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
제주 4.3 사건을 다루기 위해서는 그 당시 상황을 키워드 별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 키워드 '인민위원회'.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뒤 9월 9일 미군이 서울에 입성해 조선총독으로부터 항복문서에 서명을 받으며 미군정 시대가 시작되기까지 정국은 혼란기였다.
이 시기에 중도좌파 성향의 민족 지도자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가 설립되어 행정과 치안의 공백을 메우고자 했다.
건준은 각 지역에서 친일파를 제외한 명망 높은 유지와 지식인으로 채워졌으며, 처음에는 좌우익 사상을 막론하고 다양한 계급과 계층을 포괄했다.
9월 6일 건준이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면서 전국 각지의 건준 조직들이
'인민위원회'라는 이름의 주민자치기구로 전환됐다.
중앙 행정과 가장 거리가 멀고,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기지이자 최후의 보루로 전국에서도 가장 극심하게, 가장 마지막까지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당했던 제주도의 경우 일본에 반감이 큰 만큼 조직적인 항일운동의 뿌리가 깊었고, 외세의 간섭 없는 완전한 자주독립과 분단 없는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열망 또한 드높았다.
여기에 생계를 위해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징용으로 일본의 경·중공업 분야에서 일하다 제주도로 귀환한 6만여 명 중에는 일본에서 부당한 차별을 겪으며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을 키운 이들이 많았다.
이들이 고향에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이 인민위원회 같은 자치 활동과 야학을 포함한 학교 설립 등의 교육 운동이었다.
타도에 비해 제주도의 좌익운동이 유독 활발했던 데는 이와 같은 배경이 존재했다.
미군정이 조선인민공화국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전국의 인민위원회들이 자연히 와해되고 해산한 뒤에도, 항일 투쟁의 선봉에 섰던 지도층이 이끈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가장 마지막까지 세력을 유지하며 도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우익단체들과도 격렬한 대립 없이 무난하게 도내 행정을 이끌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고, 미군정 당국도 이들을 도내의 유일 정당이자 정부나 다를 바 없는 조직체로 인정했다. 이들이 훗날 3.1 시위와 4.3 사건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두 번째 키워드 '응원경찰'.
그러나 당시 소련을 견제하던 미국은 한반도가 공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우익 세력에 힘을 실어 주었고, 초기 치안과 행정을 통제하는 과정에서 빠른 안정을 꾀하기 위해 기존에 일제에 부역하던 경찰과 관리 들이 그 직무를 거의 그대로 승계하도록 했다.
1946년 말 군정경찰 경위급 이상 간부 1,157명 중 82퍼센트인 949명이 일제경찰 출신일 정도였다.
미군정은 부족한 인력과 언어 장벽 때문에 치안을 이러한 경찰조직에 크게 의존했으며, 제주도에 계속해서 본토 경찰 인력을 파견했다.
일제강점기에 제주도에서 항일 시위나 소요 사태가 발생할 시 육지에서 파견된 경찰을 '응원경찰'이라고 하는데, 이들이 4.3 사건 당시 토벌대 (진압대)의 큰 축을 이루며 여러 문제를 낳았다.
1948년 7월에 이르러서는 제주 경찰력의 75퍼센트가 타도에서 온 응원경찰이었다.
세 번째 키워드 '남로당'.
미군정 시대에 좌우익을 가리지 않고 난립한 수많은 정당 가운데 박헌영, 여운형, 백남운 등이 주도하던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등 세 좌파 정당이 대중 정당 설립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통합해 1946년 11월 23일 남조선노동당(약칭 '남로당)이 결성됐다.
남로당은 원래 미군정청에 등록된 합법 정당이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대외적으로 여전히 인민위원회의 이름으로 활동하긴 했지만 자연스레 남로당 제주도당으로 흡수됐다.
한편으로 1946년 제주도에는 콜레라가 창궐해 사망자가 속출하고 외부로부터 물자 보급이 원활하지 않은 데다 보리를 비롯한 작물의 대흉작이 겹쳐 식량난이 가중됐다.
그 와중에 미군정이 일제가 행하던 쌀 공출제도를 부활시켜 도민들의 고통과 군정을 향한 반감이 날로 더해 갔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그러한 민심을 집중시키고 폭발시킬 시위를 조직했다.
바로 네 번째 키워드인 '3.1 시위:
4.3 사건과 관련해 우리가 기억하는 날짜는 1948년 4월 3일이지만, 실은 제주도의 운명을 바꿔 놓은 1947년 3월 1일을 이 비극의 시작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학살의 발단이 남로당의 무장봉기임을 강조하는 '4.3 사건'이라는 명칭은 제주도민들의 본격적인 저항이 경찰의 발포로 무고한 도민 여섯 명이 사망한 3.1 발포사건에서 비롯됐음을, 즉 학살의 발단에 대한 책임 또한 미군정에 있음을 가리려는 전략으로 느껴진다.
이날 오전 11시 제주북국민학교(현 제주북초등학교)에서 열린 '제28주년 3.1 기념 제주도대회'에 모인 대략 25,000~30,000명에 달하는 군중은 기념행사를 마치고 허가받지 않은 가두시위를 시작했다.
미군정청과 경찰서가 있는 관덕정 광장을 거쳐 서쪽으로 행렬이 빠져나갈 무렵인 2시 45분경, 관덕정 광장에서 기마경찰이 탄 말에 한 어린이가 채어 소란이 일었다.
기마경찰이 말굽에 챈 아이를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그냥 지나가려고 하자 주변 군중이 야유하며 항의했다.
일부는 돌멩이를 던지며 기마경찰을 쫓아 경찰서 쪽으로 향했다.
그 순간 무장한 응원경찰들이 군중을 향해 발포했고, 제주북국민학교 재학생인 15세 허두용 군과 젖먹이를 안고 있던 21세 여성 박재옥 씨를 포함해 도민 여섯 명이 죽고 여섯 명이 중상을 입었다.
희생된 이들은 경찰서에서 멀리 떨어진 노상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고, 여섯 명 중 다섯 명이 '등뒤'에 총탄을 맞았다.
3.1 발포사건 직후에 사표를 제출한 박경훈 도지사도 "발포사건이 일어난 것은 시위 행렬이 경찰서 앞을 지난 다음이었던 것과 총탄의 피해자는 시위 군중이 아니고 관람 군중이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다섯 번째 키워드 '3.10 총파업',
타도에서 온 응원경찰의 과잉진압은 도민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급기야 3월 10일 경찰의 발포와 그 이후의 안일한 대응에 항의하는 의미로 한국에서는 유례가 없었던 민관 총파업이 시작됐다.
좌우익을 가리지 않고 일반 공무원과 회사원, 농민과 직공, 교사와 학생 등 166개 기관 단체 41,211명이 참여한 대규모 파업이었으며, 더불어 제주 출신 경찰의 약 20퍼센트도 파업에 참가해 후에 66명이 이 일로 파면을 당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이 파업에 좌우익이 공히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파업을 조직한 핵심 세력인 남로당을 표적으로 삼아 그때까지 유보적이거나 일정 부분 우호적이었던 태도를 완전히 바꾼다.
3.1 발포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관련 자를 처벌하라는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좌익 세력을 척결하는 쪽으로 기울었던 것이다.
여섯 번째 키워드 '레드 아일랜드'
본격적으로 제주도를 '빨갱이'들이 국가 전복을 꾀하는 '붉은 섬'으로 낙인찍는 작업이 시작됐다.
3월 14일 사태 수습을 위해 제주도에 온 조병옥 경무부장(오늘날의 경찰청장)은 도청 직원들을 상대로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면서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는 연설을 했다.
최경진 경무부 차장은 기자들에게 "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퍼센트가 좌익 색채를 가지고 있다"라고 했다.
특히 미군정 보고서에도 여러 차례 극우파로 언급된 유해진이 제주도지사로 발령되고 미군정에서 극우단체로 분류한 이북 출신의 극렬 반공 집단인 서북청년회(약칭 '서청') 단원들이 제주로 들어오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시위 및 파업 관련자들에 대한 응원경찰의 검거 선풍이 불어닥쳤다.
서북청년회 등은 좌익 인사들에 대해 백색테러를 일삼았다.
정권에 반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빨갱이로 몰아 잡아들이고 고문해 온 유구한 역사가 이때 제주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일곱 번째 키워드 '5.10 단독선거 반대 운동'.
흉흉한 분위기 가운데 해를 넘긴 1948년, 미국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 계획을 구체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정당과 단체에서 잇따라 반대 성명을 발표하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경찰 및 극우단체의 폭력에 대한 항의, 단선(단독선거) 및 단정 (단독정부) 반대, 미군정에 대한 저항을 기치로 내걸고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일련의 투쟁은 4.3 무장봉기로까지 이어졌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전후해 한라산 중허리의 오름마다 타오른 붉은 봉화가 그 신호탄이었다.
남로당 무장대 약 350명의 주 공격 대상은 각 경찰지서와 극우단체 주요 인사들이었다.
5.10 남한 단독선거 거부 투쟁의 일환으로 무장대는 선거 며칠 전부터 주민들을 산으로 올려 보내거나, 선거 당일 투표소를 습격하는 등 선거 진행을 방해했다.
결국 5월 10일 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주도 2개 선거구에서만 투표가 무산됐고, 이는 산에 숨어서 게릴라전을 펼치는 무장대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 작전이 펼쳐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1948년 11월 중순, 대규모의 강경 진압 작전이 전개됐다.
이때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간 토벌대 (진압군과 경찰, 서청 등의 극우단체)는 중산간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4.3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가장 참혹한 기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됐고 대부분의 중산간마을이 글자 그대로 '초토화'됐다.
공교롭게도 유엔총회에서 '제노사이드 범죄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이 채택된 1948년 12월 9일을 전후해, 제주에서는 죽창으로 산 사람을 꿰뚫고 사람을 산 채로 불태우는 등 상상을 뛰어넘는 잔혹행위들이 본격적으로 자행되고 있었다.
시작은 10월 17일 제주 주둔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발표한 포고문이었다.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기간 중 전도 해안선부터 5킬로 미터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단 특수한 용무로 산악지대 통행을 필요로 하는 자는 그 청원에 의하여 군 발행 특별통행증을 교부하여 그 안전을 보증함.
2000년 김대중 정권 당시 정부 차원에서 진행한 대대적인 진상조사에서 신고된 희생자 14,028 명의 가해자별 통계를 보면 우리 정부의 군경과 서북청년회 등의 우익단체 및 미군으로 이루어진 토벌대가 78.1퍼센트 (10,955명), 남로당원과 일부동조자로 이루어진 무장대가 12.6퍼센트(1,764명), 공란 9퍼센트(1,266명) 등으로 나타났다.
가해자를 특정하지 않은 공란을 제외하고 토벌대 대 무장대의 비율로만 산출하면 86.1퍼센트와 13.9퍼센트로 대비된다.
이 통계는 토벌대에 의해 80퍼센트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미군 보고서와 같은 맥락이다.
특히 10세 이하 어린이 (5.8퍼센트, 814명)와 61세 이상 노인 (6.1퍼센트, 860명)이 전체 희생자의 11.9퍼센트를 차지하고, 여성의 희생(21.3퍼센트, 2,985명) 또한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토벌대에 의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아직도 미신고·미확인 희생자가 많기 때문에,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는 여러 자료와 인구 변동 통계 등을 감안, 잠정적으로 4.3 사건으로 인한 인명 피해를 25,000~30,000명 선으로 추정한다.
이는 1950년 4월 김용하 제주도지사가 밝힌 27,719명 등을 감안한 것이었다.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