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5)

시아파 이란의 탄생, 무굴제국 그리고 민족국가의 탄생

by 산내

<시아파, 이란의 탄생>

시아파 교리에서는

역사의 끝에서 열 두번째 이맘이 모습을 드러내

알라의 공동체가 완벽해지도록 불을 붙일 것이며,

모든 선한 무슬림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인 정의의 시대를 열 것이라고 단언했다.


오늘날 이란인 대부분이 시아파 중에서도 이 분파를 신봉하니

열 두 이맘파는 현대 시아파의 주류이다.


몽골족의 재앙이 휩쓸고 지나간 뒤에 사파비라고 알려진 호전적인

시아파 종교집단은 곳곳에서 일어나는

반국가적, 혁명적인 운동과 쉽게 연계될 수 있었다.


사파비 교단 때문에 지방 군주들이 불안해했으며,

1488년 지방 군주 중 한 명이 사파비 교단의 수장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 다음에는 사파비 수장의 큰 아들도 살해했다.
둘째 아들 이스마일은 키질바시가 암살자들을 피해 숨겼다.

그 뒤로 10년 사파비 교단은 무시무시한 비밀단체로 담금질해 갔다.

이스마일은 끊임없이 은신처를 옮겨 다니며 자랐다.

그러는 내내 키질바시 조직은 이스마일을 명목상의 수장이 아니라

교단의 진짜 수장으로 떠받들었다.


이스마일이 열 두 살일 때

그는 키질바시 병력을 거느리고 은신처에서 나왔다.
그는 아버지를 죽인 군주를 재빠르게 해치웠다.


열다섯 살 때인 1502년,

이스마일은 스스로 이란의 ‘샤한 샤’라고 선언했다.

샤한 샤는 ‘왕들의 왕’이라는 뜻으로 고대 왕조에서 사용한 칭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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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일은 ‘칼리프나 술탄’이라는 칭호를 거부해

아랍계와 튀르크의 역사적 전통을 거부했으며

그 지역 원주민인 페르시아계의 정체성을 지지했다.


또 이스마일은 자신의 영토를 이란이라고 호칭해 오래전 사산 왕조의 피를 물려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스마일은 또한 ‘열 두 이맘파’ 시아파를 국교로 선포해 이웃나라와 자신의 나라를 구분했다.

이스마일은 그의 지배하에 있는 수니파를 극심하게 박해했다.


그의 행동에서 광기를 느끼고 허둥지둥 오스만 제국으로 이주한 수니파도 있었다.
남아 있던 수니파는 대부분 투옥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었던 잔인한 셀렘은

이스마일의 수니파 탄압에 대한 앙갚음으로 오스만 제국내 시아파를 가두거나 처형했다.
그러니 당연히 수니파가 서쪽의 아나톨리아로 도망쳤듯이

시아파는 동쪽의 페르시아로 피신했고

후대에 근대국가 이란으로 발전해 나갈 핵심을 구성했다.





<무굴 왕조>

무굴1.jpg 무굴제국

무굴 왕조는 부와 세력으로 봤을 때, 오스만 왕조에 버금가는 왕조였다.


현재 세계 인구 중 약 20%가 과거 무굴 제국의 영토에서 살고 있으며,

그 안에는 다섯 개의 나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 미얀마의

전체 또는 일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남자는 사파비의 이스마일과 거의 동시대 사람으로

이름은 호랑이라는 뜻인 ‘바부르’였는데

어떤 면에서는 사파비의 비범한 십대 소년, 이스마일보다 더 놀라운 인물이었다.


바부르의 아버지는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바로 북쪽에 있는 작은 왕국인 파르가나를 통치했는데,

1495년 아버지가 죽으면서 바부르가 왕좌를 물려 받았고

그때 12세였다.


1504년 바부르는 카불의 왕으로 즉위했고,

1만명을 거느리고 인도로 가서 10만 명을 데리고 나온 델리의 술탄과 파니파트 평원에서 맞붙었다.

하지만 바부르에게는 유리한 점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총이다.
무굴 왕조가 적을 압도한 이유도 창과 화살에 맞서 총알과 대포알로 싸웠기 때문이다.


무굴 왕조에는 재능 있으면서 장수하는 통치자들이 연달아 나오는 행운이

사파비 왕조보다 더 크게 따랐다.
무굴왕조 초기 200년 동안,

단지 6명의 황제가 제국을 다스렸다.


무굴 제국의 창의성은 건축분야에서 정점에 도달해,

단단하고 위엄 있는 오스만 양식과 공기처럼 가벼운 사파비 양식이 결합되었다.

무굴의 다섯 번째 군주 샤 자한은 건축분야의 천재였다.
그가 거둔 정치와 군사에서의 성취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부인 뭄타즈 마할이 그가 왕위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자,

그 뒤 20년을 바쳐서 영묘를 건설했으니 그것이 바로 타지마할이다.

샤 자한의 아들이며 위대한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 아우랑제브는 예술적인 성향이 전혀 없었다.
샤 자한의 재위기간 막바지에 아우랑제브는 아버지에 맞서 전쟁을 벌여서 권력을 쟁취했다.


샤 자한은 높은 탑 위의 감옥에서 남은 여생을 보냈는데,

감옥의 창문에 비친 거울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타지마할 뿐이었다.


타지마할


<민족국가 태동과 이슬람 세계>

민족국가의 기원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의 백 년 동안 간헐적으로 전쟁을 계속해온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 모습을 갖추었다.


민족국가의 부상으로 하나의 정부가 그 영토에 사는 사람의

일상 모든 국면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세울 수 있는데,

그들은 아직 스스로 백성이라고 생각했지만 점차 시민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후대에 서양이 동쪽으로 왔을 때

칼처럼 단단하고 날카로운 민족국가들이

빵처럼 물렁물렁하고 부드러운 제국들을 쉽게 베고 들어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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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의 여파로 일어난 인도로 가는 해상로의 탐색은

유럽에서 민족국가가 부상하고,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개인을 역사의 무대에 중요한 등장인물로 올려놓은 시기,

즉, 근대 과학이 발전을 시작했을 무렵,

최고조에 올랐다.


1488년 포르투갈 탐험가 바르톨로뮤 디아즈가 희망봉을 돌아

대서양에서 인도양으로 항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계속 항해해 대서양을 건너서

그때까지 유럽이 모르고 있던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했다.

콜럼버스의 항해에 자금을 댄 스페인이 아메리카의 부를 가장 먼저 파고 들어가,

한 동안 유럽에서 최고로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


모순적이게도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온 금을 마음껏 소비한 탓에 유럽의 금 시장이 몰락하면서

스페인은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전략했다.

항해지도.png 신대륙 항해지도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입된 금은 유럽 전체를 쓸고 지나갔고,

이 현상으로 서유럽에서 중상주의가 태동했다.


아주 많이 팔려면 아주 많이 생산해야 한다.
아무 것도 사지 않으려면 자급자족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한 국가가 팔기만 하고 아무 것도 사지 않을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중상주의가 십자군에서 나온 유럽의 항해술,

그리고 세계를 탐험하려는 욕구와 교차한 지점이었고,

그 중상주의는 민족주의와,

민족주의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과,

종교개혁은 개인주의와,

개인주의는 르네상스 인본주의와 얽혀 있었다.


이처럼 서로 간에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영향을 주고받는 여러 방면의 발전이

유럽에서 1600년 무렵 정점에 올랐다.


놀랍게도 유럽의 이러한 발전을 이슬람 세계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무렵 이슬람 세계에서는 인도의 무굴 문명과 페르시아의 사파비 문화가 정점에 이르렀으며,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레반트, 히자즈, 이집트, 북아프리카에서

오스만 제국은 활짝 꽃 피우는 전성기를 막 통과한 참이었다.
그리고, 그 때 두 세계는 뒤섞이기 시작했다.


1500년부터 1800년 사이에 서유럽인들은

세계 전역을 거의 전부 항해했고 거의 전부를 식민지로 삼았다.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가 이런 운명으로 고통받았으며,

사실상 확장된 유럽 대륙이 되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원주민을 그대로 두는 대신

그들 위에서 중요한 자원을 모조리 통제하는 지배계층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남아메리카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대부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운명이었다.

하지만, 일부지역 즉 중국과 이슬람 중심부에서 유럽인들은 잘 조직돼 있고

기술적으로 발전한 사회와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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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도 회사와 식민주의>

1600년경 거대한 초기 주식회사가 세 곳의 유럽에 세워졌으니,

그들이 바로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의 ‘동인도회사’였다.
이들은 개인 주주가 있는 유한 책임 회사였다.


모두 각자의 주주들을 부유하게 하기 위해

동아시아에서 교역을 해 이윤을 낸다는 목표를 세우고 설립했다.
해당 정부는 그 회사에 동쪽의 이슬람 세계에서 장사를 할 해당 국가의 독점권을 주었다.


그리하여 페르시아, 인도, 동남아시아에서 이윤을 올리기 위해 앞다투는 본체는 바로 이 주식회사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영국인들이 다른 유럽 세력을 몰아내고 차지한 벵골지역에서는

동인도회사가 그 지역 공예산업을 거의 다 파괴해 버렸지만,

정작 자신들이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영국인들은 단지 아주 좋은 가격에 원자재를 잔뜩 사들였을 뿐이다.

그리고 인도 사람들은 원자재로 그들의 상품을 만들기보다

원자재 그대로 팔면 이윤이 더 많이 남는다는 것을 알았다.


원주민 경제가 무너지자 벵골 토착민들은 영국인에게 전보다 더 의존했고 결국에는 복종하게 되었다.


영국이 통치한 첫 몇 년은 벵골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동인도회사는 일상을 위한 행정은 지역 정부에 미뤄두고,

그들의 사업 이익과 관련된 사안에 집중했다.


동인도회사가 이익은 모두 거두어 가면서

그곳 사람들의 복지에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형국이었다.
이러한 약탈로 벵골지방에는 그 지역 인구 1/3을 죽게 한 기근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 기근으로 동인도회사의 이윤도 타격을 입었는데

이 시점에서 영국 정부가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영국 의회는 인도에 파견할 총독-장군을 임명했고

동인도회사를 통제했으며

인도에 병력을 보냈다.


얼마 안 가서 영국은 어느 지역의 인도 통치자가 남자 후계자가 없이 죽으면

영국 왕실이 그 통치자의 영토를 물려 받는다는 법령을 포고했다.


인도를 완전히 통제하게 된 시기에 영국은 북아메리카의 식민지를 잃었다.
영국의 콘 윌리스 장군은 요크 타운에서 조지 워싱턴에게 패배한 장군이었는데,

그는 인도의 두 번째 총독-장군으로 파견되어 인도를 영국의 지배체제로 통합했다.


인도의 광대한 자원을 손에 넣은 영국은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 전역 어디에서 든 식민사업을 확장하기 위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영국은 그들의 보석을 노리는 어떤 위협에도 아주 민감했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갈 무렵에 러시아가 이러한 위협의 상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영국과 러시아는 이란을 세력범위로 분할해서 러시아가 북쪽,

영국은 남쪽에서 지배하고

약탈할 권리를 가졌다.
이 협약으로 이란의 국경이 굳어졌고 그 경계선은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이 되었다.


두 차례의 앵글로-아프간 전쟁 이후에

러시아와 영국은 그 영토를 정복하기에는 대가가 너무 크다는 결론을 내려

사막에 임의로 그은 선 북쪽으로 영국이 밀고 올라가지 않는다면,

러시아는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는 협약을 체결했다.

영국과 러시아가 동쪽에서 세력 다툼을 벌리는 동안 19세기,

서쪽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무너져가는 오스만 제국의 한 조각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다퉜다.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프랑스혁명에서 배출한 나폴레옹으로

1798년 3만 4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향했을 때,

영국의 넬슨 제독이 뒤쫓았으며

프랑스 군대가 나일강에서 벌어진 영국군과의 해전에서 패하자

나폴레옹은 군대를 버리고 쿠데타를 꾀하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갔고

그 쿠데타로 프랑스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으며

그리고 전쟁은 계속되었다.


1850년 무렵, 한때는 그들 스스로 다르 알 이슬람이라고 부르던

세계 전체가 유럽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세계에서 유럽인은 상류층으로 살면서 한 지역을 직접 통치하거나 아니면

누가 통치할 것인지 결정했으며 지역민의 일상을 제한했다.
유럽인들은 그 세계에서 싸움이 벌어졌고 그들이 이겼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지만,

무슬림은 그들이 누구의 지배를 받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이즈티하드는 ‘이성에 기반한 자유롭고 독특한 사고’를 말한다.

쿠란에서 벗어나서는 안되지만 쿠란이 함축하는 의미를 창의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18세기 무렵에 유력한 학자들은 대부분 이제는 결정하지 않은 사안이 남아 있지 않다는 데에 동의했다.
모든 질문은 다루었으며 모든 것을 결정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고를 행사할 필요가 없었다.

정해진 규율에 따르기만 하면 충분했다.


그러나 규율에 따르는 실천만으로 사람들이 종교에서 얻고자 하는 영적인 성취를 이룰 수 없다.
제도화된 이슬람은 기독교 세계에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야기했을 때와

겨의 같은 무능과 불만족을 자아냈다.


그러다 18세기 중반 무렵, 개혁운동이 무슬림 세계 도처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18세기가 끝날 무렵, 무슬림들은 주위를 둘러보고

그들이 이미 정복당했다는 공포의 조짐을 느낄 수 있었다.
벵골부터 이스탄불까지, 무슬림의 삶은 외국인들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개혁가들이 나타나며 여러 갈래의 개혁운동이 일어났는데

그들이 제시한 대답은 크게 세 갈래로 분류할 수 있다.


압둘 와하브, 사이이드 자말루디니 아프간, 알리가르의 사이이드 아마드,

이들 세 사람은 각자 이슬람 세계에서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를 고민한 서로 다른 발상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19세기를 거치면서 이 세 가지 흐름의 변주가 셀 수 없이 진화하고 번져 나갔다.


그들의 발상이 그토록 설득력을 얻은 것은

당시 유럽에서 이슬람 세계의 중심부로 쏟아져 들어온 세 가지 현상 덕분이었으니

그것은 바로 산업화, 입헌주의, 민족주의였다.


이란의 근대주의자 지식인들은 이란이 진화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들의 불만은 200년째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 카자르 왕조에 있었다.
카자르 왕들은 이란을 거의 개인 소유물처럼 취급했다.
나라의 경제를 조금씩 떼어내어 외국인에 팔아버렸고,

그 돈으로 유럽에 호화 유람을 떠나는 등 자신의 사치와 유흥에 썼다.


하지만 근대주의의 물결이 높아지고 있었다.
1906년에 카자르 왕조의 샤 무자파르 알 딘이 마침내 굴복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극심하게 제한하는 헌법을 받아들이고 의회인 마즐리스를 구성하는 것을 허락했다.


무자파르 알 딘은 마즐리스가 처음으로 소집된 날부터 일주일이 지난 뒤에 죽었으며,

아들 무함마드 알리 샤가 왕위를 이었다.


마즐리스는 2년 안에 법령을 무더기로 통과시키면서

이란에서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비롯해 전반적인 시민의 자유를 위한 기반을 닦았다.


하지만, 미처 3년이 지나기도 전에 샤는 의회 건물을 대포로 날려버렸다.
‘옛날 방식으로 다시 해보자’고 천명하는 행동이었다.
울리마를 비롯한 모든 전통적인 조직은 샤를 응원했다.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이 다가올 무렵 이란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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