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3)

우마이야 왕조 & 아비스 왕조

by 산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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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무아위야는 칼리프 칭호를 달았고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

그의 큰아들 야지드를 다음 칼리프로 선택했다.


야지드가 왕좌를 물려받았을 때

그는 아버지가 반란의 요인들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그저 눌러 두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무렵 알리의 큰 아들인 하산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동생 후세인이 살아 있었는데,

야지드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후세인을 암살하기로 결심했다.


자신을 다른 곳도 아닌 카바에서 죽일 계획이라는 사실을 안,

후세인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72명의 군사를 이끌고 메디나를 떠났다.

야지드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둘째 손자가 움직인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급파해서 후세인의 머리를 베었다.


야지드는 이제 문제를 해결했고 다시는 문제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알리의 아들 후세인을 죽인 사건은 시아파라고 불리는 들 불이 되어 번져 갔으며,

알리가 첫 번째 칼리프였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정체성을 키워갔다.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 있는 시아파는 후세인이 죽은 날을 추모하며

애도의 날로 보낸다.
후세인을 믿으면 금이나 높은 지위나 사랑에서 행운을 얻지는 못하지만 천국에 갈 수는 있다.
이것이 바로 후세인이 이룬 기적이었다.




무아위야는 성인이 되기에는 자질이 부족했지만

정치적인 면에서는 굉장한 수완이 있었다.


고뇌하던 알리를 몰아 내버린 바로 그 자질로 무아위야는 성공적인 왕조를 세웠으며,

그의 치세 기간 동안 관습이나 절차를 제도화해서

이후 수 세대에 걸쳐 이슬람 제국을 하나로 유지하는 기틀을 세웠다.

그리고, 야지드의 후손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우마이야 왕조를 통치했다.


그들은 이슬람 세계에서 확고한 권력을 실타래처럼 엮어냈으며,

세력을 확장해 서쪽으로는 스페인, 동쪽으로는 인도에 이르렀다.


우마이야 왕조의 통치 아래에서 이슬람의 교리는 다듬어졌고

글로 기록되었으며 암호서로 봉인되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인은 셈족이 아니라 인도유럽어족이었다.
그들에게는 나름의 고대 문명과 자랑스러운 역사 정복할 수 없는 언어가 있었다.


이슬람에서는 모든 무슬림이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내건 약속이었다.
그러나 우마이야 왕조가 지배하는 사회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그 사회의 지배자인 아랍인은 귀족들이었다.


가장 위에는 순수 아랍계 무슬림이 있었으며,

가장 낮은 계층은 다신교도였다.

신분이 낮은 계급에게는 아무런 법적 권리도 없었다.


이렇게 구분된 사회 계층 사이에서 특히 아랍계 신흥 귀족들과 예전 페르시아 귀족들 사이의

마찰 때문에 불만이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이슬람 세계의 양심을 괴롭히는 어두운 면이 있었다.

무슬림의 역사에게 소박하고 검소하게 살았던 초기 지도자들의 소박함과 검소함은

종교적 지도자들이 관심을 받는 본질적인 요소였다.


하층민 사이에는 우마이야 사회의 온갖 사치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서서히 퍼져 나갔다.


이런 환경 속에서 시아파는 여전히 이맘의 이름을 걸고

반란을 계획했으며,

알리의 후손이 힘을 얻는 것을 목표로 모반을 일으켜서 무슬림 군주들의 정통성을 깎아내렸다.
이런 관점에서 시아파와 페르시아 민족이 연결되는 공통점이 존재했다.


페르시아인은 시아파의 교의를 받아들였으며,

시아파는 페르시아 동부에서 새로운 구성원을 찾았다.


두 세력이 섞이면서 반란의 기운이 달이 올랐는데,

우마이야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동쪽으로 갈수록 커졌고,

메르브에서 아부 무슬림이라는 사내가 선동의 선두에 섰다.


사실 아부 무슬림은 이라크에 뿌리를 둔 비밀결사조직 하시미테가 매르브로 파견한 직업 혁명가였다.

대담하고 무자비하며 카리스마 넘치는 아부 무슬림은 지도자로 부상했고,

혁명을 일으킬 군사를 훈련시켜 하시미테 교리에 빠지게 했다.


750년 아부 무슬림과 검은 옷의 전사들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황제의 군대를 무찔렸으며

우마이야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는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이집트로 도망쳤지만

첩보원들이 칼리프를 찾아내어 죽였다.

하시미테는 아바스가 새로운 이슬람의 새로운 칼리프라고 선포했다.


아바스는 우마이야 집안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한다고 모아 놓고

사형집행관들을 풀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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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집안을 청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바스는 천연두에 걸려 죽고

동생인 알 만수르가 자리를 넘겨받았다.

만수르는 아부 무슬림이 여전히 사병을 거느리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를 저녁식사에 초대해서 다음날 경호원을 시켜 목을 베고 시체를 강에 버렸다.

그리하여 이슬람 칼리프 조의 두 번째 아바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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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세계의 발전과정




<아바스 왕조>

아바스 왕조가 들어선 초기,

시아파들은 자기들의 권리를 아바스 왕조가 인정해 줄 것이라 믿었지만,

알리 일족의 사냥은 아바스 왕조에서 오히려 심했다.


아바스 왕조의 세 번째 칼리프가 죽었을 때

칼리프의 궁전에서 비밀의 방을 찾아냈는데

그 방의 지하실에는 세 번째 칼리프가 잡아 다 죽인 알리 일족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아바스 왕조는 우마이야 통치기에 좋았던 모든 것을 극대화하였다.
우마이야 왕조의 화려함과 역동성이 아바스 왕조 시대에 점점 커져서

아바스 왕조의 첫 200년을 이슬람의 황금시대라고 기억한다.

아바스 왕조

만수르는 몇 년 동안 영토를 돌아보며 새로운 수도를 세울 입지를 물색했고,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가까운 바그다드를 선택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인구 100만이 넘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로 건설했다.


아바스 왕조가 권력을 잡았을 때,

우마이야 집안사람들을 꾀어내어 방 하나에 모아 놓고 때려죽였다.


그 잔치에 가지 않은 젊은 우마이야 씨족 압둘 라흐만은 변장을 하고 다마스쿠스를 빠져나와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먼 변방인 스페인 안달루시아에 도착했다.


라흐만은 그곳 지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고,

극렬 젊은이들이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안달루시아 사람들은 여전히 우마이야 집안이 통치자라는 것에 익숙했으므로

별 저항 없이 압둘 라흐만을 그들의 통치자로 인정했다.

그리하여 스페인 코르도바를 수도로 칼리프조와 분리된 독립국이 성립되었다.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가 수니파로서 제국을 다스리기로 하자,

시아파는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969년 튀니지에서 온 시아파 전사들이 이집트 통치권을 차지했고,

그들이 예언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후손이므로 진정한 이슬람의 칼리프라고 선포하면서

파티마 왕조라고 이름을 붙였다.
파티마 왕조의 통치자들은 새로운 수도를 세우고 그 이름을 카이로라고 했다.


요컨대, 밀레니엄이 다가올 무렵의 이슬람 세계는 세 조각(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프조,

카이로의 파티마 칼리프조, 안달루시아 코르도바 칼리프조)으로 나뉘어 있었다.


각 칼리프조는 자기네가 유일한 정통 칼리프조라고 주장하였는데,

사실 칼리프조라는 단어 자체가 ‘유일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혼란스러웠던 이슬람 세계에 아사신 집단은 더 큰 불안감을 조성했다.
당시에 수니파는 시아파와 분투를 벌리고 있었다.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프조는 카이로의 파티마 칼리프조와 티격태격했다.
거의 한 세기 동안 이어진 튀르크족의 침략으로 사회는 황폐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사신이라는 살인자 집단이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1092년 아사신은 은퇴한 지 얼마 안 된, 니잠 알 물크를 살해하고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술탄 말리크 샤를 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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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095년 무렵, 보편 공동체를 이루려는 이슬람의 꿈은 정치적으로도 실패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재앙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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