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11)

미국의 등장 그리고 사막의 폭풍

by 산내

<미국의 등장>

동쪽 페르시아 중심부에서는 세계를 바꾸어 놓을 중대한 사건이 벌어졌고

그 중심에는 미국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무슬림들은 미국을 알기 시작했고

첫인상은 매우 우호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무슬림들은

미국의 훌륭한 제품을 쏟아내는 능력과 강력한 군사력에 감탄했다.


이런 인상에는 자유, 정의, 민족주의라는 미국이 선언한 높은 가치들이 힘을 더했다.

이란인들에게는 이 정황이 아주 좋아 보였다.

리자 샤 팔레비가 수 십 년간 이러한 흐름을 막았지만,

연합군이 팔레비가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그를 제거했다.
기대에 부푼 이란인들은 투표소에 나가서 무함마드 모사테크에게 총리라는 권력을 안겨주었다.


모사테크는 공약으로 내건 석유에 대한 완전 통제권을 되찾기 위해

브리티시 패트럴리엄과의 임대차 계약을 취소하고 석유산업을 국유화한다고 발표했다.


미국 CIA가 즉시 움직여서

그들이 자금을 댄 이란 군대의 한 파벌이 쿠데타를 일으켜다.

수 천명이 죽고 이란의 정치인은 가택에 연금되어

다시는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CIA는 리자샤 팔레비의 아들을 이란 왕으로 복귀시켰다.

팔레비 왕조

젊은 샤는 미국과의 조약에 서명하여 이란 석유 관리를 컨소시엄에 맡겼다.

이란을 배신한 이 쿠데타로 이란인들에게 뿌리 깊이 박혀버린 감정이나

무슬림 전역에 퍼져 나간 분노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다.


1930년대 이래로 산유국들은 초기의 탐욕스러운 조항들을

조금씩 잘라내고 재협상을 성사시켜,

1950년 무렵 석유 수출국은 매출의 50%를 벌어들이면서

상당한 부가 그 지역에 흐르기 시작했다.

만일 석유로 부자가 된 나라들이 석유가 발견되기 전에 민주적인 제도가 들어섰더라면,

석유로 벌어들인 부가 아주 다르게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사회 전역에 권력이 배분되고 모든 계층이 참여하는 길이 먼저 열려 있었다면

창조적인 에너지에 힘을 불어넣어 문화 르네상스에 불을 지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대와 상황은 그 나라들에 민주주의가 자라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극소수의 아랍인과 이란인들이 엄청난 부를 쌓았으며,

전용 제트기를 타고

전 세계 리조트나 카지노에 드나드는 최 상류층 부자들처럼 돈을 탕진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상류층이 그저 돈을 제 주머니에 챙기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막대한 돈을 개발에도 쏟아부었으니

각 나라 정부는 국립학교 체계를 조직하고 마천루를 짓고

국영 항공사를 세우고, 방송국과 라디오와 신문사를 만들고…


다른 세계에서의 이러한 개발은 국민의 세금으로 행해져 국민의 뜻을 반영해야 했지만,

석유 부자 무슬림 나라에서는 그들이 국민과 분리되어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들이 어울릴 필요가 있는 사람들은 그 나라를 드나드는 세계 경제의 중재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근대화는 이러한 개발도상국 사회를

‘지배 클럽’과 ‘나머지 사람’들로 갈라놓았다.


물론 유럽에서도 산업혁명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변화가

사회를 선명하게 분리된 계층으로 나눈 것은 사실이다.


부자들은 더 좋은 음식을 먹고,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편안하게 살며,

좋은 학교에 가고 말할 때는 더 배운 티가 나는 말투를 쓰지만,

그들은 단지 빈민층의 부유한 버전이었다.

무슬림 세계에서는 분류된 두 분류의 차이란 단순히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 차이였다.

따라서 두 세계 사이에 패인 골은 소외감을 부추기고,

반식민주의의 분위기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지만 그 분노의 대상은 지배계층을 향해 있었다.


문화로 분열된 나라에서는 분쟁을 중재할 민주적인 제도가 없었으므로

정부는 난동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무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의 상류 지배층은 한때 외국인 식민주의자들이 하던 역할을 이어받았다.

모사테크가 축출되고 권력을 잡은 팔레비는 비밀경찰 집단을 만들어

이란에서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했으며,

이란에서 미국 시민들이 완전한 면책특권을 인정받는 조약에 조인했으니

이는 자주권을 거저 넘기는 경악스러운 사건이었다.

팔레비의 독재는 옛날 사이이드 지밀루딘의 정신에 다시 귀를 기울이는 저항 운동이 불을 지폈다

이슬람 사회주의 저항운동은 ‘모자헤딘 이 할크’라는 지하조직으로 구체화되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78년 이란 혁명 때까지

이 작은 조직이 이란의 샤에 대항하는 투쟁을 주도하고

비밀경찰에 맞서서 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종류의 종교적인 저항운동이 이란에서 끓어오르고 있었으니,

그것은 엄격한 성직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구체화한 정통파 종교단체에서 주도한 운동이었다.

호메이니는 시아파의 전통에서 독창적인 정치 교리를 세웠으나,

1964년 샤는 호메이니를 추방했다.

호메이니는 이웃나라 이라크에 자리를 잡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이란인 광신도들의 군대를 점차 키워갔다.


호메이니

1967년에 일어난 6일 전쟁은 제국주의자들이 이스라엘을 상륙 거점으로 삼고

이슬람 문명을 향한 공격에서 미국이 선두에 서있다는 무슬림들의 믿음은 확고했다.


결국 이스라엘의 힘은 미국의 무기와 지원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 결론은 1973년 나세르의 뒤를 이은 안와르 알 사다트가 이스라엘을 공격해

제4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을 벌였을 때 다시 강조되었다.


이번에는 이집트의 무기와 병력이 초반에 승리를 휩쓸 것처럼 보였지만,

이스라엘이 갑자기 미국에서 엄청난 양의 무기를 공수받으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그렇게 다시 한번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뒀다.

1970년대 이슬람 세계의 세속 근대주의자들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첫 타자였다.

그는 버클리 대학교에서 교육받은 파키스탄의 총리였다.

1977년에 지아 알 하크라는 이슬람주의자 장군이 부토를 몰아내고 감옥에 가뒀다.

부토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다음으로 추락한 것은 이란의 샤였다.


1978년에 세속 좌파. 이슬람 사회주의자,

호메이니를 지지하는 시아파 혁명가들의 연합은 샤를 추방했으며,

1980년까지 호메이니는 이란을 정통 시아파 울리마가 다스리는 이슬람 공화국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라크 통치자 사담 후세인은 수니파의 세속 근대주의자였으며,

급진 이슬람주의 진영에서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사담 후세인

1980년 호메이니가 권력을 잡은 직후에 후세인은 이란을 침공했다.

후세인의 목적이 무엇이었든지 전쟁은 이라크와 이란 모두에 재앙을 가져왔다.

두 나라 모두 청년과 청소년 세대 거의 전부를 잃었다.


또한 그 전쟁 내내 미국이 이라크에 무기와 자금을 대면서 계속 싸우도록 지원했는데,

이는 미국이 이란에서의 발판을 잃은 데에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서

소련이 기반을 얻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1988년에 승자 없이 끝났다.


이라크는 확실하게 폐허가 되었고 국고는 의미 없는 유혈사태 때문에 탕진되었다.


그러다 1990년에 후세인은 자신의 손실을 만회하려는 패를 던졌다.

그는 이웃나라 쿠웨이트를 침략 합병해 그 나라의 석유를 차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제껏 동맹군이었던 이라크에 맞서서 34개국의 연합군을 이끌고

‘사막의 폭풍’이라는 습격을 감행했으니,

이 짧은 전쟁은 이라크의 사회기반 시설을 거의 다 파괴했으며

이라크는 완벽하게 패배했다.

사막의 폭풍

동쪽에서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가 철수했다.

동유럽에서는 그 제국이 풀어지면서 소련의 일부였던 공화국들이

심지어 러시아까지 전부, 더 이상 독립해올 주체가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독립을 선언했다.

미국의 보수파 역사가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소련의 몰락이 단지 냉전의 종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끝을 의미한다고 했다.


자본주의자들의 민주주의가 승리를 거뒀으니 남은 일은

세계 전체가 유일한 진리를 향해 주변을 정리하는 것뿐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는 지하드 주의자와 와하비파가 아주 다른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들이 보기에는 이슬람이 이란에서 샤를 타도하여 미국을 쫓아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무슬림들이 소련을 무찔렀을 뿐 아니라 소련 전체를 전복했다.

서구에서 냉전의 종식은 아프가니스탄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과 서유럽의 동맹들은 아프가니스탄에 수십억의 무기와 자금을 쏟아부어 왔지만

이제는 완전히 철수해서 도와 달라는 제안을 거절했다.


‘아무도 아프가니스탄에 관심이 없었다’

아프가니스탄의 시골지역은 이미 소련이 파괴했다.

이제 여러 게릴라 군대들끼리 벌린 내전으로 도시가 파괴되었다.


1980년대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싸웠던 외국인 지하드 주의자들은

서구에 대항하는 그들의 작전기지를 쌓아 올리기 위해 다시 모여들었다.

그리고 결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사체에 숨어든

과격 지하드 주의자 중 일부 무리가

뉴욕에 있는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에 있는

미국 국방부 본부에 납치한 항공기를 꽂아 넣을 계획을 꾸몄다.


그날 2001년 9월 11일, 두 개의 세계사는 충돌했고,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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