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7)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시오니즘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by 산내

<오스만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1894년부터 1896년 사이에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반아르메니아 학살이 잇달아 발생했다.


튀르크족 부락민들이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한 사건이었는데,

동유럽과 러시아에서 유대인을 학살했던 사건과 비슷했지만,

규모가 더 컸다.


광기가 잦아들 때까지 무려 3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죽었다.

학살이 진정된 것은 유럽인들이 오스만 정부에 압력을 가해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지만

오히려 그 폭력의 원천을 더욱 심화했을 뿐이다.


1912년 발칸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은 이스탄불 외에 보유하고 있던

마지막 유럽 영토인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를 빼앗겼다.

1913년 1월 23일 연합진보위원회가 쿠데타를 일으켜 이스탄불을 장악했다.


그들은 재임 중인 수상을 암살하고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술탄을 폐위시켰다.

모든 지도자를 몰아내고 그들 외의 모든 정당은 불법이라 선포하면서

오스만 터키를 일당독재 제국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유일 정당의 선봉에 선 3인조가

탈라트 파샤, 안바르 파샤, 제말 파샤였으며,

이들이 남은 오스만 제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sticker sticker

유럽에서는 그 전쟁을 세계대전이라 불렀지만

중간세계에서 보기에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힘을 합해

프랑스와 영국, 러시아에 맞선 유럽 내전처럼 보였다.


무슬림은 이 싸움에 조금도 관계가 없었지만 연합진보위원회 수장들은

이기는 편에 가담하여

큰 이득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독일이 승자가 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독일 편에 가담하면 숙적인 러시아, 영국과 싸울 수 있었다.


전쟁이 일어난 지 8개월이 지나 러시아 병력이 오스만 제국 북쪽 국경을 위협할 무렵,

연합진보위원회 수장들은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악명 높은 강제 퇴거령을 공표했다.


공식적으로 강제 퇴거령은 러시아 국경 근처의 아르메니아인을

오스만 제국 깊은 곳으로 이주시켜 러시아와 공동전선을 펼치지 못하게 하려는 조치였지만,

이는 아르메니아 민족 전체를 소아시아 튀르크족이 지배하는 지역에서 만이 아니라,

아예 지구 상에서 없애 버리려는 조직적인 학살의 시작이었다.


정확한 사상자의 수는 논란의 대상으로 남아 있지만 어림잡아도 100만 명이 넘는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탈라트 파샤가 그 학살을 주도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 지도


<아랍세계의 민족주의 운동>

당시 여러 세력이 일으킨 반란이 오스만 제국의 아랍 속주 이곳저곳에서 번지고 있었다.
아랍 민족은 민족주의 운동을 벌이며 튀르크족에게서 독립하고자 했다.


왕조를 세우고자 하는 세력 중에 두드러진 두 집안이 있었으니

와하브 성직자들과 여전히 동맹관계인 이븐 사우드 가문,

이슬람의 영적 중심지 메카를 다스리는 하시미테 가문이었다.

영국은 이 모든 불안 속에서 기회를 포착했다.


당시 하시미테의 장로는 후세인 이븐 알리였으며,

그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아라비아 해까지 펼쳐진 아랍왕국 건설을 꿈꾸고 있었고,

그 목표를 이루는데 영국인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국은 그들에게 그럴 능력이 있으며 기꺼이 그럴 용의가 있다고 믿게 만들었으며,

아랍어가 유창하고 베두인 의상을 즐겨 입어서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별명을 얻은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 대령을 샤리프와 함께 일하도록 파견했다.

돌이켜 보면, 영국인들이 여기서 얼마나 큰 난장판을 만들어 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하시미테와 사우디 집안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두 부족 세력이었다.

양쪽 모두 아라비아에서 오스만 지배 세력을 깨뜨리고 싶어 했고,

서로를 치명적인 경쟁 상대로 보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양 쪽 진영 모두에 첩자를 보내어 그들이 오스만을 상대로 싸우기만 한다면

독자적인 왕국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하지만, 영국 첩보원이 양쪽 아랍 가문과 약속을 하던 바로 그 시간,

영국과 프랑스의 두 외교관 사이크스와 피코는 비밀리에 만나 전쟁 후,

어느 부분을 영국이 가지고, 프랑스는 어느 부분을 가지며,

러시아의 이익을 어디다 두면 적당 할지에 관한 합의를 했다.


신기하게도 아랍인이 어느 부분을 가질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시오니즘>

그리고 지금껏 소개한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문제가 남아 있었으니

바로 유대 민족의 이민이었다.


시오니즘의 분기로 유럽에서는 반 유대 운동이 확산되었고,

결국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이 도저히 살 수 없게 되었다.


그 때문에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는 1883년에는 4%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에는 8%까지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거의 13%까지 증가했다.


1917년 영국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가 라이넬 로스차일드 경에게 편지를 썼다.
로스차일드는 영국의 은행가이자 주도적인 시오니스트로 레반트 지역으로 이주하는 유대인에게

그의 개인 자금을 넉넉하게 지원해 주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의 고향을 건설하는 일을 긍정적으로 살펴볼 것이며,

이 목표의 달성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영국은 동일한 영토를 하시미테, 사우디, 유럽의 시오니즘 세력에게 줄 것을 약속했는데

실제로 그 영토에는 다른 아랍인이 살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그 지역을 나눠 갖기로 비밀리에 약속했다.

이것이 장차 폭발을 일으킬 재료들이었다.


1918년 독일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하자,

세 명의 파샤는 큰 곤경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들은 체포영장 받기 직전에 이스탄불에서 도망쳤다.


탈라트 파샤는 베를린으로 갔지만, 1921년 아르메니아인이 그를 암살했다.

제말 파샤는 그루지아로 갔는데, 아르메니아인이 그를 암살했다.
엔베르 파샤는 중앙아시아로 가서 볼세비키당에 맞서는 반란을 선동했는데

아르메니아인 볼셰비키 당원이 그를 찾아내어 죽였다.


산내로고.png



이전 07화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