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9)
석유의 등장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석유의 등장>
역사상 최초로 큰 유전을 발견한 곳은 19세기 미국의 펜실베이니아와 캐나다였지만,
그 무렵 석유로 만들어내는 생산물은 케로신뿐이었다.
케로신은 램프를 밝히는데 쓰였지만 당시 소비자들은 고래기름을 선호했다.
1901년 이란에서 위리엄 녹스 다시라는 영국인 시굴자가
중동 최초의 큰 유정을 찾아냈다.
그는 즉시 이란 석유의 독점권을 당시 카자르 왕에게서 사들였고,
그 대가로 상당한 금액의 현금을 왕의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하지만 이란이 자기네 석유를 거저 넘겨 버린 바로 그때,
새로 발명된 내연기관 때문에 석유의 중요성이 급등하기 직전이었다.
외연 기관은 불에 타는 것이면 어느 것이든 작동하여 실제로 나무나 석탄을 사용했지만,
내연기관은 정제된 석유로만 작동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처음으로 탱크와 석유를 연료로 사용하는 함선,
폭탄을 떨어뜨리는 비행기가 사용되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석유 동력의 무기가 더욱 정교해질 것이며,
그게 누가 되었던 석유를 가진 자가 세계를 손에 넣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란에는 그 깨달음이 너무 늦게 찾아왔다.
윌리엄 다시는 이미 이란 석유 채굴권을
영국 정부가 소유한 회사(지금의 브리티시 페트럴리엄(BP))에 팔았다.
그러는 한편 그 영국 석유회사는 로열 더치 셸과 미국의 이익단체들과 힘을 합쳐서,
초강 기업(터키 석유회사)을 건설하고
페르시아만에 연한 오스만 지역에서 석유를 찾기로 발의했다.
그런 다음 영국은 이라크를 세워서 그들의 고객인 하시미테에게 맡겼다.
그 오일 컨소시엄은 즉시 이라크의 파이샬 왕에게 이라크의 오일 독점권을 따내려고
교섭에 들어갔으며 파이살은 기꺼이 그 요구를 받아줬다.
협상에서 이라크는 20%의 지분을 원했지만,
톤 당 고정 수수료를 받기로 결론을 내렸다.
1927년 이러한 사안에 모두 합의한 뒤에,
이라크 최초의 거대한 유전을 찾아냈다.
9년 뒤 아지즈 이븐 사우드도 그의 영토 안에서 석유를 발견했다고 공표했다.
사실 사우디 아라비아가 세계에서 석유 보유량이 가장 많다는 것이 밝혀졌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밸트가 이븐 사우드를 만났고,
그 뒤 양국이 충실하게 지키고 있는 합의점에 도달했다.
미국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석유를 무제한 얻을 보장을 받았고,
사우디 왕가는 그들의 권력을 지키는 데에 필요한
미국의 군 장비와 기술을 무제한 지원받기로 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폭력의 역사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폭발이
1939년에 시작하여 6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휘몰아쳤다.
이번에도 독일은 프랑스와 영국에 맞서 싸웠다.
미국은 늦게 참전했지만 판도를 결정지었다.
러시아는 이제 소비에트 연방이었고,
오스만은 없어졌으며,
일본은 강대 해졌다.
하지만 이 피바다는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했던 일을 마무리 지었을 뿐이다.
민족주의와 민족 국가주의가 대립하는 가운데 문제가
가장 심각한 지역을 하나 고른다면 팔레스타인,
곧 이스라엘이라고 알려지게 될 곳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그리고 그 이전에도 나치가 민족 대학살을 자행해,
유대인을 절멸시키려고 들면서 시오니스트들은 가장 끔찍한 공포를 경험했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은 이탈리아 유대인에게 공포를 안겼고,
독일이 세운 프랑스 정부는 그들의 주인인 나치를 위해 유대인 사냥을 했다.
폴란드와 다른 동유럽에서는 수용소를 운영하는데 협조했고,
스페인과 벨기에 등 유럽의 어느 나라도
그 기간에 유대인에게 저지른 범죄에서 결백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유럽에 발목이 묶인 수백만의 유대인이 쓰러져갔다.
도망칠 수 있는 유대인은 열려 있는 방향이 어디든 도망쳤다.
배를 가득 채운 유대인 피난민들이 상륙할 땅을 찾아 세계의 바다를 표류했다.
유대인 피난민들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곳이 팔레스타인이었다.
그곳에는 일찍이 이민 온 유대인들이 땅을 사서 정착촌을 꾸리고
어느 정도의 사회 기반시설을 발전시켜 놓았다.
1945년 무렵, 팔레스타인의 유대 인구는 거의 아랍 인구와 맞먹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 속에서 미국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정치기구를 창설하는 움직임을 주도했고,
그중 하나가 UN이었다.
1947년 UN은 그 분쟁지역을 나누고,
새로운 두 나라를 세워서 그 싸움을 해결하자는 제안서를 작성했다.
그 제안서대로라면 예루살렘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별개의 국제 도시가 될 터였다.
새로운 두 나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영토 면적은 거의 같았다.
이것은 다투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으레 강요하는 해결 방식이다.
하지만 아랍인은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유럽의 문제 때문에
유럽식 해결책이 그들에게 강요된다고,
더 정확하게는 유럽인이 유럽인에게 저지른 범죄에 대한 보상으로
아랍인 땅을 내놓으라고 한다고 느꼈다.
주변지역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 동포들을 동정했지만
전반적인 세계는 그렇기 않았다.
그 안건이 총회에 부쳐졌을 때, 비 무슬림 국가 다수는 분할에 찬성했다.
이스라엘의 존재는 아랍계 든 비 아랍계 든 무슬림에게,
또한 일반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유럽이 우월한 힘을 행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인더스강과 이스탄불 사이의 세계에서는 거의 어느 지역에서 든 이렇게 생각했다.
<이스라엘 탄생과 6일 전쟁, 그리고 이집트의 나세르>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했다.
아랍 군대는 그 새로운 국가가 첫 숨을 내쉬기도 전에 짓밟을 결심으로
삼 면에서 공격해 들어갔다.
하지만 적을 짓밟은 것은 도리어 이스라엘이었으니,
그들은 아랍의 적수들인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 군대를 패주 시켰고,
그로 인해 사산아가 된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이었다.
1948년 완패에 가담했던 한 남자가 이집트 육군 장교인 가말 압델 나세르였다.
나세르 나세르는 이집트 남부에서 우편집배원 아들로 태어났는데,
소년 시절부터 자신의 나라가 유럽인들에게 복종하는 현실에 깊이 상처를 받았다.
1948년에 아랍이 패배하면서 나세르는 이집트 왕에게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며,
다른 육군 장교 몇 백 명(자유 장교단)과 왕을 몰아내고 공화국을 세우기로 공모했다.
1952년 어느 여름날 아침,
그 자유로운 장교들은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 폐지에 성공했다.
하지만 왕을 없애는 것은 쿠데타에서 쉬운 부분이었고
정작 어려운 단계는 이집트에서 영국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당시는 냉전 중이라 거의 모든 신흥 민족국가가 초강대국 미국과 소련, 둘 중 한쪽에서
무기를 얻을 수 있었다.
나세르는 미국에 접근했지만 거절하자 소련에 접근해서 무기를 원하는 만큼 받아냈다.
그 후 미국이 이집트가 중요하다는 판단을 내려
아스완에 나일강을 가로지르는 큰 댐을 지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미국이 이집트 재정을 감독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어,
나세르는 자력으로 댐을 건설하기로 결정했고,
자금 마련 해결 방법으로 수에즈 운하를 선택했다.
그 당시 수에즈 운하는 약 9000만 달러의 수입을 거둬들였지만,
이집트는 고작 630만 달러 정도를 받을 뿐이었다.
1956년에 나세르는 운하 구역으로 병력을 투입해서 수에즈 운하를 점령했다.
그러자 유럽이 격분했다.
영국은 나세르를 또 다른 히틀러라고 했고,
프랑스 언론은 이집트는 너무 미개해서 세계 경제를 침몰시킬 것이라 했다.
두 유럽 국가는 이스라엘과 결탁하여 카이로에 폭탄을 터트려 나세르를 죽인 다음
수에즈 운하를 되찾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때마침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그 음모를 듣고,
그 작은 계획 때문에 중동 전체가 소련에 넘어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수에즈 운하를 이집트에 돌려주라는 결정을 내렸다.
나세르는 원하는 댐을 건설해 그의 나라에 전기를 공급했다.
구카르노, 또한 인도의 네루, 인도네시아의 구카르노, 스리랑카의 반다라나이케를
비롯한 몇몇 다른 지도자들과 힘을 합쳐서 비동맹 운동,
냉전으로 대치하는 두 초강대국을 견제하는 중립국들의 연합을 전개해 나갔다.
한편 무슬림 형제단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1952년에 이집트 왕을 폐위시키는 것을 도왔지만,
나세르의 정부가 업무를 시작하자 무슬림 형제단은 나세르에게 등을 돌렸고,
심지어 그를 암살하려고 시도했다.
무슬림 형제단 설립자 하산 알 반나는 나세르가 정권을 잡기 전에 암살당했지만,
사이이드 쿠트브가 반나를 대신해 형제단을 맡았다.
나세르는 이 사내를 감옥에 가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결정은 큰 실수였다.
감옥에서 쿠트브는 희생양이라는 명분을 얻었고, 자신의 교리를 계속 설파했다.
나세르는 이 잔소리꾼은 참아줄 이유가 없다고 결단을 내려,
1966년 8월 쿠트브를 교수형에 처했다.
그 때문에 놀라울 정도로 멀리까지 퍼져 있던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순교자로 포장했다
1967년 5월, 나세르는 이스라엘을 향해 전쟁의 가능성을 내뿜기 시작했고,
진심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홍해로 가는 경로를 봉쇄하기까지 했다.
그 해 6월 5일, 아무런 경고도 없이 이스라엘이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일제히 공격했다.
첫 24시간 동안 이스라엘은 사실상 이집트 공군 전체를 격추시켰다.
그 뒤로 5일 동안은 UN이 팔레스타인의 나라라고 선을 그었던 영토를 전부 점령했다.
7일째에 전쟁은 끝났고, 이제 세상은 결코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
6일 전쟁은 나세르에게 모욕적인 사건이었고.
그의 경력은 끝장났다.
나세르는 4년 안에 죽었다.
종합해 보면,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를 얻었다.
그 영토는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완충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가로 그 영토 안에서 갈수록 늘어나는 반란에 부딪쳤는데,
이스라엘은 갈수록 더 잔인한 방법으로 대처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공격과 반격은 이스라엘의 진을 뺐으며 국제사회에서 도덕적 입지를 위태롭게 했다.
맞은편에서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과격해지고,
무슬림 형제단이 힘을 얻었으며,
그로 인해 지하드 주의자 분파가 파생되었다.
이들은 극단적인 광신자들로 결백한 방관자들뿐만 아니라,
전쟁에 말려든 제삼자가 더 결백할수록 더 좋은 목표물이라 여겨 끔찍하게 공격했으니,
이것이 테러리즘이라고 불리는 폭력의 형태로 발전했다.
요컨대 6일 전쟁은 세계 평화를 위태롭게 만든 퇴보였으며,
무슬림 세계에 떨어진 재앙이자,
결국 이스라엘에게도 그리 좋은 결과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