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탄생>
1919년 무렵 소아시아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병력이 우글거렸다.
그리스 민족주의자들이 이끄는 그리스 군대는 오스만의 중심부로 서서히 나아갔다.
이스탄불은 영국군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레지스 탕트의 움직임이 아나톨리아 곳곳에서 끓어오르더니
날카로운 눈빛과 매의 얼굴을 지닌 장군을 중심으로 연합해 나갔다.
무스타파 케말이라는 그 장군은 나중에 아나 튀르크,
즉 ‘튀르크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
아타튀르크 케말의 군대는 그 땅에서 외국인을 모조리 몰아내고
1923년 새로운 민족국가의 탄생을 선포했으니
바로 터키다.
터키는 부활한 오스만 제국이 되려고 세운 나라가 아니었다.
아나 튀르크는 오스만의 과거와 인연을 끊었다.
터키가 종교국가가 아니라고 스스로 선포해 공식적으로
정치와 종교를 분리한 무슬림이 다수인 최초의 나라가 되었다.
뼛속까지 근대주의자인 아나 튀르크는 자신을 왕이나 술탄이라고 선포하지 않았다.
그는 헌법을 새로 쓰게 하고,
의회를 세우고,
그를 대통령으로 삼은 공화정부를 수립했다.
그리고 1925년 그는 충격적인 선포를 해서 그의 세속적인 근대주의 혁명을 마무리했다.
아나 튀르크는 칼리프 조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아나 튀르크는 그 이후 반세기 동안 무슬림 지도자의 원형을 세웠다.
그리고 이란은 그 원형의 이란판을 내놓았다.
전쟁이 끝난 뒤 카르조 왕 사이이드 자말루디니는 게릴라의 폭동인 ‘정글의 혁명’에 직면했다.
왕의 병력은 두 개의 군대로 구성 되었는데,
하나는 스웨덴인 장교들이, 다른 하나는 러시아인 용병들이 지휘했다.
러시아에서는 그때 막 레닌이 권력을 잡았는데,
레닌은 이런 상황이 번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영국인들은 이란 왕이 볼세비키당을 진압하기에는 역부족이라 판단하고
이란인 대령을 도와서 이란 왕을 끌어내렸다.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1919년 아마 눌라라는 젊은이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이 젊은이는 아프가니스탄에 자유주의 헌법을 제정하고,
여성의 자유를 선포하고,
마찬가지로 베일, 턱수염, 터번을 금하는 등의 복장 규정을 공표했다.
이제 대중은 다른 누군가에게 기회를 주려는 참이었다.
미래는 세속 근대주의자들 손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속 근대주의는 19세기 무슬림 세계에서 유일하게 출현한 개혁주의 흐름은 아니었다.
와하비야 운동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여전히 살이 움직이고 있었고
그곳에 사우디아라비아를 건설해서 국가 권력을 잡았으며 이후에 더 많은 것을 이루어 냈다.
와하비야 운동도 오래전 과거의 신화적인 순간에 호소함으로써 경직되어 버린 현재를 거부했다.
와하비야 운동은 아라비아 반도 밖에서 교육받은
상류층이나 중산층을 상대로는 소득을 거두지 못했지만,
못 배우고 가난한 주민들에게 널리 전파되어 나갔다.
<무슬림 형제단의 탄생>
그러면 사이이드 자말루딘이 구현한 개혁주의자 풍조는 어떻게 되었을까?
자말리딘의 업적은 그의 제자 중 최고인 무함마드 아브두가 계승했는데,
아부두는 이집트의 천년 역사의 대학인 알 아즈하르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그는 스승의 사상을 한 조각씩 모아서 일관된 이슬람 근대주의 교리를 세웠다.
그리고 하산 알 반나가 등장했으니,
그는 자말루딘의 지적인 후손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일 것이다.
1928년에 하산 알 반나는 무슬림 형제단이라는 단체를 창설했는데,
애초에 그들은 무슬림식 보이 스카우트 같은 모임이었다.
하신 알 반나
무슬림 형제단 역사하산 반나는 동포 이집트인들이 가장 천한 계층의 노동자라 할지라도
유럽의 언어와 관습은 배우려고 진심으로 버둥거리는 것을,
서구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비굴하게 애쓰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집트인이 외국인을 선망하고 굴종하는 모습을 본 그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반나는 무슬림 형제단을 창설하여 무슬림 소년들이 건강하게 교류할 수 있도록,
그들 고유의 문화를 배우며 어느 정도 자존감은 지킬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다 소년들의 아버지와 형들도 센터에 들러기 시작하자,
형제단은 성인을 위한 저녁 강좌를 열었고,
그 강좌가 인기를 끌자 새로운 센터가 여러 곳에 문을 열었다.
1930년대 중반 무렵에는 애초의 목적을 훌쩍 뛰어넘어 남성을 위한 형제회로 성장했다.
여기서부터 무슬림 형제단은 서서히 정치적인 운동으로 변모해,
세속적인 이슬람과 이집트의 ‘서구화된 상류층’을 나라의 주적이라고 선포했다
<1차 세계대전 종결과 아랍 국가의 탄생>
하지만 민족주의가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지역은 아랍의 심장부였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승자들은 세계를 재편성하기 위해 프랑스 베르사유에 모였다.
그 회의 서문으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미국 하원에서
14개 조 평화원칙을 제안하는 연설을 했는데,
아랍인들에게 가장 흥분되는 부분은 모든 사람의 자치권이 존중받고 수용되어야 한다고
선언한 대목이었다.
윌슨은 또한 중립적인 ‘국가들의 연맹’을 창설하자고 제안했는데,
국제적인 사안을 판정하고 중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미국은 이 단체에 가입하지 않았다.
국제연맹이 일에 착수하자 제1차 세계대전의 유럽 전승국들은
연맹을 그들이 뜻하는 대로 움직이는 도구로 재빨리 바꾸어 놓았다.
예를 들어서, 원칙적으로 국제연맹은 아랍 세계의 자치권이라는 발상을 지지했지만,
현실에서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시행해 아랍 세계를 영국과 프랑스에게 넘겼다.
프랑스는 신탁통치령으로 시리아를 차지했으며,
영국은 나머지 ‘중간 세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프랑스는 자기네 신탁통치령을 시리아와 레바논으로 나눴는데,
프랑스가 특별 고객으로 여기는 마론파 그리스트교를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인위적으로 만든 나라였다.
영국에게도 역시 유용한 아랍 반란을 주도했던 하시미테 집단부터 만족시켜야 할 고객들이 있었으니,
예전 오스만 지역의 세 곳을 묶어서 이라크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하시미테 고객 중 한 사람을 왕으로 세웠다.
그 행운의 사나이는 메카 셰이크의 둘째 아들 파이살이었다.
하지만, 파이살에게는 압둘라라는 형이 있었다.
형은 나라를 갖지 못했는데 동생이 나라를 갖는 것이 적합해 보이지 않았으니
영국은 신탁통치령에서 나라를 하나 더 잘라내어 압둘라에게 주었다.
그것이 요르단이다.
이븐 사우드는 아라비아 반도의 80%를 점령했다.
예멘과 오만을 비롯해 해안지역의 몇 안 되는 에미르 토후국만이 이븐 사우드의 손아귀에 떨어지지 않았다.
유럽 열강들은 이븐 사우드에게 빚 문서가 있어 전혀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1932년 이븐 사우드는 자신이 차지한 영토를 새로운 자주독립국 사우디아라비아로 선포했다.
유럽 신탁통치령에서 새로운 나라 네 곳이 만들어졌고,
다섯 번째 나라는 스스로 등장했으며, 이집트는 가짜 독립을 얻었다.
아랍주변 지도<팔레스타인 문제>
하지만, 질문 하나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팔레스타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팔레스타인은 누구의 나라인가?
이곳의 정성적인 인구의 거의 90%를 구성하며,
수 세기 동안 이곳에서 살아온 아랍인의 나라인가?
아니면, 인구 대부분이 지난 20년 사이에 유럽에서 이주해 왔지만,
2000년 전에 조상들이 이 땅에 살았던 유대인의 나라인가?
아랍인의 답은 명백했다.
이곳도 역시 아랍 국가가 되어야 했다.
유대인 이민자에게도 답은 명백했다.
세계 곳곳에서 유대인은 위험에 처해 있으며,
팔레스타인만이 그들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땅이니
이 땅은 확실히 유대인의 땅이 되어야 했다.
게다가, 영국 외무장관 벨푸어가 유대인을 위한 국가 건설을 도우겠다는
잊을 수 없는 약속을 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