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2)
4명의 칼리프 시기
무함마드의 사후 첫 계승자 네 명(아부 바르크, 우마르, 우스만, 알리)이 다스리는 시기가 이어졌다.
무함마드의 몸이 미처 식지도 않았을 때,
메디나 토박이와 메카 출신 이주민들이 별도의 집단인 양,
그들 만의 지도자를 선출하려는 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부 바르크는 무함마드 측근들을 모아 그 회의를 중단시킨 다음, 공동체 지도자를 이끌 한 명의 지도자 선출 작업에 들어갔고, 그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아부 바르크를 칼리프로 선출했다.
칼리프는 ‘대리인’이라는 뜻이다.
아부 바르크와 우마르하지만, 이 회의가 진행 중인 시기에 계승자의 주요 후보자 중 한 사람인 알리는
죽은 무함마드의 몸을 씻고 있었고,
알리가 그 논의에 대해 들었을 때에는 이미 후계자 결정이 이루어진 뒤였다.
알리의 아버지 아부 탈리브는 무함마드를 아들처럼 키웠으며,
사실상 알리는 무함마드의 형제와 다름없었다.
게다가 메카에서 마지막 설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무함마드는 사람들에게
“나를 수호자로 여기는 사람은 알리를 당신의 수호자로 여겨야 한다.”라고 말해
무함마드의 권위가 알리에게도 나타났다.
그리고 무함마드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그의 딸 파티마는 알리와 결혼했으니
알리와 파티마는 무함마드의 가족이었다.
당시 알리는 서른 살이었고, 아부 바크르는 예순에 가까웠다.
아부 바르크와 알리 지지자들 사이의 이견은 이슬람의 분파,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누어지는 시발점이 되었다.
아부 바크르가 칼리프가 된 지 2년이 지난 어느 날,
뜨거운 목욕탕에서 나와 세찬 바람을 맞았는데 그날 해질 무렵 고열이 났다.
죽음이 가까웠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우마르를 계승자로 지목했다.
우마르는 절제하는 아부 바크르와는 달랐고,
완전 대머리였으며 얼굴이 불그레하고 황소처럼 강했으며 성미가 여간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이 남자가 과연 칼리프직을 맡을 수 있을지 불안해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알리가 나서서 우마르를 지지함으로써 그들의 두 번째 지도자로 우마르를 받아들였다.
우마르는 10년 동안 움마를 지휘했으며 이슬람 시학의 진로를 정하고
이슬람을 정치적인 이념으로 정립하고 이슬람 문명에 고유의 특질을 부여했으며
종국에는 로마제국보다 더 큰 제국을 건설했다.
우마르의 인생은 정서가 불안정한 페르시아 노예가 모스크에서 우마르의 배에 칼을 꽂으면서 끝이 났다.
우마르의 임종 자리에서 계승자를 지명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그는 여섯 명으로 구성된 슈라(이슬람 공동체의 의사결정 협의체)를 지명해서
새로운 칼리프를 선택하고 움마(이슬람교 신앙공동체)의 동의를 얻게 했다.
그들은 알리와 우스만을 후보자로 선택했고,
독자적인 판단과 스스로의 양심을 따르겠다는 알리보다 선례를 따르겠다는
우스만을 선택해 우두머리로 선포했다.
우스만은 무함마드의 12촌의 아들로, 68세에 이슬람의 세 번째 칼리프로 취임했다.
우스만의 아버지는 메카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상인으로
우스만은 스무 살에 아버지의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았다.
사업에 재주가 있었던 그는 서른이 되기도 전에 무려 받은 재산을 몇 배로 불려서
‘부자 우스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무함마드가 설교를 시작한 지 약 1년이 지났을 무렵이자,
히즈라가 일어나기 9년 전에 우스만은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우스만이 개종하자 그의 가족들은 분개했고,
두 아내는 개종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들과 이혼하고,
예언자 무함마드의 딸 루카이야와 결혼했고,
나중에 그녀가 죽자 이번에도 무함마드의 딸 움쿨툼과 결혼했다.
3대 칼리프 우스만은 자신은 금욕적인 생활방식을 지켜 나갔지만,
관료들에게 금욕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총애하는 이들에게는 보조금을 여기저기에서 내줬으며,
공공사업에 돈을 아끼지 않고 썼다.
우스만이 가장 총애하는 사람들 중에 사촌인 무아위야가 있었다.
앞선 2대 칼리프 우마르가 무아위야를 다마스쿠스와 주변지역의 총독으로 임명했는데,
무아위야는 자신의 세력을 조금씩 넓혀 유프라테스강 상류부터 지중해 연안을 따라 내려가
이집트에 맞닿는 지역까지 다스리고 있었다.
12년 동안 지속된 우스만의 통치가 후반으로 갈수록 제국 곳곳에서 불평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집트에서는 우스만의 수양 형제 압둘라가
돈 때문에 사람들을 너무 쥐어짠 나머지 폭동이 일어났다.
이집트의 유력인사들이 칼리프에게 직접 청원하려고 대표자를 메디나로 보냈고
칼리프는 자신의 수양 형제를 총독직에서 교체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대표단이 돌아가는 길에 만난 칼리프의 노예가 지닌 편지에 사절단이 이집트로 궁으로 돌아오면
그들을 체포하고 처형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편지를 본 사절단이 격노해서 메디나로 다시 들어가 우스만에게 칼리프 자리에 물러나고
나은 사람에게 자리를 물려주라고 요구했다.
우스만이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서재로 들어가 쿠란을 읽고 있을 때
격노한 폭도들이 궁안으로 밀려들어와 자신들의 지도자를 찾아내어 때려죽였다.
마침내 모두의 생각은 여러 차례 탈락되었던 한 명의 후보자이자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에게 집중했고,
결국 알리가 칼리프직을 수락했다.
혼란의 시대에 칼리프직을 맡은 알리는 여러 적들과 맞서 싸워야 했고
무아위야는 알리와의 동맹을 공식적으로 거부했으며,
칼리프의 지위가 자신의 것이라고 선언했다.
무아위야 파와 계속된 싸움을 타협으로 종결하기를 원했던 알리에 반대한 하리지파는
알리가 스스로 자격을 허비했으니 물러 나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알리가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자 성미 급한 젊은이가 알리를 암살했다.
알리의 지지자들은 알리의 아들 하산이 계승자가 되어 주기를 기대했지만,
무아위야는 하산에게 거액을 주고 칼리프직을 포기하게 함으로써
이슬람 세계에 우마이야 왕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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