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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Dec 26. 2024

보스니아 내전

사라예보와 모스타르

이탈리아와 그리스 사이 발칸반도 서부에 위치했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하 유고 연방)은 30년 가까이 강력한 철권통치를 펼치며 연방을 하나로 묶었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 대통령이 1980년 사망한 뒤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유고 연방을 구성하던 여섯 개 공화국(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과 두 개 자치주(코소보, 보이보디나) 통치자들이 돌아가며 대통령을 맡는 순환대통령제를 시행하기로 합의했지만 미봉책에 불과했다.  

공산권의 붕괴와 맞물려 경제가 피폐해지고 옛 이념이 희미해져 가는 상황에서, 1987년 연방의 가장 큰 공화국이었던 세르비아에서 민족주의 기치를 내건 밀로셰비치가 급부상해 1989년 대통령까지 올랐다. 

그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과거에 세르비아인들이 탄압받았던 역사를 끄집어내 자국민들을 선동하면서, 다른 나라들도 민족주의에 경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고 연방 사람들은 극히 일부인 알바니아계를 제외하면 외모로는 구별조차 힘든 같은 슬라브 민족이었고, 다만 종교가 다를 뿐이었다. 
크게 크로아티아계는 로마가톨릭교를, 보스니아는 15~19세기에 지배를 받았던 오스만튀르크의 영향으로 이슬람교를, 세르비아계는 그리스정교회의 분파인 세르비아정교를 주로 믿었다.  

그나마도 오랫동안 같은 영토에서 어울려 살면서 타 종교 간 결혼도 드물지 않았고, 보스니아계 무슬림들은 돼지고기를 먹거나 술을 마시는 등 세계 어느 이슬람국가 국민들보다 종교색이 희미했다. 
하지만 미디어 선전에 능했던 밀로셰비치는 해묵은 종교 갈등을 들쑤셔 유고 연방을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몰아갔다.
 
1991년 6월 먼저 크로아티아가 연방 탈퇴와 독립을 선언하자 밀로셰비치는 크로아티아 영토 내에 거주하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위험해지리라는 명분을 내세워 전쟁을 일으켰다. 

6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양측 합쳐 1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같은 시기 세르비아계 주민이 거의 없었던 슬로베니아는 비교적 평화롭게 독립을 이뤄 냈다. 
곧 보스니아도 독립을 원하게 됐다.  


1992년 2월 29일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99퍼센트가 독립에 찬성했고, 보스니아는 유엔에서 주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인구의 약 31퍼센트를 차지했던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투표 자체를 보이콧했다.
크로아티아와 전쟁을 일으킨 것과 같은 명분으로, 즉 보스니아가 독립하면 그 영토 안에 거주하는 세르비아계가 박해를 받게 되리라는 이유로 밀로셰비치는 또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크로아티아에서의 뼈아픈 패배를 되풀이하지 않고자, 이번에는 더욱 무자비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이 전쟁에서 결정적 변수는 무기 공급의 불균형이었다.

보스니아 '내전'이라 하면 보스니아계와 세르비아계가 엇비슷한 전력으로 맞붙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군사력에서 막강한 우위를 보인 세르비아계가 보스니아계를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양상이었다. 
유엔이 유고 연방 전체를 대상으로 내렸던 무기금수 조치를 풀지 않으면서, 이미 강력한 무기산업과 군대를 구축하고 있던 세르비아를 도와주는 꼴이 됐던 것이다.
 
한 도시와 마을에서 함께 어울려 살던 세르비아인들은 이웃인 보스니아인들을 상대로 극악무도한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온갖 방법으로 집을 빼앗은 뒤 도시나 마을 밖으로 쫓아내고, 온갖 방법으로 남자들을 고문하다 죽이고, 온갖 방법으로 여자들을 강간했다. 
그야말로 '빗질하듯' 하루아침에 도시와 마을에서 보스니아인들을 쓸어 냈다.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유럽에 또다시 제노사이드의 광풍이 불어닥친 것이다. 
이는 유럽이 아우슈비츠로부터 그리 멀리 벗어나지 못했음을 방증하는 사건이었다.
레비의 우려는 악몽 같은 현실이 됐다.  

'내정간섭'이라는 이유로 서유럽과 미국이 책임을 회피하며 방관하는 사이, 제대로 된 무기조차 없었던 보스니아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수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당했다.
 
스레브레니차 학살은 그 가운데서도 단기간에 벌어진 단일 사건으로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낸 학살이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가장 큰 규모의 집단학살이었다. 1993년 4월 유엔은 세르비아군이 점령한 보스니아 영토 내에서 유일하게 보스니아계 무슬림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스레브레니차를 '안전지역'으로 선포하고 네덜란드군을 평화유지군으로 파병해 도시를 지키도록 했다.  

자연히 세르비아군 점령 지역 내 무슬림들이 유엔군을 믿고 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1995년 7월 라트코 믈라디치 장군이 지휘하는 세르비아군이 스레브레니차를 점령했다. 
세르비아군이 보스니아군에 가담할 가능성이 있는 10~50대 남성들을 수십, 수백 명씩 연이어 집단 처형하는 동안, 이런 상황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채 경무장 상태로 주둔해 있던 네덜란드군 400여 명은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7월 11~31일 살해된 보스니아인의 수는 8,331명 이상이다.
7월 12일 단 하루 동안에만 6,502명 이상이 사망했다.
 
 7년 후인 2002년 4월 네덜란드에서는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총리 이하 장·차관을 포함한 내각 전원이 총사퇴했다. 
네덜란드 전쟁기록연구소가 5년에 걸쳐 조사한 결과를 담은 보고서는 "네덜란드 정부가 피신처로 찾아드는 3만여 명의 피난민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적절한 권한이나 무기도 없이 병력을 스레브레니차에 파견, 학살 사건을 방조했다"라고 지적했다.  


이 보고서 결과를 받아들이고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며 반성하는 의미에서 내각이 총사퇴하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는 서방국가가 보스니아 내전에 처음으로 보여 준 용기 있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늦게, 어떤 희생도 되돌릴 가망 없이 발휘한 용기였다.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는 내가 다녀 본 전 세계 도시들 중 손꼽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저 멀리서 도시를 굽어보는 높다란 산들, 도시를 감싸 안은 낮고 푸른 구릉들, 시내 한쪽을 유유히 가로지르는 가느다란 밀랴츠카 강, 그곳에 놓인 아담한 돌다리들, 아랍의 어느 도시를 연상케 하는 반질반질한 판석이 깔린 전통시장 골목 바슈차르시야, 잘 정비된 널따란 보도를 메운 노천카페, 튀르키예식과 비슷한 진한 보스니아식 커피와 케밥의 일종인 체밥치치를 먹을 수 있는 간이 노점, 가톨릭 성당과 이슬람 사원과 세르비아정교 교회와 유대 교회당의 각기 다른 첨탑들이 어우러진 풍경.  


사라예보를 둘러싼 천혜의 산과 구릉은 수적으론 열세였으나 화력에서 절대 우위를 갖춘 세르비아군이 도시를 포위하고 포격하기에 알맞은 요새로 변했다. 
1984년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그 산과 구릉이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포격과 저격수들의 사격으로 도시 기능은 완전히 마비되고 고립된 시민들은 생사의 문턱을 넘나드는 한편 극도의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올림픽을 개최할 만큼 동구권에서 손꼽히는 선진적 도시였던 사라예보는 초토화가 됐다.
포위 기간 동안 사라예보에서 13,952명 이상이 전쟁으로 인해 직간접적으로 사망했다.
유엔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포위 기간 초반 2년간 부상자는 약 56,000명에 달했고, 사망자 중 약 1,500명, 부상자 중 약 15,000명이 어린아이였다. 
 
내가 사라예보를 찾았던 2008년 가을, 아름다운 거리 한편으로는 도시를 말 그대로 폐허로 만들었던 내전의 상처들이 여전히 아물지 않은 채 곳곳에 남아 있었다. 

건물 외벽의 총탄이나 포탄 파편 자국들은 흔한 풍경이었고, 철근 구조물과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만 남은 채 방치된 건물들도 눈에 띄었다.  

포위 기간 중 계속된 세르비아군의 무차별 포격으로 건물 1만 채 이상이 완파됐고, 10만 채 이상이 부분적으로 피해를 입었다. 
 

세르비아군은 교전규칙이나 인도주의 원칙을 휴짓조각처럼 취급하며 병원과, 심지어 달리는 구급차마저 포격 대상으로 삼았다.  

보스니아 전쟁을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제노사이드로 보는 근거 중 하나다.
 
세르비아군은 보스니아 영토를 점령하는 것을 넘어 보스니아인들을 뿌리째 뽑아내 쓸어버리고자 했다. 

따라서 상대의 공포를 극대화해서 무력화하는 물리적·정신적·상징적 말살정책을 전방위적으로 펼쳤다.  

오스만튀르크의 흔적이 남은 거리와 모스크 등이 첫 번째 타격 목표가 됐다. 
 

1993년까지 보스니아 전역에서 1,000여 곳의 모스크가 파괴됐다. 
세르비아군은 무슬림들의 공동묘지와 영묘를 파괴한 뒤 불도저로 밀어 버리고 그 자리에 공원이나 주차장을 만들기도 했다. 
'문화청소'였다. 
 

세르비아계가 사라예보를 여행하며 그런 순간들을 계속해서 맞닥뜨렸다.  

사라예보 곳곳의 길 위에는 '사라예보 로즈'가 피어 있다.
사라예보 로즈는 장미의 품종 이름이 아니다. 
세르비아군이 발사한 포탄이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져 파편들이 동심원 모양으로 퍼져 나간 흔적이 장미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세상에서 제일 슬픈 꽃, 간단히 덮거나 메울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는 대신 일부에 붉은색 시멘트를 채워 놓았다.
도시의 어두운 과거를 서둘러 지워 버리지 않고 길이 기억하기 위해 남겨 둔 것이다.
 
1994년 2월 5일에는 사라예보 최대 시장에 직경 120밀리미터의 박격포 포탄이 떨어져 68명이 사망하고 144명이 부상했다. 

토요일 오후 12시, 시장이 한창 붐빌 시간이었다. 
화창한 주말을 맞아 장을 보러 나온 민간인들을 겨냥한, 사라예보 포위 기간 중 일어난 최악의 집단학살 사건이다. 
더구나 시장은 유엔이 지정한 '안전지역' 내에 있었다. 
 

이 사건은 마침 그 부근을 촬영 중이던 TV 카메라에 고스란히 잡혀 국제적인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세르비아 측에서는 다른 수많은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 학살 역시 보스니아 측이 벌인 자작극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내놓았다.
 
한 도시, 한 마을에서 어울려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게 된 보스니아 내전 특유의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 주는 곳이 바로 보스니아 남부의 모스타르라는 소도시다. 

사라예보에서 차로 두 시간 반가량 걸리는 모스타르는 이슬람교도인 보스니아계 주민들과 가톨릭교도인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이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오랫동안 평화롭게 공존하던 도시였다.  


보스니아계와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사이의 통혼율이 보스니아 전체에서 가장 높았다. 
깊고 푸른 네레트바강을 20미터 높이로 가로지르는 스타리모스트(오래된 다리'라는 뜻)는 1566년 오스만제국이 이 지역을 점령했을 당시에 건립한 말 그대로 '오래된 다리'이자 도시의 자랑이었다. 
또한 주민들의 일상적인 약속 장소이자 프러포즈 명소, 한여름에 다이빙 대회가 열리는 무대기도 했다.
 
그러나 밀로셰비치의 허황된 선전은 이곳마저 지옥으로 바꿔 놓았다. 
내전 초기에 함께 세르비아에 맞섰던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이 반목하며 마을이 불타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신원이 밝혀진 사망자 수는 2,501명이다. 
 

사라예보에 비하면 적은 수지만 교전이 벌어진 시기와 도시의 규모에 비하면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 
평화의 상징이었던 아름다운 다리도 1993년 11월 9일 크로아티아 포병대가 퍼부은 포탄 60발에 파괴됐다. 
도시 이름 자체가 '다리의 파수꾼'이라는 뜻을 가진 모스타르 주민들의 역사이자 일상이 그렇게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마을 곳곳에 자리한 공동묘지의 비석들에 새겨진 출생 연도는 제각기 달랐으나 사망 연도는 대부분 1993년이었다.
채열 살이 안 된 어린아이들의 무덤도 부지기수였다.  

관광지구로 말끔히 정비된 구시가와 달리 대다수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거주 지구 곳곳에는 무수히 총알 자국이 나 있고 외벽이 부서지고 창문이 깨어진 채 그대로 방치된 건물이 많아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다행일까. 

2004년 유네스코 등의 후원으로 스타리모스트가 재건되고 2005년 다리와 그 일대가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점차 많은 관광객이 모스타르를 찾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스타리모스트를 등재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옛 다리의 르네상스와 그 주변 지역을 포함한 모스타르 옛 시가지는 다양한 문화적·민족적·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회가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뛰어나고 보편적인 상징이다.  

반들반들한 자갈길을 따라 늘어선 갤러리와 튀르키예풍 기념품 가게, 전망 좋은 카페, 황홀한 네레트바강 상류의 풍광, 규모는 작아도 건축적으로 훌륭한 모스크 등이 있는 구시가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관광지다.


전통이라고는 하지만 관광객들에게 돈을 받고 스타리모스트에서 뛰어내리는 아찔한 '다이빙 쇼'를 선보이는 아이들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지고, 내전으로 인해 넘쳐나는 탄피를 이용해 만든 열쇠고리와 군용품 따위를 파는 기념품 상점에 머리가 복잡해지긴 했어도 말이다. 
 

보스니아에 그토록 깊은 상처를 남긴 전쟁은 불과 10년 남짓한 시간에 '상품'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또한 살아남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이며, 그들을 탓할 순 없을 것이다. 
다분히 관광객들더러 보라고 둔 게 분명한, 스타리모스트 양 끝에 놓인 커다란 돌에는 영어로 1993년을 잊지 말라 DON'T FORGET '23'라고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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