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6)
동닝도 회사 그리고 민족주의 태동
<동인도 회사와 식민주의>
1600년경 거대한 초기 주식회사 세 곳이 유럽에 세워졌다.
그들이 바로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의 ‘동인도회사’로
이들은 개인 주주가 있는 유한 책임 회사였다.
모두 각자의 주주들을 부유하게 하기 위해
동아시아에서 교역을 해 이윤을 낸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해당 정부는 그 회사에 동쪽의 이슬람 세계에서 장사를 할 독점권을 주었다.
그리하여 페르시아, 인도, 동남아시아에서 이윤을 올리기 위해 앞다투는 본체는
바로 동인도 회사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영국인들이 다른 유럽 세력을 몰아내고 차지한 벵골지역에서는
동인도회사가 그 지역 공예산업을 거의 다 파괴해 버렸지만,
정작 자신들이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영국인들은 단지 아주 좋은 가격에 원자재를 사들였을 뿐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인도 사람들은 원자재로 그들의 상품을 만들기보다
원자재 그대로 팔면 이윤이 더 많이 남는다는 것을 알았다.
원주민 경제가 무너지자 벵골 토착민들은 영국인에게 전보다 더 의존했고
결국에는 복종하게 되었다.
영국이 통치한 첫 몇 년은 벵골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동인도회사는 일상을 위한 행정은 지역 정부에 미루었고,
그들의 사업 이익과 관련된 사안에 집중했다.
동인도회사가 이익은 모두 거두어 가면서
그곳 사람들의 복지에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형국이었다.
이러한 약탈로 벵골지방에는 그 지역 인구 1/3을 죽게 한 기근이 발생했다.
하지만 그 기근으로 동인도회사의 이윤도 타격을 입었는데
이 시점에서 영국 정부가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영국 의회는 인도에 파견할 총독-장군을 임명했고
동인도회사를 통제하기 위해
인도에 병력을 보냈다.
얼마 안 가서
그 지역 통치자가 후계자가 없이 죽으면
영국 왕실이 영토를 물려 받는다는 법령을 포고했다.
인도를 완전히 통제하게 된 시기에 영국은 북아메리카의 식민지를 잃었다.
영국의 콘 윌리스 장군은 요크 타운에서 조지 워싱턴에게 패배한 장군이었는데,
그는 인도의 두 번째 총독-장군으로 파견되어
인도를 영국의 지배체제로 통합했다.
인도의 광대한 자원을 손에 넣은 영국은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 전역 어디에서든 식민사업을 확장하기 위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영국은 그들의 보석을 노리는 어떤 위협에도 아주 민감했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갈 무렵에 러시아가 이러한 위협의 상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영국과 러시아는 이란을 세력범위로 분할해서 러시아가 북쪽,
영국은 남쪽에서 지배하고 약탈할 권리를 가졌다.
이 협약으로 이란의 국경이 굳어졌고 그 경계선은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이 되었다.
두 차례의 앵글로-아프간 전쟁 이후에
러시아와 영국은 그 영토를 정복하기에는 대가가 너무 크다는 결론을 내려
사막에 임의로 그은 선 북쪽으로 영국이 밀고 올라가지 않는다면,
러시아는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는 협약을 체결했다.
영국과 러시아가 동쪽에서 세력 다툼을 벌리는 동안 19세기,
서쪽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무너져가는 오스만 제국의 한 조각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다퉜다.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프랑스혁명에서 배출한 나폴레옹으로
1798년 3만 4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향했을 때,
영국의 넬슨 제독이 뒤쫓았으며
프랑스 군대가 나일강에서 벌어진 영국군과의 해전에서 패하자
나폴레옹은 군대를 버리고 쿠데타를 꾀하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갔고
그 쿠데타로 프랑스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그리고 전쟁은 계속되었다.
1850년 무렵, 한때는 그들 스스로 다르 알 이슬람이라고 부르던
세계 전체가 유럽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세계에서 유럽인은 상류층으로 살면서 한 지역을 직접 통치하거나
아니면
누가 통치할 것인지 결정했으며 지역민의 일상을 제한했다.
유럽인들은 그 세계에서 싸움이 벌어졌고 그들이 이겼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지만,
무슬림은 그들이 누구의 지배를 받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이즈티하드는 ‘이성에 기반한 자유롭고 독특한 사고’를 말한다.
쿠란에서 벗어나서는 안되지만 쿠란이 함축하는 의미를 창의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18세기 무렵에 유력한 이슬람 학자들은 대부분은
이제는 결정하지 않은 사안이 남아 있지 않다는 데에 동의했다.
모든 질문은 다루었으며 모든 것은 결정되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고를 행사할 필요가 없었다.
정해진 규율에 따르기만 하면 충분했다.
그러나 규율에 따르는 실천만으로 사람들이 종교에서 얻고자 하는 영적인 성취를 이룰 수 없었다.
제도화된 이슬람은 기독교 세계에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야기했을 때와
겨의 같은 무능과 불만족을 자아냈다.
그러다 18세기 중반 무렵, 개혁운동이 무슬림 세계 도처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18세기가 끝날 무렵, 무슬림들은 주위를 둘러보고
그들이 이미 정복당했다는 공포의 조짐을 느낄 수 있었다.
벵골부터 이스탄불까지, 무슬림의 삶은 외국인들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개혁가들이 나타나며 여러 갈래의 개혁운동이 일어났는데
그들이 제시한 대답은 크게 세 갈래로 분류할 수 있다.
압둘 와하브,
사이이드 자말루디니 아프간,
알리가르의 사이이드 아마드,
이들 세 사람은 각자 이슬람 세계에서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를 고민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9세기를 거치면서 이 세 가지 흐름의 변주가 셀 수 없이 진화하고 번져 나갔다.
그들의 발상이 그토록 설득력을 얻은 것은
당시 유럽에서 이슬람 세계의 중심부로 쏟아져 들어온 세 가지 현상 덕분이었으니
그것은 바로 산업화, 입헌주의, 민족주의였다.
이란의 근대주의자 지식인들은 이란이 진화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들의 불만은 200년째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 카자르 왕조에 있었다.
카자르 왕들은 이란을 거의 개인 소유물처럼 취급했다.
나라의 경제를 조금씩 떼어내어 외국인에 팔아버렸고,
그 돈으로 유럽에 호화 유람을 떠나는 등 자신의 사치와 유흥에 썼다.
하지만 근대주의의 물결이 높아지고 있었다.
1906년에 카자르 왕조의 샤 무자파르 알 딘이 마침내 굴복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극심하게 제한하는 헌법을 받아들이고 의회인 마즐리스를 구성하는 것을 허락했다.
무자파르 알 딘은 마즐리스가 소집된 날부터 일주일이 지난 뒤에 죽었으며,
아들 무함마드 알리 샤가 왕위를 이었다.
마즐리스는 2년 안에 법령을 무더기로 통과시키면서
이란에서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비롯해 전반적인 시민의 자유를 위한 기반을 닦았다.
하지만, 미처 3년이 지나기도 전에 샤는 의회 건물을 대포로 날려버렸다.
‘옛날 방식으로 다시 해보자’고 천명하는 행동이었다.
울리마를 비롯한 모든 전통적인 조직은 샤를 응원했다.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이 다가올 무렵 이란의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