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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Dec 12. 2021

100년의 기록(1)

버나드 루이스의 생과 중동 역사

 

버나드 루이스

 루이스 교수가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며 집필한 자서전적인 책이다.

한 평생 중동 연구에만 몰두한 학자의 역사적 시각을 집대성한 책이기 때문에 

중동 사회를 내부로부터 이해하려는 그의 노력과 행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랍어, 터키어, 페르시아어 등을 배워 가면서 

언제나 현장 지향적 태도로 임했던 학자의 삶이 전해진다.

 

버나드 루이스는 1916년 런던 인근의 교외에서 태어났고,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유대인 부모는 그에게 많은 언어와 문화를 가르쳤다.
 
1936년 런던대학교 동양 아프리카 대학에서 근동 역사학을 전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영국군 정보부에서 중동 관련 업무를 맡았고, 

외교부에서도 중동 관련 임무를 수행했다. 


1939년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49년 서른세 살 나이에 근동 및 중동역사학과 학과장이 되었다.


1974년에는 프린스턴 대학으로 옮겨, 

겸임 교수직을 맡게 되면서 연구에 몰두해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1982년 이후부터는 미국 국적을 취득해 백악관 등 미 정계의 중동정책 자문역할을 수행했고, 

가장 영향력 있는 중동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어린 시절과 청년기>

어릴 때 다닌 작은 사립학교에서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역사 분야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열네 살이 되었을 때 이탈리아어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학교에서도 배우지 않는 언어였고, 

가족은 물론 지인들 중에서도 이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버지가 영어로 된 이탈리아어 문법책을 구해 주셨고 덕분에 즐겁게 공부했다. 


몇 개월 뒤에는 에그몬드 데아미치스의 <군대 생활>이라는 책을 구해 읽었고, 

이 책을 다 읽자 아버지에게 단테의 <신곡>을 구해달라고 청했다. 

이 책은 새롭고 놀라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아버지는 성년식에서 내가 읽어야 할 성경의 구절들과 낭송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 

히브리어 선생님을 모셔왔다. 
 그는 평범한 교사가 아니라 진짜 학자였다.

레온 샬롬 선생은 라트비아의 드빈스크 출신으로 런던에 정착한 유대인이었다. 

중세와 현대 히브리어뿐 아니라 성서 및 라비의 고대 히브리어도 가르쳐 주었다. 


성년식 이후에도 샬롬 선생의 지도 아래 공부를 계속해서, 

경전에서 탈무드까지 섭렵했고 아랍어도 배웠다. 

나는 많은 양의 히브리어 시를 번역했다. 
 못해도 100편은 될 텐데, 모두 10대 때 번역한 것으로 

일부는 당시 여러 잡지에 출판되기도 했다. 

 


1936-1937년 학기를 프랑스에서 지냈다. 


마시뇽 교수와 논문을 진행하면서 다양한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수업을 들었다. 

마시뇽은 당대의 유명한 학자였지만 때로는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그의 전문분야는 이슬람 종교 분파의 역사였다. 

프랑스에서 공부하면서 나의 프랑스어 실력이 꽤 늘었다. 
 페르시아어와 터키어를 프랑스어로 공부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중요한 언어가 있었다. 

바로 러시아어였다.

러시아어를 배우기 위해 처음으로 진지한 시도를 한 건 

파리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였다. 


수업에 등록하고 잠시 공부를 했지만 

수업 시간이 바뀌어 러시아어 수업과 터키어 수업이 겹쳐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이후 나는 러시아 공부를 재개해서 사전을 보면서 

러시아어 자료를 읽을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1937년 파리에서 돌아온 후, 

깁 선생은 나에게 중동에 직접 가볼 것을 권했다.

나는 주저하면서 대공항으로 우리 가족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내 상황을 잘 알고 있던 그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했고, 

얼마 후 내가 왕립 아시아 학회의 현지조사 장학생에 선발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내가 처음으로 발을 디딘 항구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고, 

도착해 3개월 동안은 카이로 아메리칸 대학교에서 아랍어 수업을 듣고 아랍어 구어체를 익힌 후, 

카이로 대학교에 청강생으로 등록했다.  

 

1945년 말 다시 학계로 돌아왔을 때 나의 관심분야는 박사 논문과는 전혀 다른 주제로 바뀌었다. 
 이스마일파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잠시 접어 두고 

미국의 저명한 중세 학자인 존 리몽트가 부탁한 아사신에 대한 글을 쓰기로 했다.


중동을 교란하고 세계를 위협하는 현대 테러 세력과 

11세기에서 13세기까지 번성한 아사신의 이야기는 교훈이 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주류 수니파에서 떨어져 나온 시아파의 과격한 분파였다. 
 결국 아사신은 이단 중의 이단이었다. 


 그들의 관행과 신념은 수니파는 물론 시아파에서도 비난받았고, 

그들의 독특한 신념을 받아들였던 레바논과 시리아의 소규모 공동체들에게도 버림받았다.


서양에서 중세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오해가 있다.  

아사신의 분노와 무기가 십자군을 향했다는 것인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들에게 희생된 십자군은 거의 없고 

이러한 오해는 무슬림 내부의 이해타산에 의해 조장된 것이다. 


이들의 공격은 외부 세력이 아니라 

이슬람권의 지배 엘리트와 지배 이념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사신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이들이 궁극적으로 완전히 실패한 집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의 첫 번째 직장은 연 250파운드라는 넉넉한 봉급을 받고 

런던대학교 동양 아프리카 대학 중근동 역사학과 보조 강사였다. 

 아마도 나의 스승인 깁 선생이 주선한 것 같다. 

첫 수업에 네 명의 학생이 수업을 들었는데, 

각각 이집트, 팔레스타인, 이라크, 이란 출신이었다. 

 

 

<전쟁 기간 1939-1945>

1939-1940년 학기를 케임브리지의 크리스트 칼리지의 환대를 받으며 그곳에서 보냈다. 

 1년 뒤 결국 징집 명령을 받았는데, 

기병대가 아니라 기갑부대였다.  

그곳에서 탱크 연대의 포병이 되는 기본교육을 받았다. 

 1941년 초, 탱크부대에서 정보부대로 전출되었다. 

언어 능력과 탱크부대에서의 무능력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정보부대에 복무했다. 


전쟁 기간 동안 런던에서 복무했다. 
 수년 동안 공습을 피해 생활하고, 일하고, 그런 상황에서 잠도 자야 했다. 
 독일 공습 초기에는 지하철역 대피소로 달려갔으나, 

이런 생활이 반복되자 곧 지쳐버렸다. 
 그래서 모든 것을 운에 맡기고 그냥 내 침대에 남아 있기로 했다.


그로부터 40년 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이스라엘로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했을 때도 

나는 그곳에 있었다.
 미사일 몇 발은 텔아비브에 떨어져 폭발했다.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 공격은 런던 대공습과 비교하면 ‘조용한 저녁 시간’에 불과했다. 


전쟁 기간 동안 영국의 적 독일은 육상과 공중에서 효과적인 전투력을 과시했으나 

정보 분야의 능력은 상당히 떨어졌다. 


 독일은 영국 내에도 거대하고 중요한 스파이 네트워크를 구축한 상태였으나 

영국 정보부는 이들 대부분을 파악 추적하고 있었다. 


 영국 정보부는 그들의 연락을 가로채 해독했기 때문에 

모든 스파이의 이동 경로를 알고 있었지만 체포하지 않고 역 이용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에게 거짓 정보를 흘려주면, 

이 정보는 본국의 수뇌부에 전달되고 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었다. 

 

전쟁 기간 중, 첫 결혼생활이 시작과 끝을 맞았다. 
 진은 여러모로 우리 가족과 비슷한 영국계 유대인 가족의 딸이었다. 
 그녀는 나보다 한 살 어렸고, 우리는 양쪽 부모의 소개로 만났다.


 당시 유대인 부모는 자녀들의 결혼에 당사자의 의견은 크게 반영하지 않았고 

구식 중매결혼이었다.
 결혼 몇 개월 뒤 징집되어 군 복무를 시작하면서 결혼생활이 단절되었고 

전쟁이 끝나기 전 상호 합의하에 헤어졌다.


1946년 나는 런던의 한 파티에서 루스 오펜하임을 만났다.
 그녀는 덴마크의 명망 있는 유대인 집안 출신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어 실력을 향상하고자 영국으로 건너왔고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에 남는 편을 선택했다. 


 이듬해 덴마크는 독일에 점령당했고 

그녀의 가족을 포함한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수용소로 보내졌다.
 우리는 만난 지 1년 만에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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