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클레르몽이라는 프랑스 수도원 옥외에서 열띤 연설을 했다. “젊은이들이여, 동쪽으로 가라!
사회가 너희들을 훈련한 대로 무시무시한 살인기계라는 너희의 진정한 자아를 마음껏 풀어주고
아무런 죄책 감 없이 호주머니를 금으로 채우고
너희들이 소유할 권리를 타고난 땅을 차지해라. 그 모든 행적의 결과로 죽은 뒤에 천국으로 들어가라!”
우르바누스 2세는 동쪽으로 향하는 유럽인들이 십자가 모양의 붉은 천조각을 달아 상징으로 삼았고,
그것이 바로 크루세이드 즉 십자군이다.
그리스도교 기사들은 마라를 포위해 절망적인 상태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포위한 기사들도 인근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먹어 치우고 굶어 죽을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마침내 십자군 지도자들은 마라로 전갈을 보내서 성문을 열고 항복하면
한 명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마라에 입성하자마자 대학살보다 더 심한 짓을 저질렀다.
그들은 무시무시하게 미쳐 날뛰면서 무슬림을 잡아 다가
어른은 끓여서 수프로 만들고 아이는 쇠꼬챙이에 꿰어서 불에 구워 먹었다.
놀랍게도 이렇게 뼈저린 패배를 겪은 뒤에 조차 무슬림들은 연합하지 못했다. 이미 십자군의 명성이 널리 퍼졌기 때문에 그들이 진군하는 경로는 거의 비어 있었다.
예루살렘은 가장 높은 성벽을 두른 도시 중 하나였지만,
40일 동안의 포위 끝에 십자군이 마라에서 썼던 계책을 쓰자,
그 방법은 예루살렘에서도 먹혔다.
예루살렘을 확보하자 십자군은 피를 뿌리며 아수라장을 벌였고 이틀 동안 7만 명을 죽였다.
십자군 전쟁 경로
예루살렘 점령은 십자군 침략의 정점이었다. 승리를 거둔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왕국으로 선언했다. 예루살렘 왕국은 십자군이 세운 안티오크 공국, 에데사 백작령, 트리폴리 백작령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십자군이 처음 왔을 무렵, 무슬림 모두가 아사신을 미워했다. 시아파, 수니파, 샐주크 튀르크,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 아바스 칼리프 조가 모두 아사신의 적이었다. 하지만, 십자군도 같은 무리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따라서 아사신과 십자군은 같은 일군의 적을 상대했으니,
불가피하게도 그들은 사실상 동맹이었다.
1113년에 모술 총독이 무슬림 지도자들의 회의를 소집해
십자군에 맞서는 연합 군사작전을 조직하자고 했다. 하지만 회의가 열리기 직전 수도사가 다가와 가슴팍에 칼을 꽂아 넣었다.
1124년 아사신 첩보원이 새로운 지하드를 설교하던 두 번째로 영향력 있는 성직자를 살해했다. 이듬해에는 수피로 추정되는 무리가 지하드를 주장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전도사를 살해했다. 이런 식으로 살인은 십자군 초기에 깜짝 놀랄 만큼 많이 일어났다.
이런 혼란 속에서 마침내 전세를 십자군에게 불리하도록 바꾼 것은
튀르크의 장군인 장기였다.
그는 모술을 통치했으며 알레포를 차지하고 여러 도시를 차례로 흡수해
규모가 큰 무슬림 국가를 만들었다.
장기의 아들이며 계승자인 누르딘에게는 그의 아버지에게는 부족했던 여러 자질들이 있었다. 아버지의 군인다운 기상이 누르딘에게 있었지만
그는 세련되고 외교적이며 독실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무슬림들을 하나의 신앙으로 단결하도록 이끌었으며
지하드를 그들 인생의 핵심 목표로 세웠다.
다음 차례의 훌륭한 통치자 살라딘은 누르딘의 최고 장군의 조카였다. 1163년 누르딘은 이집트가 십자군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살라딘의 삼촌을 파견했는데,
그 장군은 살라딘을 이집트로 데리고 갔다. 장군은 이집트를 성공적으로 점령하였지만 직후에 죽어서 29세의 살라딘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살라딘이 이집트의 통제권을 잡을 당시 파타마 왕조의 칼리프는
병약한 20살의 어린 나이로
명목상 통치자일 뿐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허약하고 젊은 이집트 칼리프가 자연사해서
파타마 왕조는 막을 내렸고 이집트의 유일한 통치자는 살라딘이 되었다.
아사신은 살라딘을 죽이려고 온갖 애를 섰다. 그들은 두 번이나 살라딘이 자는 침실로 침투했지만 죽이지는 못했다. 살라딘은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자신의 명성으로 백성들을 결속하고 적을 약화시켰다. 그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 포위와 경제적 압력, 협상으로 십자군 점령지의 대부분을 찾았다.
1187년 마침내 예루살렘을 되찾을 차례가 되었을 때,
살라딘은 도시를 평화롭게 양도하라는 제안서를 십자군 지도자에게 보냈다.
십자군이 제안을 거절하자
살라딘은 도시를 포위해 무력으로 빼앗고
예루살렘을 탈환하면서 제1차 십자군의 성과를 모조리 원상태로 돌려놓았다.
그 후, 서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군주 셋이 제3차 십자군을 조직했다.
그중 독일의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는 성지로 가던 도중 말에서 떨어져 강물에 빠져 죽었고,
프랑스 군주 필립 2세는 성지에 도착해 아크레 항구를 점령하는 전투에 가담하고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마지막 남은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는 살라딘과
‘그리스도교의 성소를 보호하고 그리스도교도가 예루살렘에 살면서 괴롭힘 당하는 일 없이
자신의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하며,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한다’는 협정을 맺고는 돌아갔다.
보통의 역사가들은 십자군이 200년 동안 여덟 차례 있었다고 헤아리지만,
사실 십자군은 그 기간 동안 아주 적은 규모라도 계속 오가고 있었다.
그중 여덟 차례가 통행량이 많았는데,
대개는 군주 한 명이나 연합한 군주들이 십자군을 보냈다.
십자군이라는 재난이 잦아들 즈음에
첫 번째보다 훨씬 큰 참사를 빚어낼 두 번째 공격이 시작되었다.
<몽돌족의 침략과 오스만 제국>
1165년 명석하고 카리스마 있는 테무진이 태어났다. 역사는 그를 칭기즈칸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한다.
테무진의 아버지는 몽골의 족장이었지만 그가 아홉 살일 때 살해당했다. 테무진은 어려운 시절을 보냈지만 살아남아서 아버지의 적들을 후회하게 만들었다.
1211년 칭기즈 칸은 중국 금나라를 칼로 치즈를 자르듯 휩쓸고 지나갔고
1218년 아랍세계에 나타났다.
셀주크가 무슬림 세계를 점령한 후,
국경지대에 독자적인 왕국이 개척되었고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남서부에 걸친 지역에
호라즘 왕국이 부상했다.
호라즘 왕 알라우딘 무함마드는 오만하게도 몽골족을 가르치기로 마음먹고
자신의 나라를 지나가던 몽골 족 상인 450명을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워서 죽이고 물건을 빼앗고는,
그중 한 명을 도망치게 해서 그 소식을 칭기스칸에게 전하게 했다.
몽고의 군주는 세 명의 사절을 보내 배상금을 요구하게 했지만,
알라우딘 무함마드는 그때 정말 큰 실수를 저질렀다. 사절 중 한 명은 처형하고 다른 두 명은 턱수염을 뽑아버린 뒤, 돌려보낸 것이다.
턱수염을 뽑아버리는 것은 그 지역에서 가장 심한 모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왕은
싸우고 싶어 안달이 나서 일부러 상대를 모욕했고,
그 일 때문에 1219년 대재앙이 시작되었다.
알라우딘 무함마드는 칭기즈 칸보다 훨씬 많은 병력을 가졌지만,
그의 군대는 쓸모가 없었다. 칸은 호라즘 군대를 박살 내 버렸고 알라우딘 무함마드는 목숨만을 건지려고 도망쳤다. 몽골족은 호라산과 페르시아로 행군해 대학살을 벌였다.
몽골족이 니샤푸르를 약탈하면서 174만 7000명을 죽였으며
개와 고양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였다.
칭기스칸은 몽골족이 약탈을 끝낼 때까지 살지 못했다.
1227년 칭기즈 칸이 죽고 그의 아들과 손자들은 제국을 나눠가진 뒤, 대학살을 이어갔다.
바그다드 공격은 1258년 2월 3일에 시작되었다. 2월 20일에 바그다드는 그저 정복당한 정도가 아니었다. 거의 완전히 사라졌다.
몽골족은 왕족의 피를 보는 것을 금했으므로
칼리프와 그 일가를 양탄자에 말아서 죽을 때까지 발로 찼다.
몽골족이 일으킨 대학살은 유럽의 암흑시대처럼 천천히 왔다가 서서히 잦아든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14세기 유럽을 휩쓴 흑사병이나 20세기에 전 세계를 망쳐버린 세계대전처럼
끔찍하지만 짧게 폭발하듯 일어났다.
몽골 침략 지도
수피 교단은 무슬림 세계 곳곳에서 빠르게 증식했지만,
특히 소아시아, 아나톨리아라고도 불리며 오늘날 터키가 있는 지역에서 가장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몽골족이 휩쓸고 간 이후 이슬람의 복원이 바로 그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훌라구 칸이 바그다드를 파괴한 1258년에 아나톨리아의 주도적인 가지 집안에서
오스만이라는 소년이 태어났다. 그리고 오스만 리스 혹은 오토만이라고 불린 오스만의 후손들이 강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강대해진 오스만은 주변의 가지 에미리트를 정복하거나 통째로 사들여 흡수하기 시작했다.
무라트 1세는 흑해를 건너 유럽지역을 야금야금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의 통치기(1350-1389)에 오스만 왕조는 더 이상 말에서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이슬람의 예배와 화려함, 비잔티움 궁정의 의식은 물론이고
높은 이슬람 문명의 외양까지 갖추었다.
다른 오스만 통치자인 바야지드 1세(1389-1402)는
유럽의 그리스도교 지역에서 생포한 소년들을 궁으로 데려와 병사로 훈련시켰고
이들을 ‘예니체리’로 불렀다.
바야지드 1세는 유럽으로 점점 더 깊이 습격을 감행했다.
1396년 프랑스 왕과 헝가리 왕은 바야지드를 저지하려고 힘을 합쳐 군대를 조직했지만
바야지드는 이 연합군을 불가리아의 소도시 니코폴리스에서 쳐부수었다.
바야지드 1세가 동서를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는 속도가 얼마나 빨랐던지
사람들은 그를 번개라 불렀다. 그러는 동안 바야지드 1세는 카이사르처럼 오만해졌다.
그러자 모든 것이 무너졌다.
동쪽으로 침략전을 벌였을 때, 바야지드 1세는 자신보다 더 강한 전사와 부딪혔으니
바로 무시무시한 티무르 이랑이었다. 1402년 앙카라 부근에서 티무르는 오스만 군대를 짓밟고,
바야지드 1세를 포로로 잡아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에 있는 자신의 은신처로 끌고 갔다. 절망과 모욕을 견디지 못한 바야지드는 자살했다.
오스만 왕조는 그렇게 끝날 것 같았지만,
몇십 년 안에 티무르는 죽었고 티무르의 제국은 빠르게 분열되었다.
반면에 오스만 왕조는 기운을 차리는 데에서 끝나지 않고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1452년 술탄 메흐메트가 황제에 오르면서 오스만 왕조는 한 단계 더 높이 도약했다. 21세에 왕좌에 오른 술탄 메흐메트는 그보다 더 강하고 나이 많은 경쟁자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릴 필요가 있었고,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기로 마음먹었다. 콘스탄티노플 포위는 45일 동안이나 계속되었지만 그 도시는 난공불락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콘스탄티노플의 세 번째 성벽이자 가장 난공불락인 성벽 한쪽 쪽문을
누군가 잊고 잠그지 않는 바람에 튀르크인 몇 명이 들어가서,
그 지역을 확보한 다음 큰 성문을 여는 순간
서방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제국의 견고한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일순간 불길 속으로 무너졌다.
오스만 제국
오스만 왕조는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양쪽에 상당한 영토를 차지한 제국을 건설했다. 오스만 왕조는 통치기 150년 동안 독특하며 새로운 사회체제를 빚어냈다.
아나톨리아에 거주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무정부 상태에서 뒤섞이면서,
시계태엽 장치처럼 복잡하지만,
서로 맞물린 부분이 균형을 이루며,
동시에 자극제 역할을 하고 서로를 점검하는 사회로 통합되었다.
이전에는 이런 사회가 없었으며 이후에도 다시없었다.
오스만 제국이 노쇠기에 접어들자,
서로 얽힌 모든 부분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단체들은 장애요소가 되었다. 연결관계가 복잡하다는 말은 한 곳에서 문제가 생기면
수십 개의 다른 분야로 종잡을 수 없이 확산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나중에 일어났다. 16세기 오스만 제국은 근사하게 돌아가는 기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