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물 금 디지털 자산 전환 / 출처 : 연합뉴스
금고에 잠들어 있던 금이 스스로 돈을 버는 시대가 올까.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안전자산인 금이 이제 단순한 가치 저장 수단을 넘어 이자를 창출하는 금융자산으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
사상 최고가 행진을 벌이고 있는 금의 지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세계금협회(WGC)의 파격적인 구상이 공개되며 시장의 이목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3일, 세계금협회가 실물 금을 디지털 자산으로 전환해 거래와 결제, 담보로 활용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보도했다. 이자나 배당 없이 오직 시세 차익에만 의존했던 금의 본질적인 한계를 뛰어넘겠다는 것이다.
금값은 최근 온스당 3600달러를 돌파하며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지난 3년간 가치는 두 배 가까이 치솟았다. 중국, 러시아 등 각국 중앙은행이 달러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금을 대거 사들이고, 인플레이션 헤지 수단으로 주목받은 결과다.
실물 금 디지털 자산 전환 / 출처 : 연합뉴스
하지만 이런 화려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금은 이자를 낳지 못하는 ‘비수익 자산’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 세계금협회는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들었다. 데이비드 테이트 세계금협회 최고경영자(CEO)는 FT와의 인터뷰에서 금의 시장 접근성을 넓히기 위해 디지털화는 필수라고 강조했다.
그는 “디지털 형태의 금을 표준화함으로써, 다른 금융 시장의 상품들을 금 시장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라며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했다.
협회가 제시한 핵심 개념은 ‘공유 금 이익(PGI)’이다. 이는 투자자들이 분리된 계좌에 예치된 실물 금의 소유권을 디지털 형태로 쪼개어 사고팔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디지털화된 금은 선물·옵션 거래 시 추가 증거금을 내야 하는 ‘마진콜’의 증거금이나 다른 투자를 위한 담보로 사용될 수 있다. 금을 보유하면서 동시에 추가적인 금융 수익을 얻을 기회가 생기는 셈이다. 이 새로운 디지털 금 상품은 내년 1분기 런던거래소에서 시범 거래될 예정이다.
실물 금 디지털 자산 전환 / 출처 : 연합뉴스
세계금협회가 이처럼 급진적인 변화를 추진하는 배경에는 깊은 위기감이 자리하고 있다. 비트코인으로 대표되는 가상자산과 각종 스테이블코인이 새로운 안전자산의 지위를 넘보며 금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금을 기반으로 한 ‘테더골드’나 ‘팩스골드’ 같은 스테이블코인이 출시된 바 있다. 하지만 두 상품의 운용 규모를 합쳐도 23억 달러 수준으로, 4000억 달러에 달하는 금 상장지수펀드(ETF) 시장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
세계금협회는 개별 기업이 아닌, 시장을 대표하는 기관으로서 ‘표준화’를 통해 제도권 금융 안으로 디지털 금을 편입시키겠다는 전략이다.
실물 금 디지털 자산 전환 / 출처 : 연합뉴스
하지만 보수적인 금 시장이 이 같은 혁신을 순순히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금 거래소 불리언볼트의 에이드리언 애쉬는 “금은 이미 최고의 성과를 내는 자산”이라며, 이번 구상이 “존재하지 않는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으려는 시도처럼 느껴진다”고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실물 금의 최대 장점인 ‘거래상대방 위험’이 없다는 점이 디지털화 과정에서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디지털 증표 발행 기관이나 보관 기관에 대한 새로운 신뢰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수천 년간 인류의 가장 믿음직한 자산이었던 금이 디지털 시대의 도전을 넘어 새로운 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지, 전 세계 투자자들이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