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테이프

by 장원석

어린 시절 엄마는 비디오 가게에서 일주일에 세네 번 정도 비디오를 대여해 왔다. 아들 둘 엄마의 육아 비법이자 나름의 일탈은 나와 동생을 마루에 앉혀놓고 평소 자신이 보고 싶어 하던 만화를 함께 보는 일이었다. 어느 날 엄마가 심바와 티몬, 품바가 나오는 라이온킹을 한참 재밌게 보다 전화를 받았다. 비디오의 ‘멈춤’ 버튼을 누르고는 잠깐 윗집에 갔다 올일이 있다며 검은색 봉지를 들고 집을 비운 일이 있었다.

동생과 나는 합심이라도 한 듯 비디오의 ‘정지’ 버튼을 누르고 뒤이어 ‘꺼냄’ 버튼을 눌렀다. 비디오 기계가 비디오를 내뱉었다. 비디오는 네모난 모양으로 모자를 쓴 것처럼 딸깍이는 뚜껑이 달려있었다. 뒤편에는 톱니바퀴가 두 개 달려 있었는데 바퀴 같기도 안경 같기도 했다. “여기서 어떻게 사자가 나오고 티몬과 품바가 나오지?”, “형 그 많은 벌레들과 동물들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야?” 동생과 나는, 아니 유치원생인 동생은 그저 내 들뜬 호기심에 장단을 맞추었을 뿐이고, 부엌에서 은젓가락 두 개를 가져왔다. 젓가락 하나를 들어 손에 쥔 채 그것을 파헤쳐 보기로 했다. “이 안에 뭔가 대단한 게 들은 것이 분명해.”

처음엔 뒷 편의 톱니바퀴를 분해하려고 하려고 돌려보았으나 삐걱거리며 돌아갈 뿐 나사처럼 바퀴가 풀리거나 튀어나오지 않았다. 비디오테이프에는 여러 구멍이 있었기에 젓가락을 넣어 껍질 안 소라를 파헤치듯 여기저기를 들쑤셔 보았다. 무엇도 파헤쳐지지 못했다. 옆에 앉아 있던 동생도 흥미가 식어 식탁으로 눈이 향할 때쯤, 딸깍 거리는 뚜껑 부분이 들추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다.” 비디오테이프에 뚜껑을 열으려던 찰나 동생이 손을 붙잡는다. “형. 여기 진짜 티몬과 품바가, 심바가 있으면 어떻게?”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은젓가락 한 개를 동생의 작은 손에 쥐어 주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나머지 은젓가락을 오른손으로 꽉 쥐었다. “젓가락이 있잖아 괜찮아.” 뚜껑을 열자 까만 필름들이 보였다. 필름 안에는 검은 창문들이 작게 펼쳐져 있었는데 동생과 내가 얼굴을 가까이 대자 검은 창문에 동생과 내 얼굴에 담겼다.

작고 검은 창안에 갇혀 있는 우리의 모습은 무기력해 보였다. 동생이 한 손에 꼭 쥐고 있던 은젓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겁이 났으나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동생에게 말했다. “다들 창문 안에 갇혀 있네. 아무것도 아니잖아.” 떨리는 목소리로 목이 살짝 쉰 채 동생이 말했다. “형. 우리도 갇혀 있었어”

일탈에 갇혀 버린 동생과 내가 정신을 차린 건 테이프를 다시 기계 안으로 밀어 넣었을 때였다. 재생되어야 할 화면이 이상했다. 광활한 자연이 아닌 일그러진 무지개 및 화면만이 가득 티비를 채우고 있었다. 윗 집에 가서 감자를 가득 봉지에 담아 온 엄마가 티비를 보더니 내가 쥐고 있던 젓가락을 보며 호통치며 등허리를 찰싹 때렸다. “너 또 냉장고에서 김치 꺼내 먹었지!”

나는 이때 인생에서 비디오처럼 ‘멈춤’ 버튼이 있다면 멈추고 ‘되감기’ 버튼을 눌러 젓가락을 가져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생각이 너무 깊어 빨리 늙어버린 내가 더 이상 비디오를 찾지 않는 건 혹여 그때 ‘빨리 감기’ 버튼을 눌러 버린 것이 아닐까.

비디오테이프를 되감아 보고 싶다. 비록 등짝에 빨간 손자국이 새겨지겠지만, 엄마와 동생과 함께 비디오를 보던 때로. 삶은 감자를 은젓가락에 하나씩 꽂고 뜨거워하며 입에 가져다 대며 심바와 티몬과 품바를 보던 그때로. 비디오테이프의 한 장면과도 같은 그 검은 필름 속으로, 무지개 빛 가득하던 고장 난 비디오테이프 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