어진 마음

인연의 나비효과

by Grace Lim

몇 년 전 알게 된 한 여성 화가분은 지금 돌이켜봐도 내 인생에서 참 소중한 인연이었다. 마치 아주 조용히 내 삶에 들어왔다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멀어진 관계. 하지만 그 짧은 만남은 내 작업과 삶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공예를 시작한 13년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은 늘 특별했고, 그분과는 작업방식이나 일상에 대한 태도,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묘한 공감대가 있었다. 말이 없어도 통하는 순간들. 서로 다른 재료와 도구를 쓰고 있었지만, 그 안에 깃든 진심이 닮아 있었다.


기술을 가르쳐 준 스승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을 다듬고, 내 손끝에 머무는 감각을 키우는 데 있어 그분과 나눈 대화, 작업, 사소한 교류들은 매우 큰 자양분이 되었다. 당시엔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함께 있는 시간이 그저 즐겁고 편안했다. 우리가 그렇게 잘 맞는 건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고, 그 인연이 길게 이어질 거라는 막연한 믿음도 있었다.


하지만 인연은 언제나 우리의 바람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특별한 갈등이나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서로의 삶이 바빠지고, 연락이 줄어들고, 점점 멀어졌다. 그때는 몰랐다. 왜 그렇게 되어버렸는지. 지금도 그 이유를 딱히 말할 수는 없다. 그냥, 그렇게 끝이 났다.


한참이 지난 지금, 나는 그 인연을 자주 떠올린다. 그분과 나눈 사소한 말 한마디, 서로의 작품에 조언과 피드백을 교환하며 즐거웠던 날들. 그런 장면들과 함께 그때 만들었던 작품들이 지금 내 작업실 한구석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공예는 눈에 보이는 기술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기억의 축적이라는 걸 그분을 통해 처음 배운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물론 내 노력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이런 사소하지만 진심 어린 만남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움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던 말, 행동, 분위기들이 내 안에서 씨앗이 되어 자라났다. 그리고 그 씨앗은 때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나의 방향을 결정짓는 힘이 되었다.


공예의 길은 고독한 길이기도 하다. 혼자 앉아 수없이 반복되는 동작을 익히고, 실패와 성공 사이에서 묵묵히 균형을 잡아야 하는 나날. 그런 길 위에서 누군가의 한마디, 작은 격려는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 내가 지금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의미 있는 공예가의 삶은 없을 것이다.


그분과의 인연이 오래가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 시절 서로에게 진심이었음을 나는 안다. 나도, 그리고 그분도 각자의 자리에서 여전히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리라 믿는다. 삶이라는 길 위에서 언젠가 다시 마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주치지 못하더라도, 그 따뜻했던 기억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지금도 새로운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때로는 짧고, 때로는 길게 이어지는 인연 속에서 누군가에게 작게나마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작업이, 나의 말이, 내가 걸어온 과정이 누군가에게 위안이 되고 용기를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공치사를 하지 않아도,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아니어도, 그냥 옆에서 조용히 응원하는 손길.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손끝에서 이어지는 인연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듯, 나 또한 누군가의 작업에 작은 빛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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