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1)
예언자 무함마드의 탄생과 죽음
초창기 메소포타미아 문화가 발달한 과정은 이집트 문화의 성장과정과는 차이가 있었으며
이러한 차이는 지형학적 차이에서 유래했다.
이곳에는 초창기부터 1000년도 넘는 세월 동안 여러 차례 반복된 패턴이 하나 있었으니,
유목민과 도시 정착민 사이에서 복잡한 싸움이 반복되면서 갈수록
더 큰 제국이 탄생하는 것이었다.
정복, 합병, 확장, 퇴락, 정복, 이게 바로 그 패턴이었다.
고대 로마 제국과 비교했을 때 비잔티움은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그 영토 안에서는 둘도 없는 강대국이었다.
이는 대개 비잔티움과 경쟁할 상대가 없는 데에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이
아마도 세계에 알려진 최고의 난공불락 도시였기 때문일 것이다.
6세기 중반 무렵 비잔티움은 소아시아 대부분과 현재 동유럽이라고 부르는 일부 지역을 지배했다.
비잔티움은 그 지역의 또 다른 초강대국인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인접했다.
사산왕조는 히말라야 산맥 기슭 동쪽까지 뻗어 있었다.
두 제국 사이에는 지중해 해안을 따라 좁고 긴 분쟁지역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두 세계의 역사가 중첩되면서 오늘날까지도 고질적인 분쟁이 이어져오고 있다.
이것이 이슬람이 태어나기 직전 그 지역의 정치적 상황이다.
6세기 후반, 대부분의 아랍인은 다 신교도였고,
반면 유대인은 뜻을 굽히지 않고 계속 유일신을 믿었음에도
서로의 문화와 생활방식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 지역에 사는 유대인은 아랍어를 사용했고,
부족의 구조도 아랍 부족과 비슷했다.
일부 아랍 부족은 유목민인 베두인족이라 사막에 살았지만,
나머지 아랍 부족은 마을을 이룬 정착민이었다.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는 홍해 연안에 자리한 거대한 국제도시 메카에서 나고 자랐다.
무함마드는 570년 무렵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그가 뱃속에 있을 때 세상을 떠났고,
그의 어머니는 무함마드가 여섯 살 때 유명을 달리했다.
고아였던 무함마드는 처음에는 할아버지가
그 뒤에는 삼촌인 아부 탈리브가 맡아 아들처럼 키웠다.
세월이 흘러 25세가 되었을 때 무함마드는 부유한 미망인 사업가 카디자의 눈에 들어,
그녀의 상단과 사업을 지휘하는 일을 맡았으며, 그녀와 결혼했다.
그 당시 아라비아는 일부다처제로 아내를 한 명 두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무함마드는 카디자가 살아 있는 25년 동안 다른 아내를 두지 않았다.
예언자로서 무함마드는 그 당시 유흥 사업으로 배를 불리는 부족의 권력자들에게는 눈에 가시였고,
그의 지원자였던 삼촌 아브 탈리브와 아내인 카디자가 세상을 떠나자
이들은 무함마드를 암살하기로 결정했다.
622년 9월 이들이 무함마드를 암살하기로 한 날,
무함마드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은 메카 북쪽으로 400킬로미터 떨어진 홍해 인근 도시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 사는 아트리트족이 무함마드를 중재인이자 도시의 가장 높은 권력자로 초대했기 때문이다.
무함마드는 까다로운 부족들을 참아내며 메디나 협정이라는 최초의 성문법을 만들었으며,
도시의 이름도 메디나로 바꾸었다.
무슬림이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사건을 히즈라(헤지라)라 하며,
이 사건은 무슬림들에게 운명의 전환점이 되었다.
히즈라 이전의 무함마드는 개별 추종자들의 설교자였지만,
이후에는 법을 제정하고 정치의 방향을 제시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628년 무슬림들은 메카로 돌아가서 아무런 폭력사태 없이 성지순례를 했다.
2년 뒤에 메카의 원로들은 평화롭게 무함마드에게 메카를 넘겼다.
그 후 무함마드는 다시 메카로 순례를 떠났고,
메디나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들어,
오랜 친구 아부 바르크의 딸이자 그의 부인 아이샤의 무릎에 머리를 얹은 채 숨을 거두었다.
사진출처 구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